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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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단 3기를 통해 읽은 5월의 책은 최수철의 장편소설 《독의 꽃》이다. 최수철 작가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내겐 한없이 낯선 남성 작가였다. 하드커버 양장에 예쁜 디자인을 가진 책이 나로 하여금 두려움을 무한 해제시켰지만, 첫 책장을 열기까지 못내 망설였다. 그러다 문득, 작정단 3기를 하면서 경험하는 뜻깊은 순간이 바로 이렇게 내가 미처 몰랐던 묵직한 작가들을 마주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함정임 작가, 김종광 작가, 강화길 작가 등 작정단 덕분에 처음 알게 된 좋은 작가들이 많지 않았나!


 최수철 작가는 1993년 중편소설 <얼음의 도가니>로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한국적 누보로망'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중견 작가였다. '누보로망'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검색해보니 '사실적인 묘사와 이야기의 치밀한 구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을 부정하고, 작가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적인 생각이나 기억을 새로운 형식과 기교를 통해 재현하려는 경향의 소설'을 의미한다고 한다. 다른 말로 '반소설'이라고도 부른다고. 영화로 비교해보자면 장 뤽 고다르, 프랑소와 트뤼포의 필름으로 대표되는 '누벨바그' 필름과 대응된다고 하겠다.


 이 책 《독의 꽃》은 '독'을 집요하게 추궁하고 독과 더불어 살아야 했던 한 남자의 인생을 주인공 '나'의 시선으로 좇는다. 주인공 '나'는 상한 음식을 먹고 독에 감염되어 입원을 한다. 같은 병실에서 독으로 인해 죽어가는 삼십대 후반의 조몽구를 만나는데 조몽구는 늦은 밤마다 '독'으로 가득찼던 자신의 인생을 중얼거리곤 했다. 조몽구가 죽었는지, 실험실로 옮겨졌는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체를 망가뜨린 독과 투병을 이어가고 있는 주인공 '나'는 조몽구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대신 전하기로 결심한다. 조몽구의 이야기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가 먼지로 돌아가기 전에 적어도 한 순간, 나를 이 세상 이 자리에, 죽음에 근접하여 더없이 신비롭게만 여겨지는 이 우주의 한 장소에, 나를 붙들어 두어줄 그 무엇, 위태롭게나마 내가 계속 서 있을 수 있도록 지탱해줄 수 있는 그 무엇을 나는 뜨겁게 갈구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조몽구의 이야기였다.

 프롤로그 이후의 본문은 바로 '나'가 늦은 밤 조몽구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조몽구의 이야기다. "태어날 때부터 독을 몸에 지니게 되고,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그 독을 키우고, 그 독을 약으로 사용하고, 그러다가 독과 약을 동시에 품고서 죽음에 이르게 된 한 인간" 조몽구가 "'독'에 대해 쉬지 않고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는 이야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나'가 조몽구를 만나게 된 배경과 이야기를 마친 후의 술회를 담고 있고, 본문은 각각 조몽구의 유년 시절, 중학 입학부터 군대 시절 청년기, 입사 이후 성년기를 다루며 시간의 흐름을 따라간다. 이 흐름에서 '독'을 품었거나 '독'에 무언가를 잃었거나 '독'을 이용하는 캐릭터들이 조몽구를 스쳐간다.


 '독'이 가진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나쁜 것, 악한 것, 힘들게 하는 것, 갉아먹는 것, 복잡한 것, 아프게 하는 것…… 하지만 이 책은 '독'의 이분법적인 이미지를 해체한다. 조영로의 파탄적인 행동을 감내해야 했던 조몽구의 어머니 고운선이 견딜 수 있던 힘, 두통에 시달리며 이마를 긁지 않으면 안달이 났던 조몽구가 학급에서 괴롭힘을 당하자 벌레와 곤충을 좋아하는 척하며 만들어낸 방패, 독의 노예였던 삼촌 조수호를 각성하게 만든 해결책은 모두 '독'에서 비롯되었다. 독을 중화시킬 수 있는 약도 결국 독이라는 것이다. '독'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은 삼촌 수호의 아래 대사에서 더욱 드러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랑을 만나면 약이 되고 원한을 만나면 독이 돼.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우리의 하루하루는 독과 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
 결국 조몽구의 일생을 보여줌으로써 최수철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도 '독'이 '약'이 될 수 있듯 세상은 무조건적인 이분법의 논리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 아니었을까.

 아쉬웠던 부분을 꼽자면 조몽구에게 '해독'을 해주는 여성 캐릭터들이었다. 조영로의 질투를 느껴야 했던 엄마부터 조몽구와 같은 학급 소녀 '자경'이나 조몽구를 간호했던 간호사 '영지' 같은 인물이 조몽구에게 해줬던 일들(조몽구를 씻겨주는 일, 조몽구를 끌어안고 이마를 만져주는 일, 조몽구의 성기를 애무하는 일)은 조몽구의 '독'을 일시적이나마 해소하는 '해독'의 장면이다. 이때 여성 캐릭터들의 행동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고 불편했다. 여성을 신성시하고 구원자로 다루는 기존 여성상을 답습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흡입력 있는 문체와 집요한 서술이 매력적인 책이다. 아름다운 디자인에 홀려 책을 구매한 독자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금세 빠져들어서 하루 안에 다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꽤 두께감이 있지만 걱정할 필요 없단 소리! 기억에 남는 문장들은 역시 '독'의 이중적인 이미지를 목도하는 대사들, 그리고 '독'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 대사들이었다. 아래 문장들만 따로 모아 덧붙여본다.



"그날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던 거야. 독은 내게 다정하고 친숙했어. 비로소 나는 내가 독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 (……)"

"세상에는 함부로 맛보았다가는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있지."
"그게 뭔가요?"
"독이야."
"왜 독을 맛보나요?"
"실험을 하기 위해서지. 독은 위험하지만 무척 흥미롭거든. 사람들이 독을 가지고 온갖 일을 벌이는 것도 그래서지. 독에는 운명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말이야."

"인생이 뭔지 한마디로 말할 수 없겠지만, 이런 말은 할 수 있지. 인생의 매 순간은 독과 약 사이의 망설임이야. 망설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오래 주저하고 머뭇거려서는 안 돼. 어느 순간 약은 독이 되어버리니까."

"이제 나는 독과 하나로 살아가야 해. 그건 내 유한한 생명으로 벌일 수 있는 가장 특별하고 위대한 일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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