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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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은 2003년에 작가정신에서 펴낸 바 있는 박완서의 짧은 소설집이다. 이번에 리커버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원래는 1981년 《이민 가는 맷돌》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던 콩트집이 전신이었고, 이 콩트집이 절판된 지 십여 년 만에 작가정신에서 살려낸 소설집이라고 한다. 따라서 작품 대부분이 70년대에 쓰여졌다.


 박완서가 '책머리에'서 이 콩트집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유신시대에는 '잘 살아보자'는 구호에 맞춰 대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날 때였고, 각 기업들이 앞다투어 사보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사보에서 선호하는 문예물이 바로 콩트였고, 당시 문예지와 일반 교양지와는 댈 필요도 없이 비싼 원고료를 제공했었다고. 박완서는 높은 원고료에 이끌려 화장품회사 사보에 콩트 연재를 하기도 했었지만, '작가로서 자기 세계를 확립하기도 전에 돈맛부터 알게 된 자신'에 싫증이 나서 사보 청탁을 거절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내겐 이 소설집이 내가 읽는 박완서의 첫 작품이었다. 때문에 유명 작가의 문체를 처음 읽는다는 생각에 읽기도 전부터 들떴다. 읽어보고 나니 짧은 소설집의 특성 상 장편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촘촘한 내러티브나 다양한 캐릭터를 엿볼 수는 없어서 아쉬웠지만, 박완서라는 작가의 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70년대라는 시대상이 물씬 느껴져 향수와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여성으로서 그때와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여성관과 여성의 고민이 보여 흥미롭고 안타까운 책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짧은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시리즈다. 총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는 시리즈는 각각 분희-경숙-후남이라는 여성 셋을 조명하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다. 이들은 시어머니, 며느리, 손녀로 이어지는 가족관계이기도 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1>은 시어머니가 질투하듯 분희와 남편 장석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고 고부갈등을 암시하며 막을 연다. 이에 장석은 어느날 갑자기 분희를 뒤란으로 끌고가서 마른 콩깍지 더미 위에 그녀를 눕혀 겁탈한다. 분희가 젊었을 적은 70년대보다 앞선 시대이니 부부강간이라는 개념이 더욱 생소하고 낯설었을 시기다. 장석은 이후 읍내 색주가와 정분이 나서 분희를 외롭게 했고, 서른 겨우 넘긴 젊은 나이에 징용으로 끌려가 영영 오지 않게 된다. 허나 분희에겐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가 시어머니에게 외아들을 안겨드린 뒤로 시어머니는 분희를 더이상 괴롭히지 않는다. 아들 덕분에 숨통 트일 기회를 얻은 것이다.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하던 시절, 분희의 기구한 사연은 분희 역시 외아들에게 집착하는 시어머니가 되게끔, 기울어진 사고방식을 되물림하게끔 만든다. 


 분희가 시대의 가해자로 작용하는 모습은 분희의 며느리 경숙 앞에서 드러난다. 경숙이 첫 아이로 딸을 낳자 분희는 딸 이름을 굳이 후남(後男)으로 짓기를 고집하고, 경숙은 울며 겨자먹기로 딸 이름을 시어머니 뜻대로 짓는다. 경숙과 남편은 금슬이 좋았고 경숙은 자신의 의견을 똑바로 말할 수 있는 당당한 여성이었지만, 그녀가 불임 판정을 받으면서 시어머니 분희에게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은근한 압박을 받고 기를 펴지 못하게 된다. 결국 경숙은 남편이 첩을 들이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첩이 아들을 낳아 (집안에서 가장 큰 어른인) 시어머니가 주도하는 가부장제 서사에서 이방인이 된다.


 분희와 경숙의 상처는 훌륭한 학교를 졸업하고 S산업의 사원으로 채용된 똑똑한 후남이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후남은 회사 동기와의 연애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회사로부터 꾸준히 일을 그만두라는 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일과 결혼을 두 손에 함께 쥘 수 있다는 용기가 있던 후남은 사직서를 내지 않는다. 이에 회사는 그녀와 남편 기철을 속초와 진주로 멀리 전근 발령을 내려 둘 중 한 명(특히 후남)이 퇴사하게끔 종용한다. 후남은 점점 투지를 잃는다. 아들을 지방으로 좌천시켰다는 시집 식구의 비난보다, 할머니 분희와 어머니 경숙의 애걸 때문이었다. 시집식구 눈밖에 나 시집살이를 마저 못 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며, 더욱이 자신을 외아들과 다를 바 없이 떳떳하고 독립적으로 키운 어머니 경숙의 애원을 보며 후남은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이 시리즈는 '여자 길들이기'의 음모가 끝나지 않은 도시에서 후남이 거듭 고배를 마시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세 여성의 서사와 캐릭터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꾸준히 담당해온 남아선호사상의 피해자이자 가해자, 가부장제 이방인, 고정된 성역할과 똑똑한 여성의 프레임을 보여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3>는 남성 동기가 압도적으로 수세인 70년대 대기업에서 똑똑한 여성인 후남이 받는 질시와 후남 스스로 느끼는 고민이 현재 2019년에도 다르지 않아 놀라운 작품이기도 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박완서는 첨예한 고부갈등과 여성이 점차 가부장제와 고정된 성역할을 체화하는 과정, '아들'과 '딸'이라는 생물에게 느끼는 양가감정을 (딸을 원친 않았지만 효도로는 좋다는 분희의 입장이나, 딸과 아들은 둘 다 독립적일 수 있다고 하면서 딸이 시집을 가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경숙의 입장) 깊은 통찰력으로 명징하게 그려낸다. 시대를 앞선 작가 덕분에 70년대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박완서의 유명작들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굳건하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또한 이 책은 박완서의 유명작만 봐았던 독자에게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갈 소설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짧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매력을 느끼도록 만들어준 책이기도 해서, 출판사 마음산책에서 나왔던 김금희 작가나 이기호 작가의 짧은 소설집도 이 책 이후 연달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역시 앞서 언급한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3>에서 골랐다. 아래 첨부한다.

후남이는 결혼하길 원했으나 예속되길 원하진 않았다. 사랑받고 사랑하길 원했지 애완받고, 애완받기 위해 자기를 눈치껏 변경시키고 배운 걸 무화시키길 원치는 않았다._<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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