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구덩이가 있다. 때론 얕고 때론 깊다. 얼마나 깊을까. 이번에는 눈짐작으로 가늠하기 쉽지 않다. 그 정확한 깊이는 빠져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흐린 진흙 구덩이,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어쩌면 뛰어넘다가 발만 더러울 수도, 어쩌면 피를 흘릴 수도 있다.

나는 내게 묻는다. 저걸 넘을 수 있어? 그래, 그건 감당할 수 있어. 그 정도면 목숨을 잃을 정도가 아냐. 그리고 가볍게 쉼호흡을 한다. 사실 조금 무섭다. 하지만 그건 참을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 나는 구덩이를 넘을 것이다. 늘 그래왔으므로. 앞으로도 구덩이를 넘을 것이다. 팔을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며, 최대한 기회를 옆보다가.

그리고 훌쩍 뛰어넘었다.

이번에도 역시 운이 좋다. 나는 늘 운이 좋은 편이다. 저번에도 발가락 하나만  주었을 뿐이다. 그 땐 날카로운 돌모서리에 발가락이 찢겼다. 날카로운 아픔보다 부어오른 발을 잡고 며칠을 앓던 풀숲의 밤이 더 무서웠다. 썩은 고기를 노리던 승냥이들의 울음소리가 더 무서웠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았다. 이렇게 내어줄 발가락이 아직 몇 개나 더 있다.   

때론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그런 깊이의 구덩이를 만나곤 한다. 그 때는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리고 또 기다린다. 나는 성급하지 않다. 먼저 뛰어들어간 성급한 이들의 시체가 그 구덩이를 메울 때까지. 내가 잃어야 할 것이 목숨이 아닐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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