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의 머리카락 - 이토준지 공포만화 콜렉션 1
이토 준지 지음 / 시공사(만화)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1. 카페인 가득한 블랙커피 같은 만화다. 처음에는 뭔 맛으로 마시나 싶다가도, 점점 자극적인 쓴 맛에 빠져드는, 그런 만화다. 일상이 너무 지루해서, 무심결 잡아든 만화책을, 끝까지 읽게 되었다. 피가 난무하고 악령이 배회하고 평소에는 그냥 무심결 지나쳤던 달팽이의 껍질이 갑자기 공포스럽기 시작하는, 그런 느낌. 그래서 그 낯선 당혹감을 만나기 위하여... 나는 이토준지의 만화책을 다시 찾을 것이다.

2. 결국 공포 콜렉션과 소용돌이 등을 거진 다 읽고 말았다. 평소에 친근했던 물건들이 역시 다르게 느껴진다. 풍선, 머리카락, 달팽이 껍질 등... 내 나이가 30대라서 이렇게 안도감을 느낀 적은 처음이다. 아마 10대였으면 밤잠 자는 데 어지간히 힘들어 했을 것 같다. 과학 교육을 많이 받아서 정말 다행이다. 만약 초심령현상을 다 믿는 이였다면 한동안 이 작가를 사이비교주로 추앙했을 터이다.

작은 이미지가 모여서 독립된 소품이면서 긴 줄거리를 지닌 연결된 장편 작품들은 작가의 공포세계에 폭 빠지게 한다. '소이치의 즐거운 일기', '사자의 상사병', '소용돌이'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소이치의 즐거운 일기'는 이토준지의 작품치고는 따뜻한 유머가 있다고 보고, '사자의 상사병'은 단순히 내뱉는 말 한 마디가 인간의 운명을 바꾼다는 설정이 설득력이 있다. 역시 공포콜렉션에 소개되지 않고 따로 소개된 '소용돌이'는 소용돌이 무늬에 대한 작가의 치밀한 관찰력이 압권이다. 대표작인 '토미에'는 너무 잔인해서 별로 권하고 싶지 않지만 이토준지의 그림체에 빠져들수록 토미에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아름다워진다.

3. 이토준지의 '프랑켄슈타인'을 읽던 그 날 저녁, 텔레비젼에서 안젤리나 졸리의 '툼레이더'도 했었다. 여주인공의 잘 다듬어진 몸매에 몹시 감탄했었나 보다. 난 꿈을 꾼다. 칼을 들어 툼레이더의 머리를 잘라 버리고 그 멋진 몸뚱아리에 내 머리를 갖다 붙인다. 아직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목을 한 번 쓰다듬으면서 씨~익 웃는 내 자신을 꿈 속에서 본다. 둥근 내 얼굴과 잘 빠진 몸의 엄청난 부조화. 경악...이런 이런, 너무 만화책을 많이 읽었군...

이토준지가 불쌍하다. 만화책을 읽은 내 꿈자리가 이렇게 사나운데 작가의 꿈 속은 얼마나 공포스러우며 악령이 배회할까, 독자에게 좀더 신선하고 자극적인 만화를 보여 주기 위해, 고통받는 작가의 뇌세포를 생각하면 작가가 불쌍하다. 그러나 내가 이 만화책을 별 넷이 아닌 별 셋을 주는 까닭은,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면 밤잠을 설치고 건강에 해롭듯이, 이토준지의 만화도 자극적이라 조금 가리면서 읽어야 할 듯 싶어서다. 외진 곳이나 밤이 무서운 노약자나 임산부는 절대 접근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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