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외면해도 시는 세상을 껴안습니다. 시의 존재방식이 그렇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세상을 껴안는 글은 모두 시가 됩니다. 외연을 좀 넓혀 쓴다면 말은 모두 시여야 합니다. 서늘하고 무덤덤한 포옹도 좋습니다. 두 팔과 가슴으로 감싸 안을 때 말은 몸으로써 완성됩니다. 고맙게도 저에겐, 말의 박동과 호흡, 온도를 체득시켜준 시가 손가락과 발가락 다 합친 수를 훨씬 웃돌게 많습니다.

 

 문인수의 시집 『배꼽』에는 주름이 많습니다. 회오리바람처럼 안으로 파 들어간, 풍선 꼭지같은 배꼽 주름 말고 세파의 기억을 숨긴 노년의 주름이 많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시의 무대에 선 그들은 대부분 노인 그리고 장애인입니다. 그들은(아니, 어쩌면 우리는) ‘꼭지’입니다. “여생을 핥는지, 참 애 터지게 느리게/골목길 걸어 올라가”는 ‘여분의 꼭지’입니다. 잉여라는 말은 좀 못됐습니다. 못되게 쓰여온 것 같아서 이 자리에서 쓰고 싶지 않습니다. 여분은, 소비하고 소비되는 생활의 습관을 멈추는 힘이고 타성에 깃든 상식에 틈을 내는 여백입니다. 그런 뜻으로 전 ‘여분’이라고 씁니다.

 

 『배꼽』에 들어간 시들 간엔 편차가 크지 않습니다. 고루 좋은 시들 중에도 「이것이 날개다」는 누구나 읽고 나면 멍할 만한 작품입니다. “뇌성마비 중증 지체 언어 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 씨가 죽었”습니다. 이름 세 자의 네 갑절이나 되는 긴 수식이 짧지만 너무 길었던 그 생을 또렷하게 말해줍니다. 조문객이라곤 비슷한 고통으로 알음알음하던 몇몇뿐입니다. “이들의 평균 수명은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습니다. ‘배려’라는 시어가 지면을 뚫고 나와 가슴을 후벼 팝니다. 자판 설정을 기호로 돌려놓고 아무렇게나 눌러 친 듯한 두 문장은 조문 온 이정은 씨의 말입니다.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여분입니다. 노도처럼 밀려오는 여분 때문에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저립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 땅에 내려앉아 “비틀어 올리는 몸짓”들의 말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에 꼭지 할머니처럼 느리게 읽을 수밖에 없는 문인수의 아픈 시들이 저를 껴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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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 든 책이 예상 외로 두껍고 흥미진진했습니다. 번역된 제목만 봐서는 야사 풍의 가벼운 입문서일 것 같았는데 오해였습니다. 꼼꼼하고 치열한 연구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다 읽고 나면 스피노자를 흠모하게 되고 라이프니츠를 동정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화상을 본 것 같아 쓴웃음 짓게 됩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르가 정치적 인간 라이프니츠와 닮았고 모차르트는 흡사 스피노자와 닮았습니다. 구도가 그럴 뿐 동일한 건 아닙니다.

 

 먼저 라이프니츠. 스피노자라는 이단아를 적을 규정한 채 철학적 과업들을 수행했고 스스로를 철저히 안티-스피노자주의자라고 공언했지만 결국은 스피노자의 자장에서 철학한 ‘최초이자 최고의’ 스피노자주의자라는 게 저자의 해석입니다. 그는 사유하는 즐거움만으로 삶을 연명하기엔 세속적이었습니다. 기회주의자에 속물이었지만 비범한 능력으로, 빛나는 지적 유산을 남긴 이 못생긴 독일인은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그 많은 사람이 천재는 아닙니다.

 

 다음으로 스피노자. 그는 여러모로 라이프니츠와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유태인이며 과묵했습니다. 그러면서 가끔 내뱉는 말과 분위기에 담긴 특출난 지성, 유물론과 진보주의를 내장한 위험 인물, 게다가 검소하기까지 했으니 라이프니츠와는 정확히 거울상을 이루는 셈입니다. 책을 다 읽고나면 이 ‘철학계의 그리스도’(질 들뢰즈)의 단조로운 삶 안에서 빚어진 뜨거운 사유의 울림을 가만히 우러르게 됩니다. “어떻게 유물론자가 영적일 수 있는가?” 여기 스피노자라는 답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 모두 그 과정과 결과는 선연하게 달랐지만 인간이라는 본질은 동일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모순과 이율배반입니다. 우리가 모두 두 사람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수는 없겠지만 두 가지 삶의 양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참고로 이 책의 원제는 『조신과 이단자』(the courtier and the hereti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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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스칼 키냐르는 소설 아닌 소설을 씁니다. 그에게 장르적 관습은 아무리 헐거워도 불필요한 틀일 뿐입니다. 그는 왜 특정 형식을 취해야 하느냐 반문하는 동시에 왜 다양한 형식을 자유롭게 취하면 안 되느냐 반문합니다. 그렇게 키냐르만의 문체와 형식이 탄생했습니다. 『로마의 테라스』는 그 특유의 형식은 여전하지만 개 중엔 소설의 상식에 가장 가까운 작품입니다.

 

 이야기 주인공의 이름은 몸므. 직업은 판화가며 17세기에 생몰했습니다. 질산에 맞아 화상 입은 얼굴은 매우 흉측합니다. 이건 몸므가 여러 스승을 거쳐 판화가로 독립하는 이야기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핵심은 사랑에 있습니다. 키냐르의 모든 글은 사랑을 질료로 삼은 담론들입니다. 키냐르는 이 책에 대해 “사랑하던 여자의 아들을 친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간단 명료하게 말했다는데, 질문을 한 기자는 키냐르를 무례하게 여겨 화를 냈다지만 활자로만 내용을 접한 저로선 적절하고 명쾌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끝을 말하자면 몸므는 친자로 인정하지 않은 남자의 손에 죽습니다.

 

 그는 사랑의 흔적에서 끝까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어쩌면, 모든 사람이 그렇죠. 서로를 모르는 상황에서 몸므는 바닥에 누워있었고 아들은 그 위에 앉아 칼을 들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습니다. 몸므의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흔적은 손끝으로 전해졌고 그 손은 무수한 철판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은 성경 이야기, 역사, 성 행위 등을 담고 있지만 몸므는 단 하나, 그가 “늘 꿈꾸던 포옹의 자세를 취한” 한 여자의 육체를 그렸을 뿐입니다. 그리고 몸므는 그녀가 낳은 아들의 손에 죽임 당합니다.

 

 비극적 죽음을 그리는 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자칫하면 이야기의 흐름을 무시하고 남발한 무대장치 때문에 설득력을 잃고 진부해집니다. 그것은 재능과 타협의 문제입니다. 최초의 영감에 피와 살을 입히는 과정에서 조급해하지 말고, 쉬운 길과 타협해선 안됩니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엔 운명의 힘이 있는데, 그대로 완벽하기 때문에 단 하나도 바꿀 수 없는 힘입니다. 『로마의 테라스』는 그런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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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은 제게 각별(저 말고도 그런 분 많으신 것 같지만)합니다. 글로 치자면 그는 제 독서이력에서 최정상을 차지합니다. 학부 시절,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루카치의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추천도서 서가에서 벤야민 선집을 집어 들었을 때 인연에 덜미 잡혔습니다. 그는 자신의 우울기질을 사유와 글쓰기에 적극 투영한 지식인인데 저는 그 점에 반해 그를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잔 손택의 벤야민론 제목은 「토성의 영향 아래서」인데 그 원전이 『독일 비애극의 원천』입니다. 점성술의 풀이에서 우울질은 토성의 기질입니다. 벤야민은 우울이나 멜랑콜리 대신 토성의 탓으로 제 기질 말하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가 17세기 독일 바로크 비애극의 중심에 폭군의 우울과 무능력을 두고 연구를 개진할 때 그것은 벤야민 자신의 우울과 무능력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벤야민 자신이 쓴 벤야민론입니다. 학술 논문임에도 뛰어난 스타일리스트 벤야민 고유의 생리가 글의 면면에 물큰 피어오릅니다.

 

 벤야민을 읽으며 학문에 대한 제 선입견도 갈아엎을 수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에 정 붙이기 시작해 복수전공으로 철학을 선택했지만 철학과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선이 있었습니다. 상징적으로 그 선은 칸트였습니다. 정언 명법으로 대표되는 엄격함. 그건 기계의 사유처럼 차갑게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학문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거기에 연구자 개인의 고유색이 흘러드는 건 당연한 것이죠. 벤야민을 통해 그 사실을 익히고 나니 칸트로 상징되는 철학은 간밤 꿈처럼 멀어졌습니다. 칸트가 벤야민으로 바뀐 건 아니고 벤야민 계통의 학자 영역이 칸트 옆에 똬리를 틀고 저를 받아준 것입니다. 제가 만약 칸트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건 벤야민을 경유해서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런 연유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과 함께 제 독서이력에서 중요한 성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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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 산책 - 정운영의 마지막 강의 Economic Discovery 시리즈 7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책을 덮으며 경제학은 필수 교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인간 머리 꼭대기에 있는 현실에 대한 처세가 아닙니다. 돈과 물질의 흐름을 거시적으로 보는 안목을 기르는 중에 지성을 무릎 꿇리지 않으면서 가슴이 뜨거울 수 있습니다. 인문학은 별 게 아닙니다.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인문’입니다. 경제학도 인문입니다. 수치와 그래프만 내세워 인간의 자리를 밀어내는 전문가들의 경제학은 경제학일 뿐입니다. 그건 사이비입니다.

 

 이 유고집이 내세우는 문제의 꼴은 한 단어로 ‘세계화’입니다. 저자 정운영 씨는 좌파 경제학자입니다. 제 모자란 깜냥으로 이 한 권의 정운영 씨를 평할 때 그는 균형잡힌 좌파입니다. 그는 당대(21세기 초) 진행됐고 지금도 이어온 세계화에 부정적이지만 그건 한 인간이 당연히 해야 할 가치판단입니다. 하지만 수록된 글들이 저자의 판단을 강화하고 독자에게 전염시키고자 선별한 정치 팜플렛이 아닙니다. 정운영 씨는 좌파로 규정하기 전에 학자로 봐야 합니다. 그만한 양심을 지킬 줄 알아야 좌파, 우파를 논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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