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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타자기용 종이를 집으려고 창가 책상 아래로 손을 뻗었는데, 그 밑에 원고뭉치에 묻혀있는 책 세 권 중 한 권이 [새로운 종교개혁]이었다. 1년여 동안 책을 멀리하고 지내려고 했지만 어떻게 해서 몇 권은 그래도 방안으로 또 기어들어 왔다. 책이 금지된 이 작은 방 안에서, 나 자신의 목소리게 귀 기울이려 애쓰고 내가 정말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발견하려고 애쓰는 이곳에서도, 폴 굿맨의 책이 최소한 한 권이 있다는 건 어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인지 모른다. 지난 20여 년 동안 그의 책 대부분이 다 갖추어지지 않은 집에서는 한 번도 산 적이 없으니 말이다.(23면)」 comment: ˝독서에는 증발되지 않은, 축적되고 응결된 운명의 지문이 남아 있다. 우리 독자들, 또는 작가들은 그 지문의 애무로 살아가는 것 같다.˝ 「파시스트 미학을 상기시키는 예술이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아마도 캠프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파시즘이 최신 유행일 수도 있다. 온통 뒤범벅인 취향의 유행만이 우릴 구원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10여 년 전에는 소수자나 상대적인 취향으로서 분명히 옹호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던 예술이 오늘날에는 그럴 가치가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야기하는 윤리적 문화적 문제가 전과 다르게 너무 심각하고, 심지어 위험해졌기 대문이다.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진실은, 엘리트 문화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대중문화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고, 또 소수의 문화로서 무해한 윤리적 문제만을 제기하는 취향이라도 제도화되면 불순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취향은 컨텍스트이고, 그 컨텍스트가 달라졌다.(54면)」 comment: ˝이 책에 실린 글 중 가장 정치하면서 또는 (한나 아렌트가 그랬던 것처럼) 가장 그녀다운 파시즘 비판의 지적이고 날카로운 면모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할 일을 이번엔 같은 여성으로써 히틀러의 그늘 아래서 카메라를 돌렸던 레니 리펜슈탈을 분석함으로 먼저, 이미 해낸다.˝ 「항상 그대로의 사람.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벤야민은 형편없는 방향감각과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능력 덕에 여행을 사랑하게 되고 헤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시간은 많은 여유를 주지 않는다. 시간은 뒤에서부터 우리를 뚫고 들어오고, 좁다란 통로를 통해 우리를 과거에서 미래로 밀어낸다. 그러나 공간은 넓고, 가능성, 위치, 교차로, 통로, 우회로, U턴, 막다른 골목, 일방통행로 등이 가득하다. 실제로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다. 토성적 기질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74면)」 comment: ˝20세기 가장 독특한 지식인이자 생환의 스타일리스트 벤야민의 느림과 방향상실이 그의 (미)완성의 추진력이었다라면, 벤야민적 징후가 회상과 독서에 갇히지 않고 사건으로 되풀이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시대의 과업일지도 모른다. 벤야민은 그가 강조하고 투영한 기질과 전연 차이를 보이는 누가 있든 간에 모든 작가의 원형과도 같다. 이 글의 제목이 책의 제목이 됐듯이 그녀의 애정과 타인(벤야민)을 통한 자신(손택)의 이해는 분량상 적절하고 내용상 흥미로우며 스타일상 매번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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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 2 명 신청합니다. 7년 전 모 신문에 연재하시던 `동무론`을 만났던 작고 보잘것없지만 반짝반짝 빛나던 그날의 사건 이후 이제껏 숙독하며 생각 벼리를 키우는 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당신의 육성과 사진으로 전해지던 `이상한 칠판(들)`. 단 하루라도 제 오감으로 공동의 장소에서 체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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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문익환 목사의 호는 늦봄이라 하고 배필이신 박용길 전도사는 봄길이라 한답니다. ‘봄’이라 이름한 거대한 꿈 앞과 뒤에 기다림과 올바름은 수수하면서도 끈질긴 어떤 건강한 낭만을 지시하는 것 같습니다. 김형수 시인이 쓴 <문익환 평전>(실천문학사)의 서문에는 아래와 같은 가독성 좋은 감동적 풀이글로 한 맺음을 해놨습니다. 



 “늦봄! 이것은 그냥 예뻐서 취택된 언어가 아니었다. 그 뒤켠 어디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이 아름다운 어휘를 그는 방패로도 사용했고 이정표로도 사용했다. 방패로 사용될 때는 ‘늦게 봄’이라는 행위언어였지만 이정표로 사용될 때는 ‘늦은 봄’이라는 계절언어였다. 아내의 아호를 ‘봄길’로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가 후자 쪽에 무게중심을 두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어진다.”(51쪽)


 ‘늦봄으로 살(방법)’고 ‘늦봄을 살(목적)’아 온 문익환 목사는 유학지에서 박용길 전도사를 만난 이후 평생에 1천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소설가 김성동 씨는 일찍이 유서 깊은 집안에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고 합니다. 남북조 시대의 문인 주흥사가 한자 천자로 교본한 <천자문>을 네 글자씩 끊고 여덟 글자씩 묶어 각 문장을 간단하게 풀고 그 밑에 쓴 자기 글 125편으로 책을 엮어 <김성동의 천자문>(청년사)을 냈습니다. 글 각각은 천자문 풀이와 영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한자에 담긴 중화사상이나 가부장제, 국가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읽기도 하며 생태 문제나 인간성을 상실한 세태에 대한 쓴맛 등 그가 평소 접근하고 주장하던 생각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관한 일화 등의 가정사가 주조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곡기를 끊어 자진하심으로써 선비의 길을 지키셨던” 증조 할아버지나 “성균진사의 아들이요 외주부사의 손자로 정유년(丁酉年)에 태어나셨던 조선 사람” 할아버지, 어릴 때부터 영특하였고 일 제국주의 치하에서 독립을 위해 애쓰다 일찍이 숨을 거둔 아버지. 사람이 역사를 바로 알면 시름하게 되고 제대로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 흐르는 꼴은 어둡기만 해, 김성동 씨의 글을 따라 가다보면 가슴이 허덕입니다. 손자에게 한학을 가르치던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봉생봉이요 용생용이라던 옛사람의 말두 증녕 허언이었더란 말인가.”라며 아버지와 김성동 씨를 비교하곤 했다죠. 하지만 그것이 질투나 수치만으로 풀어낼 단선적인 속사정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부끄러움과 그리움이 더 농도 짙었던 것 아닐까요? “청춘 시절에 이성을 구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김형수)라는데, 김성동 씨가 두 편으로 나누어 올린, 어머니에게 보낸 아버지의 연서는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복원하고자 한 마음짓으로 쓴 글 아닐까요?



 “새록새록 그대의게 대한 애착심이 더 깊어질 뿐, 이것이 곳 나의 유일한 생명선인가 하오. 허위만으로 얼킨 부평 같은 인생에 순진한 사랑마니 오즉 아름다웁고 행복될 것으로 밋어요. 물질에서 구하는 행복은 다만 인생의 가치를 저락식힐 뿐이오. 공명으로 인연된 행복도 허영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밋어요. 물질과 영요글 멀니하고, 순결하고 진실한 사랑을 주고밧으며 정신적으로 유쾌하고 만족한 생애를 누린다면 이것이 가장 슝고한 행복일 것이오. 미물이 안인 사람의 당연한 의무라고 안이할슈 없슬 것이지요. 이러사면 행복이라 하는 것은 곳 자긔마음 여하여 달였슬뿐, 마음을 떠나 구할곳이 업슬줄노 밋어요.”(편지 부분)




 편지 곳곳에 보이는 낯선 표기와 어휘는 다음 책을 언급하기 위한 연결 지점이기도 합니다. 송재학 씨가 가장 최근에 낸 <내간체를 얻다>(문학동네)은 단단한 시집인지라 제 사유와 언어로 몇 글자 풀어내는 것이 어려운, 고단위의 어휘와 단단한 사색의 시집입니다. 단, 제가 쓸 글 이름만큼은 ‘초록의 소리’라고 얼추 잡아놨지만요. 그 중 한편만 집어 여기서 말하려 하는데, 시집 제목과 동일한 세번째 시편 ‘내간체(內簡體)를 얻다’입니다.



 “보자기와 매듭은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은 순순히 결을 허락해 개구리밥 사이 너 과두체 내간을 챙겼지 도근도근 매듭도 안감도 모두 운문보라 몇 점 구름에 마음 적었구나 삽시간에 유금에 적신 물방울들 내 손등에 미끄러지길래 부르르 소름 돋았다 그 많은 고요의 눈맵시를 보니 너 담담한 줄 짐작하겠다 빈 보자기는 다시 보낸다 아아 겨울 늪을 보자기로 싸서 인편으로 받기엔 얼음이 너무 차겠지”



 송재학 씨는 내간체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남광우의 <교학고어사전>(교학사, 1997년)을 참고로 말 그대로 내간체를 얻은 듯이 이 내밀한 시를 써냈습니다. 옛 아낙들이 문창호 안쪽에서 오글조글 단아하게 써 나간 태의 시인데 다른 시편들을 껴안는 품을 몇 겹으로 안은, 정말 천천히 읽어야 할 시입니다. 그런데 그 품은 ‘늪’입니다. 그 속을 한눈에 꿰뚫기 어려운 초록, 검죽죽하고 걸죽한 초록의 늪으로 들어가는 유동하는 바람과 모래의 물, 그 물의 시입니다. 이로서 독자는 “상처의 안팎으로 들어가는” 시의 문 앞에 서게 됩니다.




 덧 – 아, 제가 인용한 시의 부분은 사실, 고어와 옛 어투로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아래 하 자 등을 쓰는 한계가 있어서 시에 뒤이어 쓴 풀이된 현대어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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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작성한 페이퍼의 연장이다. 어제 읽은 <예레미야 애가>의 도입부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유다는 욕보면서 살아오다가 끝내 잡혀가 종살이하게 되었구나. 이 나라 저 나라에 얹혀살자면 어디인들 마음 붙일 곳이 있으랴. 이리저리 쫓기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뒷덜미를 잡힌 꼴이 되었구나."(1:3, 공동번역)

 

 <예레미야>는 구약의 선지서 중에서도 당대 국제 정세와 역학관계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 와중에 힘의 논리나 민족주의적 사고를 깨려는 하나님의 계시가 예레미야라는 개인에게 수렴해 지배계층과 계속 투쟁한다. <예레미야 애가>는 결국 예레미야와 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남 유다가 바빌론의 손에 멸망한 후 무너진 성터와 참혹한 삶의 현장을 목도하여 망국의 한으로 부르는 슬픔의 노래다. 알다시피 '이산(이산)'으로 번역되는 디아스포라의 어원은 바빌론 유수 때 유대인들에 뿌리 내리고 있다.

 

 망국의 한은 그대로 우리나라 역사에도 포개진다. 문익환 목사의 <히브리 민중사>를 보면 내게 각별한 대목이 있다. 

 

 “사내 아이가 나면 목을 졸라 죽이라고 했으니, 그래도 안 되니까 나일강에 갖다 버리게 했으니, 그 어머니들의 한이 오뉴월의 서리로 에집트 위에 안 내릴 수 있겠어?”
이건 70년대 민족수난사 속을 뚫고 나오시면서 출애급기를 읽으시다가 내뱉으신 나의 어머님의 말씀입니다. 어머님의 두 아들은 다 무사히 감옥에
서 살아 나왔지만, 그렇지 못한 가엾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머님은 억울하게 죽어 나온 그 사람들과 그들의 어머님들의 심정으로 성서를 읽으셨던 것입니다.
 (중략)
 아침 식탁에서 어머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를 들으면서, 그 기도에 ‘아-멘’하면서, 나는 어머님의 하느님도 나의 하느
님도 또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이들의 하느님도 다름 아닌 히브리인들의 하느님 야훼라는 걸 느끼는 겁니다. – 24p

 

 

 

 

 

 

 

 

 

 

 

 

 

 

 

 

 

 

 

 

거대한 시간 사이에 끼인 헛헛한 존재들은 가슴에 박힌 송곳으로 책을 읽는다. 선지서가 매력적인 건 거대한 시간 사이에 끼인 개인들을 조명하며 역사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대문자 D(유대 디아스포라)가 소문자 d(일반명사 '난민')으로 바뀐 저간의 사정은 망국과 난민이 국지적인 문제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1차 세계 대전 막바지부터 대규모 현상으로 출현한 난민은 "국민국가의 쇠퇴와 전통적인 법적-정치적 범주의 전반적인 해체 속에서, 어쩌면 오늘날 생각할 수 있는 인민의 유일한 형상"[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인권을 넘어서>(이하 <인권>)]이다. 중요한 것은 난민이 개별적인 사례에서 대규모 현상을 띨 때마다, 여러 조직(난센사무국, 독일난민고등판무관, 정부간 난민위원회 등)은 "절대 문제를 해결할 수도, 적합하게 처리할 수도 없었음이 입증됐다."(<인권>) 흥미로운 사실은 국민국가 안에서 '인권'으로 '난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현 사실은 "인권 개념이 '인간이라는 순수한 사실(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인간)'을 제외한 여타의 모든 성질과 특정한 관계를 상실한 사람들과 처음 대면하자마자 파산"(한나 아렌트)했다는 것이다. 시민권의 상실이 인권의 상실로 이어지는 아이러니.

 

경계를 거니는 이 낯선 존재들: "확실한 비국가성에 대한 대가"(<인권>)

 

 아감벤은 "난민 개념을 인권 개념으로부터 과감하게 해방시켜야 하며...있는 그대로 고려되어야 한다. 즉, 난민은 국민국가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위기에 빠드리는 동시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범주상의 혁신을 위한 터를 닦아주는 한계 개념이나 마찬가지"(<인권>)라고 말한다. 내가 이쯤에서 다시 생각하는 것은 새로운 읽기: 슬픔으로 읽기: 상처로 마주치기의 연쇄과정이다. 여기서 다시, 2003년 송두율 교수 사건(<경계도시2> 참조)을 불러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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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보호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외국인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하기 전에 거주한 국가(이하 "상주국"이라 한다)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무국적자인 외국인을 말한다.>

 

 

 올해 2월에 제정됐고 내년 7월의 시행될 예정인 대한민국 난민법의 일부다. 법에 관심은 있어도 조문 하나 찾아본 적이 없는 문외한이다 보니 이런 사실(난민법 제정)도 새롭고 흥미롭다. 법조문 특유의 만연체는 악명이 높지만 내 눈으로 직접 대하고 나니 느낌이 남다르다. 감격이라기보단 뜨악함인데, 인용한 조문을 읽어주던 후배(법학 전공)도 그렇고 듣고 있던 나도 그렇고 절반쯤 흐르고 나서는 실실 웃었다. 난 그 옆에서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문학과지성사)를 읽고 있었는데 그 상황이 묘하게 어울리는 듯 했다. 카프카 역시 법을 전공했으며 그가 남긴 문학의 표제어 중 가장 큰 꼭지가 바로 '법'이다 보니 말이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는 4년 만의 두번째 독서인데 이번엔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읽었다(제목이 암시한다). 이것이 편지 형식이기 때문인지, 이 역시 딱딱한 만연체로 이루어져 독서의 흐름을 방해하는 통에 수시로 고개를 들곤 했다. 풍성한 사진 자료를 제하면 100쪽도 안되는 이 얇은 책을 연휴인데도 다 읽지 못했다. 내 컨디션 탓도 있겠지만 꽤 고된 독서였다. 예를 들어 편지 끝 부분에서 카프카가 예상한 아버지의 반박:

 

 "너는 내가 우리의 관계에 대해 단순히 너한테만 책임이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면 그건 내가 내 자신의 입장을 편하게 만드는 거라고 주장했지만, 나는 네가 겉으로 보기엔 몹시 힘들게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해도 최소한 너는 네 자신의 입장을 스스로 더 여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네 자신한테 더 득이 되는 결과를 얻고자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선은 너도 네 자신의 어떠한 잘못과 책임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그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할수 있다."

 

 

 

 

 이 정도만 하자. 치면서도 괜히 팔목이 저리다. 그의 글 제목처럼 '법 앞에' 선 기분으로 읽는 낯선 문학체험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라면 내게는 먼저 <헐크>(이안 감독)인데,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를 '아버지의 도래'로 이해하며 봤다면 <헐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앙금처럼 흘러내리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우울한 드라마로 이해하며 봤다(그래서 재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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