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은 제게 각별(저 말고도 그런 분 많으신 것 같지만)합니다. 글로 치자면 그는 제 독서이력에서 최정상을 차지합니다. 학부 시절,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루카치의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추천도서 서가에서 벤야민 선집을 집어 들었을 때 인연에 덜미 잡혔습니다. 그는 자신의 우울기질을 사유와 글쓰기에 적극 투영한 지식인인데 저는 그 점에 반해 그를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잔 손택의 벤야민론 제목은 「토성의 영향 아래서」인데 그 원전이 『독일 비애극의 원천』입니다. 점성술의 풀이에서 우울질은 토성의 기질입니다. 벤야민은 우울이나 멜랑콜리 대신 토성의 탓으로 제 기질 말하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가 17세기 독일 바로크 비애극의 중심에 폭군의 우울과 무능력을 두고 연구를 개진할 때 그것은 벤야민 자신의 우울과 무능력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벤야민 자신이 쓴 벤야민론입니다. 학술 논문임에도 뛰어난 스타일리스트 벤야민 고유의 생리가 글의 면면에 물큰 피어오릅니다.

 

 벤야민을 읽으며 학문에 대한 제 선입견도 갈아엎을 수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에 정 붙이기 시작해 복수전공으로 철학을 선택했지만 철학과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선이 있었습니다. 상징적으로 그 선은 칸트였습니다. 정언 명법으로 대표되는 엄격함. 그건 기계의 사유처럼 차갑게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학문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거기에 연구자 개인의 고유색이 흘러드는 건 당연한 것이죠. 벤야민을 통해 그 사실을 익히고 나니 칸트로 상징되는 철학은 간밤 꿈처럼 멀어졌습니다. 칸트가 벤야민으로 바뀐 건 아니고 벤야민 계통의 학자 영역이 칸트 옆에 똬리를 틀고 저를 받아준 것입니다. 제가 만약 칸트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건 벤야민을 경유해서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런 연유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과 함께 제 독서이력에서 중요한 성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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