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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워 호스 (2disc)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베네딕트 컴버배치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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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국 영화'에 닻내리고 자생한 적자(嫡子)의 출사표(?)"

 워 호스 War Horse 

(Steven Spielber 감독, 2011년 작)



1차 대전을 배경으로 했기에 필연적인 유럽이라는 무대에서 톨스토이의 후기 단편인 ‘홀스토메르-어느 말이 이야기’와 같은 선상의 시선으로 고야의 ‘전쟁의 참화’ 판화집의 구성력을 미국 영화의 전통에 충실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역사라는 큰 그림 안에서 다른 분야의 선구적 고전을 그럴싸하게 묶어봤지만 어찌됐든 이건 ‘미국 영화’라는 전통에 단단히 붙어 있고 그 안에서 대부분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시작해 프랑스와 영국/독일군의 격전지를 오가지만 고전 서부극의 빛과 시각으로 담아낸 공간적 틀은 이 영화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말한다. 짙은 초록의 벌판 위의 풍차나 초반부 기마병의 진격은 유럽을 각인시키기 위한 객관적 틀거리로 우선해 있는 것 같다. 그 말은 곧,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의 배경이 미국인 것만 같다는 생각의 이끌림이 있다는 말이다. 제목이 ‘War Horse’인데 그 사이에 ‘and’를 넣었다면 작품의 색이 더 분명하게 전해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주인공 말과 함께 전쟁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쉰들러 리스트’의 전사(前史)로 돌아감으로써 스필버그는 2차 대전의 스펙터클과 홀로코스트(또는 쇼아)의 이분법적 과잉의 위험을 비껴감으로 (고전주의적 화법의) 휴머니즘을 충실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이로써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이 미국 영화의 적자(嫡子)임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내게 있어 이 영화는 처음으로, 두 번 이상 보고싶은 스필버그의 영화다.



* 이 글은 블루레이 타이틀에 대한 평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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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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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 마텔의 동명의 원작을 영화화 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안 감독의 14번째 작품입니다. 이안 감독의 세계에서 장르 간의 벽은 상당히 낮습니다. 그는 장인적 경지에서 예술적 성취를 해내는 감독으로 정평나 있고, <헐크>를 제외한 모든 작품에서 호응을 끌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작품에선 3D 기술에 힘입어 장인적 솜씨는 최고조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저는 이 작품을 IMAX 3D로 봤습니다. 영화의 태초가 마술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라 한다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영화의 원초적 책임을 완벽하게 실현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틴 스콜세지의 <휴고>가 영화라는 마술의 기원에 바치는 경외라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기원을 현재화시킨 충실한 계승입니다.

 동물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원예사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어릴 때부터 다양한 종교 안에 내재한 신의 풍요로움에 심취했던 남자 피신. 그는 어려워진 가계를 일으키기 위해 캐나다로 이주하기로 한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키우던 동물들과 가족을 태운 일본 회사 소유의 배에 오릅니다. 폭풍을 만난 배는 난파되고 유일한 생존자는 그뿐입니다. 구명보트에는 그 외에도 얼룩말과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벵갈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있습니다. 며칠이 안 돼 피신과 리차드 파커만 남고 모두 죽음을 맞습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오랜 여정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제가 언젠가 <서칭 포 슈가맨>을 말하며 원작 <파이 이야기> 서문에 쓰인 "신을 믿게 될 겁니다."를 인용했었는데, 서문만 읽고 영화를 보고난 지금 보니 그 말은 쉽게 인용하고 말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작품의 끝에 가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 때문입니다. 차분하고 마법적인 이미지의 여운 때문에 피신이 밝히는 또 하나의 진실(의 가능성)의 충격은 크지 않지만 곰곰히 생각해볼 만 합니다. 


 덧-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교보문고에 들렀습니다. 故 김 현 씨가 번역한 <어린왕자>를 몇 장 읽고 나왔습니다. 문득, 이안 감독이 <어린왕자>를 영화도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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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마가리타 테레코바 외 출연 / 마루엔터테인먼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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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했던 것보다 지루하진 않았지만(아마 그건 상대적으로 짧은-1시간 30분 남짓-러닝 타임 때문일 것입니다) 예상 못했던 만큼 무서웠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볼 때도 종종 느꼈던 바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에는 좀 무섭고 섬찟한 구석이 있습니다. 엄마가 외출을 하고 집에 혼자 남은 아들이 갑자기 나타난 중년의 여자(검은 옷을 입고 표정은 무뚝뚝하며 말투는 차갑습니다)가 차를 마시며 아이에게 글을 읽으라고 합니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음산한(한낮이고 조명은 충분한데도) 실내와 쇠를 긁는 듯한 배경음 아래서 화면은 살짝 일그러져 보입니다. 아이는 푸쉬킨의 글을 읽는데, 잠시 후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아이가 나가보니 또 다른 여자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집 안. 검은 옷의 여자는 사라져 있습니다. 타르코프스키가 그려내는 이 무의식적인 공포의 회화들은 제가 그를 이해하기 위해 접근할 수 있는 한 축인 것 같습니다. 다만 넘어서야 할 축이기도 합니다. 
 
 17인치 컴퓨터 모니터로 첫 감상을 한 후 약 2주가 지났는데, 저는 이 작품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어 번 더 보고싶습니다. 그리고 그 '두어 번'이 '또 두어 번'으로 늘어날 수도 있겠죠? 다만 이 후에는 좀 제대로 준비해서 Camera Obscura(어두운 방) 안에서 이 무의식의 영화를 정직하고 차분하게 보고싶습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세계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거울>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난해하고 사적인 작품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감독의 무의식을 깊이 들여다보는 가운데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 '나의 어린시절', '아버지의 어린시절', '지금과 내 유년시절의 어머니'를 굴대로 삼아 모자이크처럼 흩어지고 모이는 영상시 <거울>은 극단적으로 사적이기에 공적인 작품이 됩니다. <봉인된 시간>에 썼듯이 <거울>은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호응과 상찬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타르코프스키의 비석 앞에 꽃 한 송이 아니면(디아스포라 유태인들이 하듯이) 돌멩이 하나 내려놓으며 "<거울>, 잘 받습니다, 고맙습니다."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갔으면 합니다. 그것이 이 어두운 시대에 제가 그려볼 수 있는 희망의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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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칭 포 슈가맨 O.S.T.
로드리게즈 (Rodriguez)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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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본 <엘 시스테마>와 같은 경도에 있지만 위도가 다른 다큐멘터리 필름입니다. 소재가 품고있는 감동과 메시지는 같다고 볼수 있지만 연출과 편집의 역량이 판이하여 한쪽은 시너지 효과를 내는 반면 다른 쪽은...... 평범합니다.


 화면 안에 나오는 사람들이 배우가 아니고 그 어느 창작물보다 극적인 이야기이니 시간을 자르고 붙이며 역사의 결을 미세하게 포착하여 홛개하고 축소하는 역량이 핵인데, 적어도 이 두 작품만 놓고 본다면 <슈가맨>의 그이가 <시스테마>의 누구이보다 우뚝합니다.


 "내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나면 신을 믿게 될거요."-얀 마텔, <파이 이야기>


 <서칭 포 슈가맨>을 보고나면, 신을 믿게 됩니다. 운명은 잔인하지만 그 틈에 스며드는 기적은 자비롭군요. 기적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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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말
벨라 타르 감독, 야노스 데르지 외 출연 / 미디어허브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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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하는 삶의 무게

- 벨라 타르 감독, <토리노의 말>(The Turin Horse, 2011)

 

 

 

 영화 <스모크>(웨인 왕 감독, 1995년 작)의 원작은 폴 오스터의 단편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입니다. 오기 렌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어 현상 한뒤 앨범에 한장씩, 차례대로 보관해 둡니다. 조건은 항상 똑같은데 프레임 안에 들어서는 사람들의 수나 얼굴, 위치는 항상 다릅니다. 마치 담배 연기가 불가측적인 것처럼. 시간이라는 필연 속에서 전혀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 우연의 흐름들을 기록해 두는 기발한 아이디어죠. 그것도 대단하지만 뭣보다 하루도 빠짐없이 사진을 찍어온 오기 렌의 근면은 더욱 대답합니다.  

 

  

 지금 말하려는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은 반복의 무게와 힘을 보여주는 대단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는 일이 점점 버거워집니다. 가볍게 즐길수 있을만큼 제 생활에 여유도 없거니와 영화에게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그것이 순전히 제 의도는 아닙니다.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정성일)이 곧 하나의 세상임을 인정했으니까 그 때부터 단 한 편의 영화도 가볍게 대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영화가 약국에서 사 마시는 드링크제처럼 소비되는 건 흔한 일[常識]이고 저도 자주 그래왔고 지금도 그럴 때 있지만 이제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런 제 말이 영화의 소비를 비판하고 과거에 그 행위에 가담(?)했음을 뉘으치는 건 아닙니다. 소비의 반복 중에 그 밖으로 이탈할 수 있게 해준 만남이 구원의 공식이기 때문이죠.

 

    "일주일 동안 나는 당신의 영화를 네 번이나 보았습니다. 단순히 영화만을 보려고 극장에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진정한 삶을 산다는 것, 진정한 예술가 그리고 인간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 어느 여자 노동자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게 보낸 편지

 

 <토리노의 말>은 니체의 에피소드에서 시작하고, 영화 자체가 니체적입니다. 그런데 니체적인 게 뭔가요? 이 영화를 볼 때, 니체라는 상식은 관객이 걷어내야 할 막일지도 모릅니다.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를 종교에 대한 반테제로 보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건 거울상으로 보는 유사착시이고 영화의 어법을 번역기로 돌려 읽는 식의 비근한 예입니다.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어떤가요?

 

 여기엔 분명 신 없는 세계의 황량함만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니체적입니다. 6일 동안, 살기 위한 최소한의 일과만이 반복되고 종말의 도래를 설파하는 이웃 술꾼(그런데 그는 정말 이웃일까요?)이 왔다가고 새끼 악마들같이 경박하게 무리지어 다니는 집시들이 집 앞 우물을 길러먹고 떠납니다. 우물은 마르고(왜, 갑자기, 누구 때문에), 부녀는 병든 노새를 이끌고 이주를 시도하지만 길에 막혀 이내 돌아옵니다.

 

 이 모든 것이 과연, 니체적입니다. 아니면 앙토냉 아르토나 에밀 시오랑, 또 사무엘 베케트! 베케트의 연극이 대사와 몸짓으로 풀어내는 것을 벨라 타라의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무기력한 변화로 풀어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한 페이소스만으로 니체를 말하는 건 절반 뿐입니다. 그의 사상으로 가자면 마지막 장면이 집약하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오래된 무성 흑백 영화와 같은 느낌으로 담은 점멸하는 가스등 씬, 정물화처럼 앉아있는 부녀와 그 앞에 놓인 감자 두 덩이.

  "먹어야만 해!"

 

  저는 언젠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최소한의 '빛'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정말, 인간에겐 그만큼의 빛이면 충분할까요? 아마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를 보고 나면 그 이야기를 더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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