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한길그레이트북스 118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대석 옮김 / 한길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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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그 웅장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음악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막힘 없이 수긍이 되더군요. 이 책을 다 읽어갈 때쯤 계속 그 음악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슈트라우스의 음악과 함께 시작한 장엄한 오프닝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영화의 원작자인 아서 C. 클라크가 책에서도 “동일자의 영원회귀”를 모티프로 삼은 게 맞는지, 큐브릭의 독창적인 번역인지는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 영화에 한해서 말한다면 큐브릭이 니체에게 보내는 헌사와 같은 영화라는 것이 8~9년 만에 쓰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후기입니다.


 올해 처음 읽은 책이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인데, 볼프가 니체의 글에 창조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동안 읽은 기독 서적이 아무리 열린 태도로 나온다 해도 니체를 읽고 여과하는 방법은 편의에 의한 선택 위주였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웠는데 볼프는 니체의 사유에서 날카로운 문제의식들을 적극 선취하는 동시에 십자가 신학를 선으로 하여 경계를 분명히 할 줄 아는 것 같았고 그러면서도 꾸준히 니체에게 돌아가 묻고 무언가를 받아오는 식으로 <배제와 포용>을 구성했습니다. “이제 그의 책을 읽어보라”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저는 제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짜라투스트라>)에 붙은 유명한 헌사(?) “모두를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에서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러면서도 책은 한 권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부정되는 동시에 앞에 붙은 조건과 함께 재긍정되는 순간이 도래했고, 그때의 (<차라투스트라>를 읽어야 한다는)예감이 제가 이 책을 다시 들게 된 뿌리-힘이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복음서를 심층적으로 읽어 내면서 예수님의 적들이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와 그분을 죽이고자 하는 태도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악한 사람들의 짓이 아니라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짓이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영혼이 ‘자신의 선한 양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분이 선에 대한 자신들의 관념을 거부하신 것을 악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니체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이미 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안적 덕목을 제안하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악의 부재를 실현해야 하기 때문에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다. 마치 독침을 가진 벌레처럼 “그들은 사람을 쏘되”, 완전히 “순전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한다. 배제는 ‘악한 마음’에 의한 죄일 수도 있지만, 또한 ‘선한 양심’에 의한 죄일 수도 있다. “세상의 악당들이 어떤 해를 입힌다 할지라도 선한 사람이 입히는 피해만큼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니체의 경고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ivp, 91~92면)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건 4부였습니다. 노년의 차라투스트라가 그의 은신처인 동굴에서 나와 비명 같기도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같기도 한 큰 소리를 따라 영내를 돌다가 만난 다양한 인간 군상들(그 전에, 그를 시험하겠다며 오랜만에 찾아온 예언자가 있습니다)과 대화를 나누고는 그들 모두에게 자신의 동굴로 가 있으라고 말합니다. 저녁이 돼 동굴로 돌아간 차라투스트라가 낯선 이들의 축제에 마지막 들어간 사람이 되는데 그곳에서 또 많은 대화와 춤, 기괴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계속되는 갈등과 환멸, 그 속에서 고뇌하는 차라투스트라. 하지만 대단원에 이르러 들리는 가장 추악한 인간의 발언. 그 유명한 발언과 함께 그들은 모두 동굴 속에서 잠을 청합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시작된 아침. 차라투스트라는 하룻밤을 함께 한 “더 높은 인간들”이 진정한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변모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자와 같이 변하여 “나의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있다”고 말한 뒤 자신의 동굴을 떠납니다, 책의 오프닝에서 그가 예찬한 태양처럼 씩씩하게. 읽기 전엔 이미 완성된 인간인 차라투스트라의 완결된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는 책이거니 했는데, 읽어보니 투쟁의 기록이었습니다. 이 4부는 수시로 재독하고 싶은 장입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가장 추악한 인간이 말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늘 하루 때문에, 처음으로 나는 나의 전 생애를 살아온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정도로 증언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이 지상에서 산다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보낸 하루, 한 번의 축제가 나에게 대지를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그것이 정녕 삶이었던가?’라고 나는 죽음을 향해 말하리라. ‘좋다! 다시 한 번!’이라고.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그대들도 나처럼 죽음을 향해 말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삶이었던가? 차라투스트라를 위하여, 좋다! 다시 한 번!’이라고.”」 
(두행숙 옮김, 부북스 판, 480~481면)


 니체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어려운 책입니다. 시적으로 활용한 비유가 많기 때문에 이 한권을 한 권 읽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완결된 독서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을 기본 문서로 잡고 니체의 다른 글들, <차라투스트라>와 가장 가까운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같은 철학적 색채가 농후한 저술들을 주석서처럼 참조하며 반복해서 독서하는 것이 니체라는 산을 오르는 정공법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교적 색채의 예언서를 읽는 것도 아니고, 각성한 인식의 피로 한 사람이 쓴 이 책은 “읽을 수 있는” 모든 개인들을 위한 책입니다. 비유하자면 완벽한 심장 같은 책입니다. 심장이 뛰고 있으니 제가 소장한 또 한 권의 니체 저작,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책세상)에 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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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반양장) 부클래식 Boo Classics 20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두행숙 옮김 / 부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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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 첫 독서는 이 책으로! 번역도 무난한 것 같고, 판형이 좋다. 고전은 이래야 제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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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 철학 입문 -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W.K.C.거스리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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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크세노파네스의 제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람을 추종하지는 않았다”(<단편 선집> 중 ‘파르메니데스 편’에서) 

 이 책은 W.K.C. 거스리 교수가 비전공의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안을 토대로 쓴 책입니다. 부제는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인데, 이오니아 학파 또는 밀레토스 학파의 탈레스에서 시작한 고대 희랍 나아가 유럽 철학의 흐름은 크게 두가지로 양분됩니다. “한편으로 전체로서의 우주의 본질과 기원을 다루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삶과 행위를 다”루는 물줄기인데, 밀레토스 학파는 우주의 본질과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과학이기도 했죠. 그리고 소피스테스들과 소크라테스에 와서 “자연의 고찰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철학자들이 그들의 생각을 인간의 삶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거스리 교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간단하게 고대 희랍 철학을 분류한 뒤 독자들이 알아야 할 고갱이를 콕콕 집어줍니다. 아쉬운 것은 번역입니다. 오역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술술 읽어나가기는 어렵습니다. 문장을 구성하는 역자의 능력이 직관적으로 읽히지가 않아서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읽어야 할 문장들이 곳곳 눈에 뜨입니다. 그럼에도 재독 삼독을 해야 할 알찬 책입니다. 한 번 정독했다면 다음부터는 플라톤과 아리스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은 물론이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이하 <단편 선집>)같은 원전을 옆에 두고 행간을 살피며 읽으면 좋은 공부가 될 책입니다.

 저는 한때, <단편 선집>을 정독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읽을 책이 아닌데도 어느 인상적인 표현대로라면 “독서량이라는 근대 이후의 패러다임에 갇혀” 정독하여 완독하겠다는 쓸데없는 목표를 세워놨기 때문이었습니다. <단편 선집>은 사전처럼 읽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랍 철학 입문>을 읽고 사전적인 관심으로 <단편 선집>의 파르메니데스 편을 골라 읽었습니다. 

 헬라클레이토스에 이르러 단순한 이오니아적인 우주 진화론은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하나이다(hen panta einai)’라는 데 동의하는 것이 지혜롭다.”(<단편선집>)라고 했고, “그것이 어떻게 자신과 불화하면서도(diapheromenon) 그 자신과 일치하는지를(homologeei)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활과 뤼라의 경우처럼, 반대로 당기는 조화(palintropos harmonie)이다” (<단편선집>)라고 했습니다. 생명과 사고를 물질적인 원질(물, 불, 흙 등)의 틀 속에 가두어 둔다는 것이 쉽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생명과 사고는 얼마 가지 않아 곧 그 틀을 깨뜨리게끔 되어 있었던 게 분명”(69)했습니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의 과업이었습니다.

 “그는 헬라클레이토스와는 정반대였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있어서는 운동과 변화만이 실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는 운동은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실재(實在) 전체가 하나의 단일하고 부동 ∙ 불변인 실체로 이루어졌습니다.”(70) 파르메니데스는 플라톤의 사고가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습니다. “이 사상가의 힘과 한계는 똑같이 희랍 사상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계를 형성했습니다.”(70) “파르메니데스의 중요성은 그가 희랍인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추상적인 사유의 길을 걸어가게끔 했으며, 지성으로 하여금 외계의 사실과 관계없이 활동하도록 했고, 또한 지성의 활동 결과를 감각적 지각의 활동 결과보다도 격을 높였다는 점입니다.”(73)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을 희생시키고서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을 높인 최초의 철학자”(74)였습니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말하기를 이오니아적 뿌리를 떠나 현실인 물질계를 가볍게 여기기 시작한 고대 희랍 철학의 추상성이라는 조급함을 세계사의 비극이라고 하더군요. 또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쓴 칼 포퍼 같은 경우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파르메니데스를 주제로 중요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지금에 와서도 마르지 않는 분수령인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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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열린책들 세계문학 46
존 르 카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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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안에 이사를 갈 예정입니다. 가족원 각자 개인 짐을 추리고 정리를 해야하는데, 제겐 책이 차지하는 양이 8할 정도 되죠. 이미 읽은 것들 중에 처리(선물, 헌책방 매매, 폐지)할 만한 책들만큼의 빈 공간이 나왔고 이제는 아직 안읽었지만 처리할 가능성이 있는 책들을 골라내야 합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이하 <스파이>)도 그런 이유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에 읽은 르카레의 대표작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일품이었지만 아직 르카레 전작주의자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열린책들에서 지금은 절판한 시리즈인 ‘Mr. Know 세계문학’(여기 포함됐던 작품들은 이제 모두 ‘열린책들 세계문학’으로 넘어가서 고급스러운 판형으로 재탄생했습니다)은 페이퍼백 판형에 내지도 폭신하고 가벼운 누런 용지를 썼기 때문에 휴대하며 읽기 간편해서 좋았습니다. 저는 30권을 모두 소장하고 있었는데, 간간이 처분하고 이제 남은 것은 열 권 남짓입니다. 그 중에는 읽지도 않고 팔아버린 것들도 있습니다. < 스파이>는 순전히 영화 때문이지만 제가 첩보물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여태껏 남아있을 수 있었죠. 그리고 2012년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읽었고, 르카레의 흥미로운 이력과 감성적이면서도 직관적인 문체가 마음에 들어서 그 이후에는 <스파이>의 책등을 보는 제 눈빛이 좀더 노골적이 돼 있었습니다.

 <스파이>는 처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8할 정도 읽을 때까지도 푼돈이나마 챙길 요량으로 내내 확신했지만 결말에 이르고 1989년에 쓴 르카레의 후기까지 읽고는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을 보면서 찾기 원했지만 찾을 수 없었던 그 무엇을 르카레의 이번 소설에서도 여지없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부당거래>를 보고 류승완이 비판의식까지 날카롭게 쏠 줄 아는만큼 자기연마를 했고, 그의 재능이 만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당거래> 이전의 류승완 표 액션(대부분의 작품)과 휴머니즘(<주먹이 운다>) 그리고 코미디(<다찌마와 리>)를 눈여겨 본 적은 없습니다. 그의 영화들이 멋은 있지만 어정쩡하고 제스처만 난무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류승완은 거기까지였습니다. 하지만 <부당거래>를 보고 그 이후의 류승완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들리는 소식에 따르니 그의 차기작은 첩보물이었고, 적어도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아닐 건 알았고 그렇다면 ‘본 시리즈’? 그 형식을 어느정도 차용할 수는 있겠죠. 제 기대는 그보다 <붉은 10월>에 가까웠습니다. 류승완이 그의 장기인 액션의 수를 줄이고 대신, 액션도 깊이 있게, 차라리 영화적 공간이 액션을 하도록 이끌내며 국가 아래의 작은 개인이 놓인 상황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던져줄 거란 면에서 <붉은 10월>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결과물은, ‘본 시리즈’의 형식뿐만 아니라 주제마저 기계적으로 복사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이빨은 빠졌을 지 몰라도 다른 곳에 비해 그 위세가 대단한 한반도 땅(제작 소문 이후의 정보를 찾아보지 않은 저로선 무대가 한국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에서 첩보 ‘작전’이 아니라 개인을 옭아매는 이중 삼중의 구속을 날카롭게 또는 아이러니하게 꼬집어내는 그의 차기작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흐름에서 저는 르카레의 소설을 또 읽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어른스럽다면 <스파이>는 젊습니다. 르카레의 대표 캐릭터 조지 스마일리와 달리 체격이나 행동에 있어 거침없고 단순한 리머스가 주인공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르카레의 목소리로 동일한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스파이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 스파이가 성직자나 성인이나 순교자라도 되는 줄 알아? 스파이는 허영심 많은 바보들의 한심한 행렬이야. 물론 반역자들이기도 하지. 동성애자, 사디스트, 술고래, 타락한 생활에 활기를 주려고 카우보이와 인디언 놀이를 하는 자들이야. 그들이 런던에 수도승처럼 앉아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비교하고 있는 줄 알아? (…) 이건 전쟁이야. 가까운 거리에서 소규모로 치러지는 전쟁이기 때문에 생생하고 불쾌하지. 때로는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희생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 그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다른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지난번 전쟁이나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비하면. (…) 하지만 그게 세상이야. 인류는 미쳤어. 우리는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어디나 다 마찬가지야. 속은 사람, 잘못 인도된 사람, 헛되이 보낸 평생, 총살당한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아무 이유도 없이 통째로 말살당한 집단과 계층.”(24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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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물 교양의 탄생 - 명작이라는 식민의 유령
박숙자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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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비유적으로역사의 물길에 들어서 젖어 산다샛강이나 시냇물계곡 또는 급류일지언정 사람은 시간의 물기를 말릴 수도 털어낼 수도 없다역사를 다룬 모든 책은 몸에 묻은 물로 그린 그림이다박숙자의 『속물 교양의 탄생』은 조선 근대사의 정신을 수립한 교양의 진실을 묻는다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많은 분량의 사실 문건들을 뒤지고 대조하며 해석의 칸을 채워간다조선 근대라 뭉뚱그려 부르곤 하는 우리네 과거의 정신 풍경은 명작’ 또는 물질로써 책(정확하게는 명작 전집)을 통해 어떻게 우리 안으로 기입됐고 유통됐는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과거의 정신 풍경이라고 했지만 고정된 시간의 풍경이 아니다과거로부터의 정신 풍경이 정확하며 이 책은 역사의 기억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이것은 역사의 풍경인 동시에 현재의 자화상이다.


교양은 일상 언어 장에서 개인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 또는 지식의 양을 재는 단위일 뿐인가이미 동의하는 바지만 교양은 그렇게 쪼잔하지 않다교양은 정신적이고 신체적이고 감성적인 것의 총체로서 시민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다누군가를 일러 교양이 있네 없네 할 때의 말은 판단하는 수준으로 쓰는 것이긴 하지만 사회를 이루고 사는 개인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성숙의 척도로 교양을 호명해 왔다는 것 자체엔 일말의 진실이 있다그것은 교양이 지성과 감성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회와 커뮤니티를 품어낼 수 있는 능력이라는 진실이다하지만 교양의 가치와 자리에 대해 최소한 동의했지만 복원되어야 할 지점들이 많다. “교양이란교양의 척도란사회가 개인을 시민으로 키어낼 프로그램에 관한 문제이다. ‘학력과 자본에 비례해서 소장되거나 과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같이 거주하는 이들의 감응하는 능력이라는데아직 갈 길이 멀다.


책은 매체이고 전통적으로 교양의 전유물이었다모든 책이 교양을 실어 나르는 데 유용한 것은 아니다흔히 일러 명작’, ‘걸작’, ‘고전은 시간과 공간을 벗하여 장수하고 쉬이 부서지지 않는 몸체를 갖춘 우람하고 듬직한 작품들이 교양의 퍼스트 클래스에 앉을 수 있었다그렇다면 명작은 좋은 책이어야 한다.아니, ‘좋은 책이 명작이다그런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세계문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유명한 책이라는 세속적 가치로 변용되었다. ‘명작이 제대로 된 길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음이라는 서구적 윤리학의 가치를 안고 있던 책들이 이라는 동양적 도덕의 가치에 호응하지 않고 매개돼 건너왔다그 사이에 명작은 가공됐고 오해됐다그 결과로 식민지 조선에 도착한 명작은 기호로 남게 된다.


기호라는 껍질로만 남은 명작은 장소를 만들어내지 못했다생활이 살갑게 굴 수 있는 것이 장소라면 전시적 가치와 모방적 값만 갖춘 명작은 백화점을 만들었을 뿐이다백화점에선 전시물을 함부로 만져선 안 된다.” 만질 수 없는 눈의 선망의식은 욕망을 부채질하고 매개체로만 들어온 명작은 경쟁에서 승리하고 부를 걸머지기 위한 매개체로써만 쓰인다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서재다. “지금도 그러하지만서재는 개인의 교양 정도를 대번에 드러낼 수 있는 가시적 공간이다.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뿐만 아니라어떻게 꽂혀 있고책상과 책장 등 서재 가구의 종류와 수준까지 개인의 수준과 취향을 드러내는 척도가 된다.” 서재는 죽은 책들에 기생한 욕망들의 밀실이었다하지만 적어도 이 땅의 역사에서 서재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근대 초기만 하더라도 서재는 학교를 이르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서재와 서당이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었다일제강점기공립학교와 사립학교가 충분하지 않아 각 마을에서는 재래의 서재를 이용해서 강습소로 바꾼다는 기사가 자주 등장했다고 한다. “서재는 말 그대로 책을 갖추어두고 읽거나 쓰는 공간이지만근대에 이르러 책을 소장하는 개인적 공간으로 변모했서재는 공공성을 (잃어)버렸고 교양도 공공의 가치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교양이자 교양을 담는 그릇인 책은 철저히 상품이 됐다공적 장소였던 서재가 사적 공간으로 변용된 것과 같이 개인이 탄생했다그런데 단자화된 개인들은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존재 이전에 소비자였다책은 읽어야 할 것이 아니라 소유해야 할 것이 됐다자본의 세계에서 잠시나마 식민지 조선의 비극도 희석된다. “’전 조선 독자에 한하여 반가로서 제공키로 결정하였다라는 결정이 일본 거대 출판사의 독자 서비스로 제시되면서 조선인들이 독자로서 특별하게 취급받는다고 제공된환상은 일본제국주의의 대의보다 앞선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정언은 청소년을 위한 추천도서 목록을 만들고문학전집에 농축된 서구 중심의 명작 계보가 도서목록을 조각한다. “우리는 당연하게 <일리아드> <신곡>을 시작하는 세계문학을 상상하는데과연 이러한 기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세계문학이 곧 서구 문학으로 동일시된 이 기억과 구성그리고 목록은 언제부터 고정된 것일까이런 의문 속에서 흥미로운 것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대중이 한결같이 세계문학전집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으로 기억한다는 사실이다그만큼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은 세계문학전집’ 우리는 당연하게 <일리아드> <신곡>을 시작하는 세계문학을 상상하는데과연 이러한 기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세계문학이 곧 서구 문학으로 동일시된 이 기억과 구성그리고 목록은 언제부터 고정된 것일까이런 의문 속에서 흥미로운 것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대중이 한결같이 세계문학전집을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으로 기억한다는 사실이다그만큼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은 세계문학전집의 대명사처럼 통용되었다말 그대로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민족적인 공유 기억의 대명사처럼 통용되었다말 그대로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민족적인 공유 기억이 됐다.


다시자본은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국가도 활용한다일본이 대중잡지를 통해 반미 내셔널리즘을 고취시키는 것이 그렇고조선의 민중에게는 생존의 논리로 다가가 민족의식에 불을 당겼다. “가난한 백성은 우선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그러므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논리를 민족적 생존으로 이야기한다이는 개인의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살아남아야 한다는 논리를 민족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도 적용하면서 속물적 인간형을 양산해냈다.” 비극적 인식을 카테고리 한 뒤 메커니즘을 조립하고 가동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기계는 지금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돌고 있다기계에 집중하는 응집력의 악순환은 국가의 무의식과 언어가 됐다그 앞에서 질문은어떻게 플러그를 뽑을 것인가?” ‘속물’ 교양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근대성의 풍경에서 어쩌면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한다.


질문은 한 사람이 시작하지만 그것이 멀어질수록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돼 버린다면 하릴없이 세다가 잊고 말 하늘의 별만큼도 안 된다두 개세 개의 소실점으로 분화되고 그만큼 폭과 깊이를 확장해 갈 때 질문은 타인에게 인지되고 의미 있게 존재한다질문은 다음 질문을 불러온다질문하는 타자들의 공동체는 질문과 질문 사이의 답들이 기하학적 수순으로 발전하는 입체들이 조형한 다층 공간 안에서 숨쉬고 있다. “책 자체가 아니라 독서하는 커뮤니티를 매개하는 것그것이 명작의 힘이 아닐까 싶다이미 우리 역사 안에서 그러한 가능성이 있었으며그렇게 책을 읽었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조명하고자 했다. ‘좋은 책으로 가는 역사그 역사가 이미 우리 안에 있었다고 하는데질문들의 사이 장소는 이미-커뮤니티의 기억을 복원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박숙자 씨가 이 책 이후우리 역사 안에 이미 있었던 좋은 책의 역사를 연구하여 또 한 권의 책을 써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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