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열린책들 세계문학 46
존 르 카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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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안에 이사를 갈 예정입니다. 가족원 각자 개인 짐을 추리고 정리를 해야하는데, 제겐 책이 차지하는 양이 8할 정도 되죠. 이미 읽은 것들 중에 처리(선물, 헌책방 매매, 폐지)할 만한 책들만큼의 빈 공간이 나왔고 이제는 아직 안읽었지만 처리할 가능성이 있는 책들을 골라내야 합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이하 <스파이>)도 그런 이유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에 읽은 르카레의 대표작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일품이었지만 아직 르카레 전작주의자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열린책들에서 지금은 절판한 시리즈인 ‘Mr. Know 세계문학’(여기 포함됐던 작품들은 이제 모두 ‘열린책들 세계문학’으로 넘어가서 고급스러운 판형으로 재탄생했습니다)은 페이퍼백 판형에 내지도 폭신하고 가벼운 누런 용지를 썼기 때문에 휴대하며 읽기 간편해서 좋았습니다. 저는 30권을 모두 소장하고 있었는데, 간간이 처분하고 이제 남은 것은 열 권 남짓입니다. 그 중에는 읽지도 않고 팔아버린 것들도 있습니다. < 스파이>는 순전히 영화 때문이지만 제가 첩보물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여태껏 남아있을 수 있었죠. 그리고 2012년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읽었고, 르카레의 흥미로운 이력과 감성적이면서도 직관적인 문체가 마음에 들어서 그 이후에는 <스파이>의 책등을 보는 제 눈빛이 좀더 노골적이 돼 있었습니다.

 <스파이>는 처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8할 정도 읽을 때까지도 푼돈이나마 챙길 요량으로 내내 확신했지만 결말에 이르고 1989년에 쓴 르카레의 후기까지 읽고는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을 보면서 찾기 원했지만 찾을 수 없었던 그 무엇을 르카레의 이번 소설에서도 여지없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부당거래>를 보고 류승완이 비판의식까지 날카롭게 쏠 줄 아는만큼 자기연마를 했고, 그의 재능이 만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당거래> 이전의 류승완 표 액션(대부분의 작품)과 휴머니즘(<주먹이 운다>) 그리고 코미디(<다찌마와 리>)를 눈여겨 본 적은 없습니다. 그의 영화들이 멋은 있지만 어정쩡하고 제스처만 난무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류승완은 거기까지였습니다. 하지만 <부당거래>를 보고 그 이후의 류승완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들리는 소식에 따르니 그의 차기작은 첩보물이었고, 적어도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아닐 건 알았고 그렇다면 ‘본 시리즈’? 그 형식을 어느정도 차용할 수는 있겠죠. 제 기대는 그보다 <붉은 10월>에 가까웠습니다. 류승완이 그의 장기인 액션의 수를 줄이고 대신, 액션도 깊이 있게, 차라리 영화적 공간이 액션을 하도록 이끌내며 국가 아래의 작은 개인이 놓인 상황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던져줄 거란 면에서 <붉은 10월>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결과물은, ‘본 시리즈’의 형식뿐만 아니라 주제마저 기계적으로 복사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이빨은 빠졌을 지 몰라도 다른 곳에 비해 그 위세가 대단한 한반도 땅(제작 소문 이후의 정보를 찾아보지 않은 저로선 무대가 한국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에서 첩보 ‘작전’이 아니라 개인을 옭아매는 이중 삼중의 구속을 날카롭게 또는 아이러니하게 꼬집어내는 그의 차기작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흐름에서 저는 르카레의 소설을 또 읽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어른스럽다면 <스파이>는 젊습니다. 르카레의 대표 캐릭터 조지 스마일리와 달리 체격이나 행동에 있어 거침없고 단순한 리머스가 주인공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르카레의 목소리로 동일한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스파이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 스파이가 성직자나 성인이나 순교자라도 되는 줄 알아? 스파이는 허영심 많은 바보들의 한심한 행렬이야. 물론 반역자들이기도 하지. 동성애자, 사디스트, 술고래, 타락한 생활에 활기를 주려고 카우보이와 인디언 놀이를 하는 자들이야. 그들이 런던에 수도승처럼 앉아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비교하고 있는 줄 알아? (…) 이건 전쟁이야. 가까운 거리에서 소규모로 치러지는 전쟁이기 때문에 생생하고 불쾌하지. 때로는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희생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 그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다른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지난번 전쟁이나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비하면. (…) 하지만 그게 세상이야. 인류는 미쳤어. 우리는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어디나 다 마찬가지야. 속은 사람, 잘못 인도된 사람, 헛되이 보낸 평생, 총살당한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아무 이유도 없이 통째로 말살당한 집단과 계층.”(24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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