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한길그레이트북스 118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대석 옮김 / 한길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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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그 웅장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음악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막힘 없이 수긍이 되더군요. 이 책을 다 읽어갈 때쯤 계속 그 음악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슈트라우스의 음악과 함께 시작한 장엄한 오프닝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영화의 원작자인 아서 C. 클라크가 책에서도 “동일자의 영원회귀”를 모티프로 삼은 게 맞는지, 큐브릭의 독창적인 번역인지는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 영화에 한해서 말한다면 큐브릭이 니체에게 보내는 헌사와 같은 영화라는 것이 8~9년 만에 쓰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후기입니다.


 올해 처음 읽은 책이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인데, 볼프가 니체의 글에 창조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동안 읽은 기독 서적이 아무리 열린 태도로 나온다 해도 니체를 읽고 여과하는 방법은 편의에 의한 선택 위주였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웠는데 볼프는 니체의 사유에서 날카로운 문제의식들을 적극 선취하는 동시에 십자가 신학를 선으로 하여 경계를 분명히 할 줄 아는 것 같았고 그러면서도 꾸준히 니체에게 돌아가 묻고 무언가를 받아오는 식으로 <배제와 포용>을 구성했습니다. “이제 그의 책을 읽어보라”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저는 제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짜라투스트라>)에 붙은 유명한 헌사(?) “모두를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에서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러면서도 책은 한 권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부정되는 동시에 앞에 붙은 조건과 함께 재긍정되는 순간이 도래했고, 그때의 (<차라투스트라>를 읽어야 한다는)예감이 제가 이 책을 다시 들게 된 뿌리-힘이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복음서를 심층적으로 읽어 내면서 예수님의 적들이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와 그분을 죽이고자 하는 태도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악한 사람들의 짓이 아니라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짓이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영혼이 ‘자신의 선한 양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분이 선에 대한 자신들의 관념을 거부하신 것을 악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니체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이미 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안적 덕목을 제안하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악의 부재를 실현해야 하기 때문에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다. 마치 독침을 가진 벌레처럼 “그들은 사람을 쏘되”, 완전히 “순전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한다. 배제는 ‘악한 마음’에 의한 죄일 수도 있지만, 또한 ‘선한 양심’에 의한 죄일 수도 있다. “세상의 악당들이 어떤 해를 입힌다 할지라도 선한 사람이 입히는 피해만큼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니체의 경고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ivp, 91~92면)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건 4부였습니다. 노년의 차라투스트라가 그의 은신처인 동굴에서 나와 비명 같기도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같기도 한 큰 소리를 따라 영내를 돌다가 만난 다양한 인간 군상들(그 전에, 그를 시험하겠다며 오랜만에 찾아온 예언자가 있습니다)과 대화를 나누고는 그들 모두에게 자신의 동굴로 가 있으라고 말합니다. 저녁이 돼 동굴로 돌아간 차라투스트라가 낯선 이들의 축제에 마지막 들어간 사람이 되는데 그곳에서 또 많은 대화와 춤, 기괴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계속되는 갈등과 환멸, 그 속에서 고뇌하는 차라투스트라. 하지만 대단원에 이르러 들리는 가장 추악한 인간의 발언. 그 유명한 발언과 함께 그들은 모두 동굴 속에서 잠을 청합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시작된 아침. 차라투스트라는 하룻밤을 함께 한 “더 높은 인간들”이 진정한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변모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자와 같이 변하여 “나의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있다”고 말한 뒤 자신의 동굴을 떠납니다, 책의 오프닝에서 그가 예찬한 태양처럼 씩씩하게. 읽기 전엔 이미 완성된 인간인 차라투스트라의 완결된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는 책이거니 했는데, 읽어보니 투쟁의 기록이었습니다. 이 4부는 수시로 재독하고 싶은 장입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가장 추악한 인간이 말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늘 하루 때문에, 처음으로 나는 나의 전 생애를 살아온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정도로 증언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이 지상에서 산다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보낸 하루, 한 번의 축제가 나에게 대지를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그것이 정녕 삶이었던가?’라고 나는 죽음을 향해 말하리라. ‘좋다! 다시 한 번!’이라고.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그대들도 나처럼 죽음을 향해 말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삶이었던가? 차라투스트라를 위하여, 좋다! 다시 한 번!’이라고.”」 
(두행숙 옮김, 부북스 판, 480~481면)


 니체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어려운 책입니다. 시적으로 활용한 비유가 많기 때문에 이 한권을 한 권 읽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완결된 독서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을 기본 문서로 잡고 니체의 다른 글들, <차라투스트라>와 가장 가까운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같은 철학적 색채가 농후한 저술들을 주석서처럼 참조하며 반복해서 독서하는 것이 니체라는 산을 오르는 정공법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교적 색채의 예언서를 읽는 것도 아니고, 각성한 인식의 피로 한 사람이 쓴 이 책은 “읽을 수 있는” 모든 개인들을 위한 책입니다. 비유하자면 완벽한 심장 같은 책입니다. 심장이 뛰고 있으니 제가 소장한 또 한 권의 니체 저작,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책세상)에 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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