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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 철학 입문 -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W.K.C.거스리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0년 4월
평점 :
“그러나 그가 크세노파네스의 제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람을 추종하지는 않았다”(<단편 선집> 중 ‘파르메니데스 편’에서)
이 책은 W.K.C. 거스리 교수가 비전공의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안을 토대로 쓴 책입니다. 부제는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인데, 이오니아 학파 또는 밀레토스 학파의 탈레스에서 시작한 고대 희랍 나아가 유럽 철학의 흐름은 크게 두가지로 양분됩니다. “한편으로 전체로서의 우주의 본질과 기원을 다루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삶과 행위를 다”루는 물줄기인데, 밀레토스 학파는 우주의 본질과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과학이기도 했죠. 그리고 소피스테스들과 소크라테스에 와서 “자연의 고찰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철학자들이 그들의 생각을 인간의 삶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거스리 교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간단하게 고대 희랍 철학을 분류한 뒤 독자들이 알아야 할 고갱이를 콕콕 집어줍니다. 아쉬운 것은 번역입니다. 오역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술술 읽어나가기는 어렵습니다. 문장을 구성하는 역자의 능력이 직관적으로 읽히지가 않아서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읽어야 할 문장들이 곳곳 눈에 뜨입니다. 그럼에도 재독 삼독을 해야 할 알찬 책입니다. 한 번 정독했다면 다음부터는 플라톤과 아리스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은 물론이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이하 <단편 선집>)같은 원전을 옆에 두고 행간을 살피며 읽으면 좋은 공부가 될 책입니다.
저는 한때, <단편 선집>을 정독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읽을 책이 아닌데도 어느 인상적인 표현대로라면 “독서량이라는 근대 이후의 패러다임에 갇혀” 정독하여 완독하겠다는 쓸데없는 목표를 세워놨기 때문이었습니다. <단편 선집>은 사전처럼 읽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랍 철학 입문>을 읽고 사전적인 관심으로 <단편 선집>의 파르메니데스 편을 골라 읽었습니다.
헬라클레이토스에 이르러 단순한 이오니아적인 우주 진화론은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하나이다(hen panta einai)’라는 데 동의하는 것이 지혜롭다.”(<단편선집>)라고 했고, “그것이 어떻게 자신과 불화하면서도(diapheromenon) 그 자신과 일치하는지를(homologeei)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활과 뤼라의 경우처럼, 반대로 당기는 조화(palintropos harmonie)이다” (<단편선집>)라고 했습니다. 생명과 사고를 물질적인 원질(물, 불, 흙 등)의 틀 속에 가두어 둔다는 것이 쉽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생명과 사고는 얼마 가지 않아 곧 그 틀을 깨뜨리게끔 되어 있었던 게 분명”(69)했습니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의 과업이었습니다.
“그는 헬라클레이토스와는 정반대였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있어서는 운동과 변화만이 실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는 운동은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실재(實在) 전체가 하나의 단일하고 부동 ∙ 불변인 실체로 이루어졌습니다.”(70) 파르메니데스는 플라톤의 사고가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습니다. “이 사상가의 힘과 한계는 똑같이 희랍 사상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계를 형성했습니다.”(70) “파르메니데스의 중요성은 그가 희랍인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추상적인 사유의 길을 걸어가게끔 했으며, 지성으로 하여금 외계의 사실과 관계없이 활동하도록 했고, 또한 지성의 활동 결과를 감각적 지각의 활동 결과보다도 격을 높였다는 점입니다.”(73)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을 희생시키고서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을 높인 최초의 철학자”(74)였습니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말하기를 이오니아적 뿌리를 떠나 현실인 물질계를 가볍게 여기기 시작한 고대 희랍 철학의 추상성이라는 조급함을 세계사의 비극이라고 하더군요. 또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쓴 칼 포퍼 같은 경우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파르메니데스를 주제로 중요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지금에 와서도 마르지 않는 분수령인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