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파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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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6. 28

 

꼬말라에 왔다.

작품은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나는 책 뒷편에 실린 각주를 찾아 꼬말라가 '타는듯이 뜨거운'이라는 뜻을 가진 멕시코 남부 지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듯 각주를 찾아 앞뒤로 넘기며 작품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얼마 읽지 못하고 나는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한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다. 익숙치 않은 긴 이름들이 머릿속에 얼른 자리를 잡지 못해서 더욱 그랬다.



다 읽고 나서야 읽는 중의 그런 혼란은 당연했으며 의도된 혼란이라는 걸 알았다. 시간과 공간이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후안 프레시아도가 아버지를 찾아서 '무지막지한 열기에 마치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 정지된 것 같'은 꼬말라에 들어선다. 꼬말라에서 프레시아도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유령이다. 죽음의 마을이다. 프레시아도가 듣고 보는 것은 현실이자 환상이다.



프레시아도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선 내 말이 더 잘 들릴 거다. 얘야, 이 어미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게다. 나중에 내가 세상을 떠나면, 그때는 너도 알게 되겠지. 죽은 어미의 말보다 어미가 간직하고 있는 추억의 소리가 훨씬 더 잘 들린다는 것을."

프레시아도는 추억의 소리를 좇아 '마치 바람이 열어놓은 듯한 허공을 두드'린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유령들이고 그가 듣는 말들은 모두 유령의 말들이다.



프레시아도의 발언으로 작품이 시작되지만 아무런 장치도 없이 바로 뻬드로 빠라모의 관점에서 서술되는가 하면 또 다른 이의 서술이 이어지기도 한다. 시간이 뒤죽박죽되어 나타나는 혼란스러움을 어떻게든 가닥지어보려는 노력을 포기할 때쯤 그런 노력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냥 중구난방으로 맥락없이 지껄이는 것 같은 유령들의 말들과 환상들을 보면서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악독하고 뻔뻔스러운 빼드로 빠라모가 그토록 원했던 수사나에 대한 사랑, 그러나 환상속의 사랑만을 집착해서 현실 속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사나. 근친상간으로 비난속에 괴로워하며 살아간 도니스 남매, 가질 수 없는 자식에 집착하면서 회한 속에 살았던 도로떼아...



해설을 보면 멕시코의 혁명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있다. 뻬뜨로 빠라모는 그 지역 모든 땅을 가진, 독단적 전횡을 일삼는 토호였다. 땅을 빼앗긴 주민들은 결국 혁명이 아니면 죽음 뿐인 상황에서 혁명군에 가담하게 된다.

"우리가 무기를 든 것은 썩은 정부나 당신 같은 인간들의 횡포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기 때문이오. 정부나 당신네들은 우리를 등쳐먹고 사는 사기꾼이자 피를 빠는 기생충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혁명군에 가담 했다가 땅을 주겠다는 정부군의 말을 믿고 무기를 버린 농민들이 결국은 황무지 앞에서 절망한다. 빼드로 빠라모는 "나는 팔짱을 낀 채 굶어서 죽어가는 꼬말라를 지켜 보리라."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시적인 문장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문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왔다. 시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가 커서 번역본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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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6.25 

이상향이라는 관점에서 최인석의 [새, 떨어지다]와 [내 영혼의 눈물]을 살펴보았다.



이상향 (백과사전)

: 원래 토마스 모어가 그리스어의 '없는(ou-)', '장소(toppos)'라는 두 말을 결합하여 만든 용어인데, 동시에 이 말은 '좋은(eu-)', '장소'라는 뜻을 연상하게 하는 이중기능을 지니고 있다. 서유럽 사상에서 유토피아의 역사는 보통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이상국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나 정확히는 모어의 저서 《유토피아》(1516)를 시초로 하여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1623), 베이컨의 《뉴아틀란티스》(1627) 등 근세 초기, 즉 16∼17세기에 유토피아 사상이 연이어 출현한 시기를 그 탄생의 시점(時點)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모어가 말한 [이상향]은 르네상스를 거친 후에 나타난 사조를 일컫는다. 르네상스 시대의 마키아 벨리 등은 자신들의 세계에 하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르네상스) 위대한 문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밀려난 자들도 있다. 바로 밀려난 자들이 꿈꾸는 세계를 이상향이라고 본다. 이들은 봉건제도에서 복고적 유토피아를 꿈꾼다. 또 다른 부류는 시민사회를 향한 유토피아를 꿈꾼다. 아뭏든 현실에서 패배한 자들, 소위 지배 이데올로기로 부터 축출된 사람들이 꿈꾸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최인석은 패배한 자들의 이상향 꿈꾸기를 끊임없이 추구한 작가다. 이 두 작품도 현실 공간에 일상을 끌어들이고 설화와 환상을 가미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는 사건의 정황과 인물의 움직임만을 보여준다. 실재와 환상의 구분이 어렵다. 그의 작품들은 나무와 대화하는 인물(모든 나무는 얘기를 한다)이 나오는가 하면 개(내 영혼의 우물)나 새(새, 떨어지다)와 대화하는 인물도 있다. 아주 개처럼 짖어대며 말을 대신하기도 한다. 주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할까. 실재가 아닌듯 하면서도 꿈틀대는 현장감이 있다. 그리고 인간의 마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작품들은 거의 닫힌 공간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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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6. 19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를 읽었다.

그녀의 소설들은 전에도 몇편인가 읽은 적이 있음에도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있는데도 나는 별 느낌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별 생각을 갖지도 않았다. 흔히들 말하듯이 '너무 가볍다'라는 생각으로 그냥 넘겼던 것 같다.



이 작품집도 처음에 읽을 때는, 역시 가볍군, 하면서 읽었다. 어떤 작품은 소소한 일상을 담담하게 말하는 수필같았다. 과연 그럴까.



'아빠의 맛'을 보자.

나와 깊은 관계에 있는 직장 동료가 역시 한 직장동료인 다른 여성을 임신시켰다. 나는 그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사직서를 낸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나는 별거중인 아빠의 시골집으로 간다. 아빠는 애인과의 관계가 엄마에게 들통나서 별거 중이다. 아빠는 이미 애인과는 정리가 된 상태이지만 다시 엄마와 함께 지내지는 않는다. 나는 바쁜 일상 속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급급하게 보내던 때,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의 시골집에서 나와 내 가족은 무언가를 조금씩 잃어버렸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확신한다. '가정이란 남자와 여자가 죽어라 역할 분담을 해야 겨우 돌아가는 것임을'.

엄마가 관리하는 집은 깨끗하게 정돈되어있고 편안하다. 아빠의 집은 냄새나는 양말과 똥이 살짝 묻은 팬티가 빚어내는 불쾌함이 있지만 그것은 '살아 돌아가는 힘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아침 식사로 오믈렛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깨닫는다. 이미 애인을 정리했음에도 아빠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거기엔(엄마의 집) 긍정적이고 올바르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갈등이 불러일으킨 고통을 어떻게 해소하는가를 보면 '진지한, 무거운' 소설이 보여주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학작품이란 모름지기 진지해야하고, 심오해야하고 그래서 무겁고, 우울하고, 아프다는 인식을 우리들은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바나나의 소설들을 가볍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바나나는 밝고 가볍고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가운데서 우리가 갖고 있는 그런 고정관념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긍정적이고 올바르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선이라는 교육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그것은 절대적인것 같았다. 우리는 올바르고 높은 목표를 두고 도덕적인 기준에 의해 '그러면 안돼'라는 브레이크를 걸며 늘 바르게 살고자 한다. 그런 이념에 철저하게 갇혀산다고 볼 수 있다.



문학작품만이 아니라 영화를 보더라도 일본 영화와 한국영화는 다르다. 일본 영화는 가볍다. 그걸 기준으로 본다면 한국영화는 '오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갈등에 반응하는 모습들은 카오스적이다.



시대가 달라졌다. 촛불시위현장만 봐도 그렇다. 예전에 시위는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했으나 촛불시위현장은 오히려 유머와 해학이 있다. 최루탄에는 화염병으로 대응하던 시대가 아닌 것이다. 물대포를 쏘면 '온수'를 달라 외치고, 경찰이 마이크를 잡으면, '노래해'를 외친다. 이젠 '고뇌하는 포즈'는 우스운 시대다. 인간을 바라보고 관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이 달라졌다.



가벼운 소설은 가볍다고 쉽게 여기지 말자,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그녀의 소설을 보면서.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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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6. 19 

 

이준희의 '여자의 계단'과 박정규의 '타블로 비방 혹은 비너스의 내부-작품번호1'을 읽었다.

두 작품 다 사라진 사람을 추적하고 탐색하는 구성을 보인다.



탐색담은 노드롭 프라이가 규정한대로 로망스에서 보이는 탐색의 과정에서 보이는 모험의 이야기다. 탐색담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1. agon: 괴물에게 납치당한 사람을 찾아나서는 여행을 위해 준비하는 단계

2. pathos: 납치한 괴물을 만나 목숨을 걸고 필사의 사투를 벌이는 단계

3. anagnoisis: 괴물을 해치우고 사람을 구해서 운명의 역전이 일어난다.



로망스의 패턴에서는 실종이 타의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현대에서는 대부분 자의에 의한 실종에 무게를 두는 편이다.



'타블로 비방...'은 아내가 없는 동안 아내의 소설을 읽으며 아내를 추적한다.

'여자의 계단'은 동료인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그녀를 찾아나선다.



'타블로 비방...'은 내가 아내의 과거와 현재의 부정을 의심한다. 작품속 등장 인물은 아내가 쓴 소설속 인물과 겹치는 구조를 갖는다.



소설속 인물 : 나(해직기자)-아내(소설가)-옆집 사내

아내의 소설속 인물 : 나(아내)-그(운동권 선배)- 옆집 사내



탐색이 끝난 후 보이는 역전은 나의 오해가 풀리는 것. 옆집 남자가 아내의 소설속 옆집 남자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점으로 오해가 풀린다. 작품에는 음악과 그림이 등장하고 어려운 인문학적인 지식까지 동원된다. 그런 것들이 읽는데 가끔 걸림돌이 되었다. 그는 아내의 부정에 대한 의혹은 풀었을 지 모르지만 아내의 내면을 읽는 것은 실패했다고 본다.



'여자의 계단'은 카프카의 [성]과 유사한 구조다.

나는 그녀가 그린 그림과 그녀가 했던 말을 근거로 그녀를 찾아나선다.

다수의 회사동료들은 그녀를 소외시켰다. 그녀는 그들과 소통하지 못했고 대신 그녀는 아무도 몰래 망원경으로 동료들을 바라본다. 그녀가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은 망원경 렌즈를 사용했을 때이다. 그 가까움은 소리를 잃은 채다. 그녀는 말로써 동료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듯 보였지만 결국 그 말때문에 다시 멀어진다.

내가 그녀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그녀의 고독이 아프게 느껴진다. 내가 탐색한 것은 그녀의 내면이다.



이 두 작품의 탐색담은 비교가 된다.

'타블로 비방...'은 마치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동안 택한 도로와 도로를 지나면서 본 풍경을 이야기한다면

'여자의 계단'은 서울에서 부산에 가는 동안 부산이 어떤 곳인가 알게한다.

나는 물론 가는 동안의 화려한 풍경보다, 갈 곳에 대한 탐색이 이루어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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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6. 18 

 김연수의 단편 '기억할 만한 지나침'.

<여름, 바다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늙어가고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을 읽는데 프랑스와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 떠올랐다. 열 여덟 소녀가 주인공이라서, 여름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무엇보다도 문장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해서 그랬을 것이다.



사강의 그 작품을 나는 스무살때 읽었다. 그냥 읽은 것으로는 양이 차지 않아서 읽고 또 읽었다. 그만큼 나를 사로잡았던 작품이었다. 내가 스무살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김연수의 이 작품을 읽으면서 슬픔이여 안녕을 떠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감흥은 솟지 않았다. 오히려 반감 같은 것이 슬며시 올라왔다.



왜일까?

스무살이었던 그 때로부터 벌써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간 탓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치 슬픔이여 안녕에서 느꼈던 감흥을 느끼지 못한 것이 김연수의 탓이라도 되는양 작품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그것은 즐거움의 근원을 찾는 작업과는 반대방향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거는 딴지는 어쩌면 작품 탓이기보다는 내 탓이라는 말을 먼저 하면서 글을 쓴다.



제목이 먼저 걸렸다. 나중에야 이 제목이 바로 기형도의 시 제목을 차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듯 싶으면서도 따져 생각하면 오리무중일 것 같은 이 제목을 작가가 썼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작품에서 중요한 무게를 갖고 나오는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기형도의 시 구절을 마치 이 작품을 읽을 열쇠인양 탐색하며 읽었다.



그녀는 휴가중에 소설을 읽는다. 그 소설 속에서 에로티시즘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가는 중년 여인을 보며 그녀는 언젠가 읽었던 시 구절을 떠올린다. 시 속의 화자가 울고 있던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아픈 동일시를 말하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을 그 사내, 그리고 중년 여인과 동일시하는 것일까? 두려움이 매혹시키는 이유를 몰라 고통받는 중년 여인을 그녀가 동일시한다는 설정을 해보았다.



그녀는 죽는다. 물론 작품에서 죽지는 않지만 그녀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들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그녀가 락가수(네 대신 죽음을 보았다는 말을 두번이나 하는)와 섹스를(분명치는 않지만 그렇게 읽힌다) 한 것도 하나의 죽음이다. 락가수에게 빠져 익사하고 데킬라를 마셔(불에 탄다는 것) 존재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녀 대신 누군가 바다에 빠져 정말로 익사한다. 그녀가 헤엄을 쳐서 바다 멀리 나갔던 것으로 그녀의 자살 욕망을 눈치채게 했었다. 그러니 그녀는 그 익사자에게 또한 말 할수 있는 것이다. 그를(익사한 그, 혹은 그녀)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러한 상징적인 죽음을 거쳐서 다시 새로 태어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남근기(남근선망기-그녀는 현의 성기를 만진다)를 지나 이 죽음을 통과하므로써 비로소 생식기에 접어드는, 말하자면 통과의례적인 작품으로 불 수 있겠다. 결말에서 그녀는 물에 빠졌다가 나와서 맘껏 운다. 이는 '해소'다. 물에서 나왔으니 세례이기도 하다. 다시 태어난 것이다.



흠, 그러니까 이 소설은 통과의례를 말하고 있어. 이렇게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버리고 나니 정말로 여러가지들이 이 아귀에 맞아들었다. 그녀가 죽음을 원하는 심리는 엄마가 계획한 그녀의 안정적인 앞날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그녀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심리는 안정적인 생활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녀는 대리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한다. 이렇게 쉽게 결론을 지어도 되는 것일까?



그러기에는 자꾸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일테면 이런 것이다.

그녀는 왜 그토록 엄마와 현을 배척하는 것일까? 혹시 열 여덟 소녀라면 응당 그럴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독자도 동의하며 읽어야하는 것일까? 그런 전제를 깔고 읽어야한다면 얼마나 상투적인가.

작품은 언젠가의 여름 휴가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는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야기하고 있는 현재 시간은 작품에 없다. 왜 그런 구조여야만 했을까? 이런 구조는 작품에 어떤 효과를 주는 것일까. 그녀의 시선을 통해 느끼고 보고 사유하는 시점을 택했는데도 몇 군데에서는 그녀가 객관적 위치로 드러나서 어색해지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화자자적 자아가 아닌 작가적 자아의 개입이 아닌가? 그녀의 사고가 아닌 사십대 남성이 짐작하는 소녀의 사고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곳들이 종종 있었다. 요즘 소녀들은 어쩐지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열 여덟 소녀가 이럴리가... 이런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들이 나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또 있다.

락가수의 유혹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하는 걸까? 다른 이유로도 얼마든지 빠져들 수 있다는. 왜 락가수는 그녀에게 그녀 대신 죽음을 보았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하는 걸까. 그녀는 왜 또 그 말에 쉽게 넘어가나. 락가수의 정체성, 락가수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현의 '너와 결혼할거야'라는 말에 왜 거부감을 보이는 걸까.

이런 의문을 풀지 못한테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짐작하다보니 주제가 명료해지기는 커녕 점점 오리무중이 되었다. 이것은 소설의 열린구조라고 봐야할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명료하게 전달되지 못한다는 것은 혼란을 주는 것이고 이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열 여덟을 먹은, 이 세상에 한 한명뿐인 고유한 생명을 가진 그녀로 느껴지지 않았다. 개별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이다. 고통을 벗어나야하지만 그 고통을 매혹과 결부시켜 그녀가 경쾌한 아이라는 설정을 하는 작가의 의도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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