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18
김연수의 단편 '기억할 만한 지나침'.
<여름, 바다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늙어가고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을 읽는데 프랑스와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 떠올랐다. 열 여덟 소녀가 주인공이라서, 여름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무엇보다도 문장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해서 그랬을 것이다.
사강의 그 작품을 나는 스무살때 읽었다. 그냥 읽은 것으로는 양이 차지 않아서 읽고 또 읽었다. 그만큼 나를 사로잡았던 작품이었다. 내가 스무살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김연수의 이 작품을 읽으면서 슬픔이여 안녕을 떠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감흥은 솟지 않았다. 오히려 반감 같은 것이 슬며시 올라왔다.
왜일까?
스무살이었던 그 때로부터 벌써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간 탓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치 슬픔이여 안녕에서 느꼈던 감흥을 느끼지 못한 것이 김연수의 탓이라도 되는양 작품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그것은 즐거움의 근원을 찾는 작업과는 반대방향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거는 딴지는 어쩌면 작품 탓이기보다는 내 탓이라는 말을 먼저 하면서 글을 쓴다.
제목이 먼저 걸렸다. 나중에야 이 제목이 바로 기형도의 시 제목을 차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듯 싶으면서도 따져 생각하면 오리무중일 것 같은 이 제목을 작가가 썼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작품에서 중요한 무게를 갖고 나오는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기형도의 시 구절을 마치 이 작품을 읽을 열쇠인양 탐색하며 읽었다.
그녀는 휴가중에 소설을 읽는다. 그 소설 속에서 에로티시즘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가는 중년 여인을 보며 그녀는 언젠가 읽었던 시 구절을 떠올린다. 시 속의 화자가 울고 있던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아픈 동일시를 말하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을 그 사내, 그리고 중년 여인과 동일시하는 것일까? 두려움이 매혹시키는 이유를 몰라 고통받는 중년 여인을 그녀가 동일시한다는 설정을 해보았다.
그녀는 죽는다. 물론 작품에서 죽지는 않지만 그녀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들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그녀가 락가수(네 대신 죽음을 보았다는 말을 두번이나 하는)와 섹스를(분명치는 않지만 그렇게 읽힌다) 한 것도 하나의 죽음이다. 락가수에게 빠져 익사하고 데킬라를 마셔(불에 탄다는 것) 존재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녀 대신 누군가 바다에 빠져 정말로 익사한다. 그녀가 헤엄을 쳐서 바다 멀리 나갔던 것으로 그녀의 자살 욕망을 눈치채게 했었다. 그러니 그녀는 그 익사자에게 또한 말 할수 있는 것이다. 그를(익사한 그, 혹은 그녀)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러한 상징적인 죽음을 거쳐서 다시 새로 태어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남근기(남근선망기-그녀는 현의 성기를 만진다)를 지나 이 죽음을 통과하므로써 비로소 생식기에 접어드는, 말하자면 통과의례적인 작품으로 불 수 있겠다. 결말에서 그녀는 물에 빠졌다가 나와서 맘껏 운다. 이는 '해소'다. 물에서 나왔으니 세례이기도 하다. 다시 태어난 것이다.
흠, 그러니까 이 소설은 통과의례를 말하고 있어. 이렇게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버리고 나니 정말로 여러가지들이 이 아귀에 맞아들었다. 그녀가 죽음을 원하는 심리는 엄마가 계획한 그녀의 안정적인 앞날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그녀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심리는 안정적인 생활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녀는 대리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한다. 이렇게 쉽게 결론을 지어도 되는 것일까?
그러기에는 자꾸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일테면 이런 것이다.
그녀는 왜 그토록 엄마와 현을 배척하는 것일까? 혹시 열 여덟 소녀라면 응당 그럴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독자도 동의하며 읽어야하는 것일까? 그런 전제를 깔고 읽어야한다면 얼마나 상투적인가.
작품은 언젠가의 여름 휴가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는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야기하고 있는 현재 시간은 작품에 없다. 왜 그런 구조여야만 했을까? 이런 구조는 작품에 어떤 효과를 주는 것일까. 그녀의 시선을 통해 느끼고 보고 사유하는 시점을 택했는데도 몇 군데에서는 그녀가 객관적 위치로 드러나서 어색해지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화자자적 자아가 아닌 작가적 자아의 개입이 아닌가? 그녀의 사고가 아닌 사십대 남성이 짐작하는 소녀의 사고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곳들이 종종 있었다. 요즘 소녀들은 어쩐지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열 여덟 소녀가 이럴리가... 이런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들이 나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또 있다.
락가수의 유혹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하는 걸까? 다른 이유로도 얼마든지 빠져들 수 있다는. 왜 락가수는 그녀에게 그녀 대신 죽음을 보았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하는 걸까. 그녀는 왜 또 그 말에 쉽게 넘어가나. 락가수의 정체성, 락가수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현의 '너와 결혼할거야'라는 말에 왜 거부감을 보이는 걸까.
이런 의문을 풀지 못한테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짐작하다보니 주제가 명료해지기는 커녕 점점 오리무중이 되었다. 이것은 소설의 열린구조라고 봐야할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명료하게 전달되지 못한다는 것은 혼란을 주는 것이고 이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열 여덟을 먹은, 이 세상에 한 한명뿐인 고유한 생명을 가진 그녀로 느껴지지 않았다. 개별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이다. 고통을 벗어나야하지만 그 고통을 매혹과 결부시켜 그녀가 경쾌한 아이라는 설정을 하는 작가의 의도만이 느껴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