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2009 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작은 김지숙씨의 '스미스'다.

 

작품을 읽으면서 감탄했다. 어쩌면 이렇게 특별한 갈등 구조 없이, 화려한 수사 없는 평이한 문장으로 가볍게 끌고가서 주제를 집약적으로 드러낼 수 있나.

 

매트릭스에서 몸이 수십 개, 수백 개로 분화되어 여기저기 출몰하는 스미스. 세계 도처에 있는 스타벅스. 벌써 이러한 아이템 선정에서 주제로 가는 지름길은 선명해졌다.

 

내가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들은 스미스들에 다름 아니다. 고유한 한 인간의 냄새를 맡기를 이미 기대하지 않는다. 내 자신도 소개팅마다 상대에게 어울릴 캐릭터로 변신하며 단편적인 방식으로 기억될 뿐이다. 스미스도 나도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인간이기 보다는 균질화된 기호이자 익명의 존재다.

 

소개팅은 친구의 친구, 친구의 선후배, 친구의 군대 동기 혹은 친구의 친구의 친구 소개로 이어진다. 이러한 점조직 연결은 한 점이 빠졌을 때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아 소통이 불가능해진다.  점은 독립되어 있으며 기원을 찾아나설 수 없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이러한 것을 상징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아주 영리하게 하나하나의 아이템들을 기계적이라고 할 만큼 유기적으로 엮어 놓았다. 거대한 소비사회에서 길 잃은 우리의 초상을 되짚어보자고 확실하게 말한다.

 

이렇게 선명한 주제를 끌어내는 것에 감탄한 만큼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왜? 감탄한 그 이유가 바로 감동을 해치는 이유다. 여백도 침묵도 없이 곧바로 주제로 끌고가는 폭력을 느꼈다. 한때는 나도 '잘 빚은 항아리'같은 작품들을 우러르고, 작품 초입에 슬며시 등장하는 못에 목이라도 매야한다는 잘 짜인 구조를 선망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런것들이 의도적으로 느껴지고 우스워졌다. 그러한 글들에서는 여백도 침묵도 없다. 해찰을 부리며 독자가 상상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나는 폭력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9. 5. 19 

 

들녘 출판사에서 2009년 1월에 출간된 스와 데쓰시의 장편소설 <안드로메다 남자>의 표지다.

 찬찬히 뜯어보면 볼수록 궁금증이 일어난다.
 



 선명한 초록색 바탕에 그려진 그림.

얼핏 보면 여자가 무릎을 구부린 한쪽 다리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 속에는 많은 얼굴이 있다.

사람의 얼굴이라고 할 수는 없는, 그러나 눈과 입을 가진 얼굴들도 있다.

마치 노래하듯, 아니면 중얼거리듯 하얀색으로 연기처럼 풀려나가는 글자들도 재미있다.

그 글자들이 무슨 글자들인지 읽기 힘들지만 자꾸만 읽고 싶어지고 해독하고 싶어져서 밝은 불빛 아래 가지고 가서 눈알이 뱅뱅 돌도록 들여다보았지만 스와 데쓰시라는 이름이 들어간것을 짐작할 뿐 잘 모르겠다, 손 들었다. 
 

 



책의 앞 날개. 

 



표지 일러스트에 대한 설명.

일본어를 모르는 나로선 일러스트의 원제가 뭔지 너무 궁금하다.

마지막에 보이는 '유영'만으로 짐작할 뿐.

일러스트 작가 이름을 검색해았지만 없었도다.

 

이 책은 일본에서 출판된 원본의 표지와도 같은 걸로 알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9. 4. 25 

 


현대문학 4월에의 특집, 신춘당선자들의 새로운 작품 중 김성중의 '그림자'는 어느 작품들보다도 재미있었다.

 

작년 여름에 있었던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당선작은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였다. 그 작품을 프린트해서 나는 국망봉 숲속 바위위에 걸터앉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심사평에선 '독자를 향한 돌팔매질이 야물지 못하며 의미의 돌멩이(문장)들이 충분한 비거리를 확보하지 못했던 것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으나 나는 그저, 야 재밌게 잘썼다, 감탄할 뿐이었다.

 

오늘 읽은 김성중의 '그림자' 또한 읽기 시작하자마자 빠져들게 하는 흡인력이 있었다.  

난시의 눈으로 보면 세상이 겹쳐보이고 또 하나의 상을 만날 수 있다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또 하나의 세상- 또 하나의 나, 도덕적이고 규범에 충실한 인간- 부도덕하고 야만적인 인간. 이러한 대칭적이고 모순적인 대립항은 알고보면 내 자신과 내 그림자와의 관계와 같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바뀌고 바뀐 그림자대로 행동하는 세상은 그야말로 무법천지 아비규환이 된다. 아가씨의 그림자를 갖게 된 할머니는 굽은 허리를 펴고 젊음을 얻었으며 목사의 그림자를 갖게 된 연쇄살인범은 감옥에서 기도한다.  

내 자신 조차도 어느날 동생과 그림자가 바뀌어있다는 것을 느끼고 내가 동생인지 내가 나인지 혼란스럽다. 폐허가 되어버린 시가지는 쓰레기와 오물이 넘쳐나고 난잡한 성교와 범죄속에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은 마치 '눈먼자들의 도시'를 연상시킨다.

 

 그림자를 찾아서 제대로 바꿔주는 소녀가 나타나는데 그 소녀는 그림자가 없다. 그녀는 메시아일까. 소녀 덕에 사람들은 그림자를 되 찾게 되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그 소녀에게 있다고 소리친다.  

그리곤 세상에 빛이 사라지고 어둠만이 남게 된다. 마침내 사람들은 모두 그림자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주제를 향해 몰아가는 작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고 자연스럽고 흡인력있는 문장의 힘이 보여서 김성중의 앞으로 작품 활동이 정말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9. 4. 25 

 


현대문학(2009년 4월호)에 신춘당선자 특집이 실렸다. 2009 조선일보 단편소설 당선자인 채현선 작품 '모퉁이를 돌면'을 읽었다.

 

신춘당선작이었던 '아칸소스테가'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아내를 둔 나의 이야기라면  '모퉁이를 돌면'은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나와 그, 그녀들의 이야기다.

 

내게는 교통사고로 죽어버린 미수가 있고 미세스 로렌스에겐 식물학자였던 로빈슨 로렌스가 있으며 남자에겐 생전에 만화영화를 좋아했던 아들이 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에 대해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미세스 로렌스는 세상에서 가장 큰 치즈 케이크를 만들어 사람들과 나눠 먹는 게 꿈이지만 경제적인 문제에 발목이 잡혀도 "우리 로빈슨이 반드시 도와줄거야. 그렇지, 허니?"라고 한다.

 

남자는 아내와 함께 아들의 묘지에서 아들이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을 상영한다.  

"사람들은 우리 부부가 미쳤다고 생각해. 고통에 갇혀서 살아간다고도 하고. 당연해. 처음엔 죽는 게 차라리 나았거든. -생략- 결국 아들 녀석의 무덤에서 죽으려고 이곳을 찾아왔었어. 그런데 누군가 귀에 대고, 후욱, 입김을 불어넣는 거야. 우리는 그것이 아들아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보았지. 녀석이 우리 곁에 있다는 걸."

 

나는 미세스 로렌스가 실험삼아 구워보는 치그 케이크를 날마다 먹으며 지겨워하고, 죽은 영혼이 찾아와 입김을 불어넣고 바람을 타며 춤을 춘다는 남자를 허무맹랑한 말을 늘어놓는 궤변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세스 로렌스가 일러준 소원을 비는 호수를 찾아나서는데 실수로 호수에 빠지고 만다. 죽음의 문턱에서 나는 미수를 사랑했고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물속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긴 숨을 뱉었고 그때 누군가가 나의 엉덩이를 밀어올렸다.

 

남자는 말했다.  

모퉁이를 돌것인지 그냥 돌아갈 것인지 그자리에 죽어버릴 것인지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지만 자신은 모퉁이를 돌겠다고.  

나는 물 속에서 미수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고 났을 때 이미 모퉁이를 돌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때 물 속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받아들일때 구원받는 것이다.

 

나는 입영통지서를 든 가방을 챙겨서 카페 미세스 로렌스를 벗어난다. 살아오는 동안의 굴곡을 몸매의 굴곡으로 소화한 미세스 로렌스는 계속 로빈슨 만의 로렌스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영화관 남자는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며 묘지 영화관을 찾아온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미세스 로렌스가 구운 치즈 케이크를 먹는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옅은 바람이 스크린 자락을 흔들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캐릭터들의 몸이 길어졌다가 짧아지고 구부러진다는 것을. 설령 그것이 바람의 영혼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들이 영화관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찾아와 리듬을 타며 춤추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정말 상관없는 일이었다.--183쪽 마지막 부분. 

 

신춘당선작은 해마다 쏟아져나오지만 그 이후로 잊혀지는 당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채현선이 앞으로 발표할 작품들이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9. 4. 1 

 

 어느날 단편을 하나 읽기 시작했는데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이상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또 어느날 단편을 하나 읽었다. 그리고 다시 오래전에 읽었던 그 단편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 읽었던 작품은 창작과비평(2003) 가을호에 실린 강영숙의 '씨티투어버스'였다. 그 후에 읽은 단편은 역시 강영숙의 '아령하는 밤'으로 2008황순원문학상수상후보작이다. '씨티투어버스'는 '아령하는 밤'에 의해 내게 다시 다가왔다.
 

  '씨티투어버스'를 읽었을 때 우선 서투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상징이라고 하기에는 뜬금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상한 것들-썪은 밧줄에 묶여 내려온 미친개, 집 사겠다는 가족, 들소 등-이 그동안의 독법으로 소화하기에는 벅찬것들이었다.  

사소한 어떤 것이라도 의미를 부여하려는 오랜 습성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영숙의 소설속에는 느닷없이 나타나, 이게 뭘까, 골몰하기 시작할 무렵 사라져버린다. 이상한 것들은 서로의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그런 점들이 내게는 서투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 느낌이야말로 내가 읽는 독법이 아주 서투르다는 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은 그녀의 다른 소설 '아령하는 밤'을 읽었을 때 어렴풋하게 왔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읽었던 그 작품, '씨티투어버스'를 기억해냈고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반복해서 읽었다. 아하, 그렇군. 그녀와 눈을 맞춘 느낌!

 

  '씨티투어버스'와 '아령하는 밤'은 여러가지 면에서 서로 닮아있다. '씨티투어버스'에서는 공항폐쇄조치가 예고되고, '아령하는 밤'에서는 도시가 썩어간다.

 

  공항 폐쇄조치가 예고된 날, 사람들은 모두 길거리로 나와 삿대질을 해가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 없는 나라에 사는 국민들은, 모든 상황이 정상화될 때까지 폐쇄된 자국 영토 내에서 꼼짝할 수 없으며, 어쨌든 우리들끼리 잘 지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표면적으로는 잘 받아들였다. -중략-자국에는 더 이상 놔둘 수 없는 오만가지 배양 세균들, 실험 도중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버려 용도폐기된 일단의 희귀동물들,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 시각이 적나라한 화질 나쁜 섹스비디오 테이프들, 무엇보다 관심의 대상이 됐던 것은 썩은 밧줄에 묶여 내려온 미친개 한 마리였다. -'씨티투어버스'- 

 

  악취는 점차로 심해졌다. 썩어가는 호수 밑에는 최소 2미터 이상의 쓰레기가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도시의 땅바닥 그늘진 곳 어디에나 냄새 나는 녹색물이 고여 있어 얼굴을 두고 다닐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아령하는 밤-

 

  공항이 폐쇄되고 도로는 정체되며 도시는 악취에 싸이고 변기는 막혀 오물이 넘친다. 기괴하고 음산하며 더럽고 고통스러운 공간은 묵시록적이고 세기말적이다. 구원의 출구는 없어보인다.  

그러한 공간 설정은 작가의 현실인식 때문이다.  

쥐를 아무렇지 않게 죽여서 버리는 남자가 햄버거 냄새는 견디지 못하고 토악질을 해대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보여준다.  

벼랑으로 치달아 떨어져죽고 트럭에 치여죽는 들소는 종말을 모르고 내달려가는 현대인을 말한다. 들소는 원시성의 이미지다. 원시성을 가진 들소는 현대 자본주의 논리, 자본주의 체계에 포획되지 못한 인간이다. 들소는 자본주의에 밀려가서 벼랑으로 떨어지거나 트럭에 받혀 죽는 것이다.  

 

  절망적인 현실은 무섭고 두렵지만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실낱같은 희망이 보인다. 그것은 따뜻함이다.  

친구 엄마의 수술을 위해 돈을 빌려주고(돌려달라고도 말하지 못하고), 죽은 직장 동료의 아내를 위해 힘을 쓰고, 토하는 흰 셔츠의 등을 두드려주고, 김밥을 싸서 변기 수리공에게 주거나 노인의 집에 갖다준다.  

그것은 소통에 대한 부끄럽고 두려운, 작은 욕구이자 시작이다.

 

  이 두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는 대단히 컬트적이어서 무언가 의도를 끄집어내려는 시도자체가 우습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중구난방인 듯 조합되는 에피소드와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상한 캐릭터의 인물들 속에 정교하고 치밀한 주장이 숨어있었다.  

그것은 뭐랄까, 신세대 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삼팔육이라고나 할까.

 

  이 두 작품을 읽어보고 나는 강영숙이라는 작가가 좋아져서 다른 작품도 찾아서 읽어보고 있다. 가능하면 그녀의 작품집도 가까운 시일안에 사서 읽어볼 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