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19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를 읽었다.

그녀의 소설들은 전에도 몇편인가 읽은 적이 있음에도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있는데도 나는 별 느낌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별 생각을 갖지도 않았다. 흔히들 말하듯이 '너무 가볍다'라는 생각으로 그냥 넘겼던 것 같다.



이 작품집도 처음에 읽을 때는, 역시 가볍군, 하면서 읽었다. 어떤 작품은 소소한 일상을 담담하게 말하는 수필같았다. 과연 그럴까.



'아빠의 맛'을 보자.

나와 깊은 관계에 있는 직장 동료가 역시 한 직장동료인 다른 여성을 임신시켰다. 나는 그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사직서를 낸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나는 별거중인 아빠의 시골집으로 간다. 아빠는 애인과의 관계가 엄마에게 들통나서 별거 중이다. 아빠는 이미 애인과는 정리가 된 상태이지만 다시 엄마와 함께 지내지는 않는다. 나는 바쁜 일상 속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급급하게 보내던 때,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의 시골집에서 나와 내 가족은 무언가를 조금씩 잃어버렸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확신한다. '가정이란 남자와 여자가 죽어라 역할 분담을 해야 겨우 돌아가는 것임을'.

엄마가 관리하는 집은 깨끗하게 정돈되어있고 편안하다. 아빠의 집은 냄새나는 양말과 똥이 살짝 묻은 팬티가 빚어내는 불쾌함이 있지만 그것은 '살아 돌아가는 힘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아침 식사로 오믈렛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깨닫는다. 이미 애인을 정리했음에도 아빠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거기엔(엄마의 집) 긍정적이고 올바르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갈등이 불러일으킨 고통을 어떻게 해소하는가를 보면 '진지한, 무거운' 소설이 보여주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학작품이란 모름지기 진지해야하고, 심오해야하고 그래서 무겁고, 우울하고, 아프다는 인식을 우리들은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바나나의 소설들을 가볍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바나나는 밝고 가볍고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가운데서 우리가 갖고 있는 그런 고정관념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긍정적이고 올바르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선이라는 교육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그것은 절대적인것 같았다. 우리는 올바르고 높은 목표를 두고 도덕적인 기준에 의해 '그러면 안돼'라는 브레이크를 걸며 늘 바르게 살고자 한다. 그런 이념에 철저하게 갇혀산다고 볼 수 있다.



문학작품만이 아니라 영화를 보더라도 일본 영화와 한국영화는 다르다. 일본 영화는 가볍다. 그걸 기준으로 본다면 한국영화는 '오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갈등에 반응하는 모습들은 카오스적이다.



시대가 달라졌다. 촛불시위현장만 봐도 그렇다. 예전에 시위는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했으나 촛불시위현장은 오히려 유머와 해학이 있다. 최루탄에는 화염병으로 대응하던 시대가 아닌 것이다. 물대포를 쏘면 '온수'를 달라 외치고, 경찰이 마이크를 잡으면, '노래해'를 외친다. 이젠 '고뇌하는 포즈'는 우스운 시대다. 인간을 바라보고 관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이 달라졌다.



가벼운 소설은 가볍다고 쉽게 여기지 말자,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그녀의 소설을 보면서.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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