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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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7 

 

이 책을 읽고 나서 맨 처음 한 일은 지구본을 들여다 본 것이었다. 이 지구본으로 말하자면 피아노 위의 먼지를 닦는, 아주 가끔의 기회에서도 제외되곤 했던, 우리 식구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한 채 먼지를 두텁게 쓰고 있던 놈이다. 지구 반대쪽에서 사는 주노 디아스라는 작자(물론 作者)는 생판 만난 적도 없고 만날 가능성도 없는 이 아줌마는 물론이고 멀쩡히 먼지를 뒤집어 쓰고 사는 지구본에게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지구본까지 들먹이면서 이 무슨 별 가당찮은 억지람...



가당찮은 억지까지 쓰면서 지구본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만큼 이 소설이 이 아줌마의 뇌 상태를 아주 휘저어놓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곳, 도미니카 공화국은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 섬중의 하나다. 내 평생 도미니카 공화국에 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없을 것 같다. 발리도 하와이도 못 가봤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도미니카라는 이름은 학교에 다닐때 사회시간에 들은 걸로 내게선 끝났을 지 모른다. 오스카 와오 일가의 삼대에 걸친 수난사를 통해 나는 도미니카라는 나라의 지난 날 독재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도미니카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든 독자들을 위해 작가는 아주 긴 분량의 각주를 따로 달아놓았다. 각주를 읽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소설은 오스카 와오의 사랑이야기다. 절망적이고 슬픈 이야기임에 틀림 없지만 모든 문장들은 껌 좀 씹어주면서 내뱉어주는 말투로 툭툭 던져진다. 그럼에도 유머와 위트가 반짝인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작품은 화자가 바뀌어가면서 진행되지만 나중에 보면 그 모든 것이 유니오르(오스카 와오의 누나 애인)의 서술임을 알게 된다. 그 유니오르는 작가의 다른 얼굴이다. 유니오르는 여러 면에서 작가와 비슷하다. 아니 작가 자신이다.



이 작품은 형식 면에서도 새롭고 내용 면에서도 새롭다. 진지하면서도 가볍고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슬프면서 우습고 우스우면서 비통하다. 시간이 없어서, 다음에 읽자, 하면서도 결국은 읽어버렸다. 이 책을 한 번 잡으면 그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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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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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2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를 본 후 이 영화가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를 보고 만들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화는 충분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나는 다시 피츠제럴드가 썼다는 그 소설을 읽기로 했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이라고는 [위대한 개츠비]를 본게 전부였다. 그 소설을 읽었던 때는 대학에 다닐 때였는데 나는 단박에 이 소설에 빠져들었더랬다. 피츠제럴드가 쓴 벤자민 이야기는 영화와 다른 어떤 맛으로 나를 사로잡을지 기대했다.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책들 중에서 문학동네의 책을 골랐다.



영화와 소설은 ‘한 남자가 노인의 외모로 태어나 아기가 되어 죽는다’는 설정만 같았다. 소설은 벤자민이 노인의 외모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면서 겪게 되는 평탄치 않은 삶에 주목한다. 영화는 벤자민이 거꾸로 가는 외모 때문에 사랑하는 데이지와 사랑을 지속하지 못한 아픔에 초점이 있다.



영화에선 벤자민이 그저 늙은 노인의 쭈글쭈글한 얼굴에 노쇠한 팔다리를 가진 채 앙앙 우는 아기(강보에 싸인 아기)로 태어나지만 소설 속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가 완전한 노인의 몸(요람에 누울 수 없어 팔 다리를 척 걸쳐놓고 앉아있는 노인)을 하고 있으며 아버지에게 가래가 가르릉 거리는 소리로 말도 건넨다.



영화는 죽음을 앞둔 데이지가 딸 캐롤라인에게 벤자민과의 사랑을 알려주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임종을 앞두고 있는 데이지의 병원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허리캐인 때문에 부산스럽고 두려운 분위기다. 허리캐인은 바로 캐롤라인이 자신의 생부 벤자민을 알게 되는 사건에 다름 아니다. 벤자민이 비록 노인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관객은 벤자민을 연민과 사랑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벤자민과 데이지의 사랑은 아름답고 슬펐다.



소설에서는 벤자민도 벤자민의 사랑도 영화에서처럼 아름답게 포장되지 않는다. 하긴 권위와 인습에 냉소를 보내는 피츠제럴드가 영화에서와 같은 애절한 사랑을 그리지는 않을 것이라 짐작했었다. 소설속의 벤자민은 스무살이 되었을 때 몽크리프 장군의 딸인 힐더가드 몽크리프를 보고 한 눈에 반하여 결혼에 이르지만 점점 늙어가는 힐더가드에게 더 이상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벤자민은 아내에게서도 자식에게서도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살다가 아기가 되어 죽어간다.



이 책에는 이 외에도 여러 단편들이 실렸다. ‘젤리빈’, ‘낙타 엉덩이’, ‘도자기와 분홍’를 읽고 책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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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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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0
 

'한때 한 소년이 있었다.'라는 문장을 읽는다면 이 문장은 '탁자 위에 놓인 사과'라거나 '구두가 젖었다' 처럼 별다른 의미를 주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역사]를 다 읽고 난 다음이라면 '한때 한 소년이 있었다'라는 문장이 단순한 문장으로 남지 않는다.

 

나는 그랬다.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심장이 빨리, 그리고 크게 뛰었다. 나는 책 읽는 것을 잠시 멈추고 내 심장이 평소와 같이 되기를 기다렸다. 잠시였지만 나는 어쩌면 이것이 심장과 관련하여 내 몸의 이상을 알려주는 첫 징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한 스트레스를 받은 게 있나 가까운 시간부터 거슬러 기억을 더듬기까지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이 책 때문인지 몰랐다. 그런 일이 책을 읽는 동안 두어번 더 일어났다. 심지어는 내 종아리부터 팔뚝까지 오소소 찬기가 감돌며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이 책의 무엇이 나를 이토록 흔들어놓을 수 있었을까?  이루지 못한 아픈 사랑때문에? 이제는 사랑이라고 하면 흐흥, 냉소부터 하고 보는 심드렁한 나로부터 너무나 멀어진 '사랑'에 대한 향수 때문에? 다만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죽음을 당하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고 사는 불행 때문에?  

 

아니다. 나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다. 내가 열거한 이러한 것들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역사]를 너무도 폭력적으로 구겨버리는 짓에 다름아니다. 이 작품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라며 섣부른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주문했던 것은 순전히 니콜 클라우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아내라는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무슨 그런 이유로 책을 주문하느냐고 물어보는 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랬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 반했던 나는 그의 아내라는 여자가 쓴 이 [사랑의 역사]가 어떠한지 궁금했다. 그리고 질투했다.

 

죽음을 기다리는 한 노인 레오폴드 거스키, 그는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떠난 알마를 그리워하며 이디시어로 폴란드에서 '사랑의 역사'를 썼고, 자신을 모르는 아들 아이작 모리츠를 위해 '모든 것을 뜻하는 단어'를 쓴다. 그가 쓴 '사랑의 역사'는 그의 연적이었으며 친구였던 즈비 리트비노프에 의해 스페인어로 표절당하여 출판된다. 스페인어로 출판된 이 책을 이스라엘 청년 다비드 싱어가 구입하고 그의 연인 샬럿에게 준다. 그들은 딸에게 책 속의 주인공 '알마'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알마 싱어'는 남편을 잃고 그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사랑의 역사'를 추적한다.

 

레오폴드 거스키와 알마 싱어, 그리고 알마 싱어의 동생 버드가 번갈아가며 화자가 되어 진술하는 문장들은 아름답고 슬프며 놀랍다.

 

다행하게도 니콜 크라우스가 썼다는 [남자, 방으로 들어가다]가 민음사에서 이미 출판이 되었다. 이제 주문하여 읽는 일만 남았다. 생뚱맞은 의문 하나, 그녀는 왜 남편의 이름을 쓰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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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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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이 세상의 온갖 잘못된 정보의 요람과 같다. 가족의 일상사에는 사실상의 오류를 낳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지나치게 밀접한 관계, 존재의 소음과 열기 같은 것. 어쩌면 생존의 필요와 같은 좀더 심오한 뭔가가 원인인지 모른다. 우리는 적대적인 사실들로 가득 찬 세상에 둘러싸인 망가지기 쉬운 생물이라고 머레이는 말한다.

-145쪽

우리가 우리의 상태와 우리 자신 사이의 음산한 분리를 감지하는 것은 죽음이 도표화되거나 이를테면 화면에 나타나는 그런 순간이다. 신에게서 강제로 빼앗아온 멋진 기술체계 전부인 상징기호의 망은 이미 도입되어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에서 우리 자신을 이방인처럼 느끼게 만든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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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감독 데이빗 핀처

출연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랑쉐, 줄리아 오몬드

개봉 2008 미국, 166분
 

 

사소한 일 하나는 셀 수없는 우연이 쌓인 결과다. 이 말은 내가 쓰기 전에 무수한 사람들이 한 말이다. 굳이 이렇게 쓰는 것은 어쩌면 내가 이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때문이다.



벤자민은 사랑하는 연인이 교통사고를 당했을때 그렇게 말한다. 만약 택시 운전사가 커피를 사지 않았다면, 만약 그녀가 탈 택시를 놓치지 않았다면, 만약 그녀의 친구가 신발 끈을 묶지 않았다면... 무수한 만약을 설정하면서 안타까워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빌려서 나도 말을 해본다면 이렇다. 만약 내가 라디오에서 이 영화에 대한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만약 차가 밀리지 않았다면, 만약 양재동 꽃시장을 갈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섹시한 엉덩이를 가진 사람으로 마릴린 몬노를 제치고 1위에 선정되었다는 브래드피트를 톰 크루즈와 비교하며 절대로 아저씨 삘이 나지 않을 스타라고 라디오에선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당장 머리속에 집어 넣었다. 브래드 피트-엉덩이-매력-벤자민 어쩌고 하는 영화. 잘 생긴 매력덩어리 브래드 피트를 보면서 두어시간 즐거움에 빠져봐야지.



평소의 나는 머리속에 뭔가를 입력시켰자 그대로 잊어버린다. 그러나 다시 '만약에'를 비켜갈 마법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가 즐겨보는 신문의 한 코너에서였다. 한동원은 이 영화의 적정관람료를 만원이 훨씬 넘는 가격으로(정확히 얼마였나고? 고걸 기억하면 맹물이 아니지) 매겨놓았던 것이다. 나는 한동원이 매기는 적정관람료를 맹신하는 신도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다시 또 입력시켰다. 벤자민 어쩌고 하는 영화, 음, 그때 라디오에서 들었던 그 영화, 브래드 피트가 나온다는 그 영화, 봐야지.



오늘 조조로 예매를 해놓고 나는 내가 예매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뭐냐하면 이 영화의 원작이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이란다. 뭐라고? 피츠제럴드라고? 허, 그렇다면 난 더더욱 벤자민을 만나러 가야했다.



이말저말 많이 늘어놓았지만 요약정리하자면 나는 브래드 피트의 매력을 즐기고 싶었고 괜찮은 영화라는 한동원의 말을 믿었기에 영화를 보게 되었다. 거기에 내 이십대를 사로잡았던 피츠제럴드에 대한 그리움이 확 밀려들어서 더더욱 그랬다는 그런 말이다. 그랬으니 도대체 반짝이는 브래드 피트가 어떻게 팔십대를 연기하나(분장은 어떻게 하나), 스콧 피츠 제럴드의 원작이라니 아마도 문학적 감동은 어떨까, 어떤 메시지를 감독은 전하고 있나, 이런 메뉴를 준비하고 메가박스 제 4관 의자에 앉았다.



내가 준비한 메뉴는 한쪽으로 밀어두고 영화를 보았다. 그냥 나는 벤자민이 되어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가 되어 어디선가 잠들고 있을 벤자민에게 '굿나잇 벤자민' 이라고 웅얼거렸다. 그리곤 손수건을 찾느라 슬그머니 핸드백을 뒤졌다. 시간에 대해서, 외모에 대해서, 늙는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모험적인 삶에 대해서 그럴싸한 메시지를 정리할 생각일랑 저만치 밀어버렸다. 그대로 슬프고 아름다우면서 유머가 있는 영화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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