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감독 데이빗 핀처
출연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랑쉐, 줄리아 오몬드
개봉 2008 미국, 166분
사소한 일 하나는 셀 수없는 우연이 쌓인 결과다. 이 말은 내가 쓰기 전에 무수한 사람들이 한 말이다. 굳이 이렇게 쓰는 것은 어쩌면 내가 이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때문이다.
벤자민은 사랑하는 연인이 교통사고를 당했을때 그렇게 말한다. 만약 택시 운전사가 커피를 사지 않았다면, 만약 그녀가 탈 택시를 놓치지 않았다면, 만약 그녀의 친구가 신발 끈을 묶지 않았다면... 무수한 만약을 설정하면서 안타까워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빌려서 나도 말을 해본다면 이렇다. 만약 내가 라디오에서 이 영화에 대한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만약 차가 밀리지 않았다면, 만약 양재동 꽃시장을 갈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섹시한 엉덩이를 가진 사람으로 마릴린 몬노를 제치고 1위에 선정되었다는 브래드피트를 톰 크루즈와 비교하며 절대로 아저씨 삘이 나지 않을 스타라고 라디오에선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당장 머리속에 집어 넣었다. 브래드 피트-엉덩이-매력-벤자민 어쩌고 하는 영화. 잘 생긴 매력덩어리 브래드 피트를 보면서 두어시간 즐거움에 빠져봐야지.
평소의 나는 머리속에 뭔가를 입력시켰자 그대로 잊어버린다. 그러나 다시 '만약에'를 비켜갈 마법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내가 즐겨보는 신문의 한 코너에서였다. 한동원은 이 영화의 적정관람료를 만원이 훨씬 넘는 가격으로(정확히 얼마였나고? 고걸 기억하면 맹물이 아니지) 매겨놓았던 것이다. 나는 한동원이 매기는 적정관람료를 맹신하는 신도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다시 또 입력시켰다. 벤자민 어쩌고 하는 영화, 음, 그때 라디오에서 들었던 그 영화, 브래드 피트가 나온다는 그 영화, 봐야지.
오늘 조조로 예매를 해놓고 나는 내가 예매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뭐냐하면 이 영화의 원작이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이란다. 뭐라고? 피츠제럴드라고? 허, 그렇다면 난 더더욱 벤자민을 만나러 가야했다.
이말저말 많이 늘어놓았지만 요약정리하자면 나는 브래드 피트의 매력을 즐기고 싶었고 괜찮은 영화라는 한동원의 말을 믿었기에 영화를 보게 되었다. 거기에 내 이십대를 사로잡았던 피츠제럴드에 대한 그리움이 확 밀려들어서 더더욱 그랬다는 그런 말이다. 그랬으니 도대체 반짝이는 브래드 피트가 어떻게 팔십대를 연기하나(분장은 어떻게 하나), 스콧 피츠 제럴드의 원작이라니 아마도 문학적 감동은 어떨까, 어떤 메시지를 감독은 전하고 있나, 이런 메뉴를 준비하고 메가박스 제 4관 의자에 앉았다.
내가 준비한 메뉴는 한쪽으로 밀어두고 영화를 보았다. 그냥 나는 벤자민이 되어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가 되어 어디선가 잠들고 있을 벤자민에게 '굿나잇 벤자민' 이라고 웅얼거렸다. 그리곤 손수건을 찾느라 슬그머니 핸드백을 뒤졌다. 시간에 대해서, 외모에 대해서, 늙는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모험적인 삶에 대해서 그럴싸한 메시지를 정리할 생각일랑 저만치 밀어버렸다. 그대로 슬프고 아름다우면서 유머가 있는 영화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