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작은 김지숙씨의 '스미스'다.

 

작품을 읽으면서 감탄했다. 어쩌면 이렇게 특별한 갈등 구조 없이, 화려한 수사 없는 평이한 문장으로 가볍게 끌고가서 주제를 집약적으로 드러낼 수 있나.

 

매트릭스에서 몸이 수십 개, 수백 개로 분화되어 여기저기 출몰하는 스미스. 세계 도처에 있는 스타벅스. 벌써 이러한 아이템 선정에서 주제로 가는 지름길은 선명해졌다.

 

내가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들은 스미스들에 다름 아니다. 고유한 한 인간의 냄새를 맡기를 이미 기대하지 않는다. 내 자신도 소개팅마다 상대에게 어울릴 캐릭터로 변신하며 단편적인 방식으로 기억될 뿐이다. 스미스도 나도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인간이기 보다는 균질화된 기호이자 익명의 존재다.

 

소개팅은 친구의 친구, 친구의 선후배, 친구의 군대 동기 혹은 친구의 친구의 친구 소개로 이어진다. 이러한 점조직 연결은 한 점이 빠졌을 때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아 소통이 불가능해진다.  점은 독립되어 있으며 기원을 찾아나설 수 없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이러한 것을 상징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아주 영리하게 하나하나의 아이템들을 기계적이라고 할 만큼 유기적으로 엮어 놓았다. 거대한 소비사회에서 길 잃은 우리의 초상을 되짚어보자고 확실하게 말한다.

 

이렇게 선명한 주제를 끌어내는 것에 감탄한 만큼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왜? 감탄한 그 이유가 바로 감동을 해치는 이유다. 여백도 침묵도 없이 곧바로 주제로 끌고가는 폭력을 느꼈다. 한때는 나도 '잘 빚은 항아리'같은 작품들을 우러르고, 작품 초입에 슬며시 등장하는 못에 목이라도 매야한다는 잘 짜인 구조를 선망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런것들이 의도적으로 느껴지고 우스워졌다. 그러한 글들에서는 여백도 침묵도 없다. 해찰을 부리며 독자가 상상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나는 폭력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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