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 

 

 어느날 단편을 하나 읽기 시작했는데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이상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또 어느날 단편을 하나 읽었다. 그리고 다시 오래전에 읽었던 그 단편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 읽었던 작품은 창작과비평(2003) 가을호에 실린 강영숙의 '씨티투어버스'였다. 그 후에 읽은 단편은 역시 강영숙의 '아령하는 밤'으로 2008황순원문학상수상후보작이다. '씨티투어버스'는 '아령하는 밤'에 의해 내게 다시 다가왔다.
 

  '씨티투어버스'를 읽었을 때 우선 서투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상징이라고 하기에는 뜬금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상한 것들-썪은 밧줄에 묶여 내려온 미친개, 집 사겠다는 가족, 들소 등-이 그동안의 독법으로 소화하기에는 벅찬것들이었다.  

사소한 어떤 것이라도 의미를 부여하려는 오랜 습성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영숙의 소설속에는 느닷없이 나타나, 이게 뭘까, 골몰하기 시작할 무렵 사라져버린다. 이상한 것들은 서로의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그런 점들이 내게는 서투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 느낌이야말로 내가 읽는 독법이 아주 서투르다는 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은 그녀의 다른 소설 '아령하는 밤'을 읽었을 때 어렴풋하게 왔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읽었던 그 작품, '씨티투어버스'를 기억해냈고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반복해서 읽었다. 아하, 그렇군. 그녀와 눈을 맞춘 느낌!

 

  '씨티투어버스'와 '아령하는 밤'은 여러가지 면에서 서로 닮아있다. '씨티투어버스'에서는 공항폐쇄조치가 예고되고, '아령하는 밤'에서는 도시가 썩어간다.

 

  공항 폐쇄조치가 예고된 날, 사람들은 모두 길거리로 나와 삿대질을 해가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 없는 나라에 사는 국민들은, 모든 상황이 정상화될 때까지 폐쇄된 자국 영토 내에서 꼼짝할 수 없으며, 어쨌든 우리들끼리 잘 지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표면적으로는 잘 받아들였다. -중략-자국에는 더 이상 놔둘 수 없는 오만가지 배양 세균들, 실험 도중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버려 용도폐기된 일단의 희귀동물들,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 시각이 적나라한 화질 나쁜 섹스비디오 테이프들, 무엇보다 관심의 대상이 됐던 것은 썩은 밧줄에 묶여 내려온 미친개 한 마리였다. -'씨티투어버스'- 

 

  악취는 점차로 심해졌다. 썩어가는 호수 밑에는 최소 2미터 이상의 쓰레기가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도시의 땅바닥 그늘진 곳 어디에나 냄새 나는 녹색물이 고여 있어 얼굴을 두고 다닐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아령하는 밤-

 

  공항이 폐쇄되고 도로는 정체되며 도시는 악취에 싸이고 변기는 막혀 오물이 넘친다. 기괴하고 음산하며 더럽고 고통스러운 공간은 묵시록적이고 세기말적이다. 구원의 출구는 없어보인다.  

그러한 공간 설정은 작가의 현실인식 때문이다.  

쥐를 아무렇지 않게 죽여서 버리는 남자가 햄버거 냄새는 견디지 못하고 토악질을 해대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보여준다.  

벼랑으로 치달아 떨어져죽고 트럭에 치여죽는 들소는 종말을 모르고 내달려가는 현대인을 말한다. 들소는 원시성의 이미지다. 원시성을 가진 들소는 현대 자본주의 논리, 자본주의 체계에 포획되지 못한 인간이다. 들소는 자본주의에 밀려가서 벼랑으로 떨어지거나 트럭에 받혀 죽는 것이다.  

 

  절망적인 현실은 무섭고 두렵지만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실낱같은 희망이 보인다. 그것은 따뜻함이다.  

친구 엄마의 수술을 위해 돈을 빌려주고(돌려달라고도 말하지 못하고), 죽은 직장 동료의 아내를 위해 힘을 쓰고, 토하는 흰 셔츠의 등을 두드려주고, 김밥을 싸서 변기 수리공에게 주거나 노인의 집에 갖다준다.  

그것은 소통에 대한 부끄럽고 두려운, 작은 욕구이자 시작이다.

 

  이 두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는 대단히 컬트적이어서 무언가 의도를 끄집어내려는 시도자체가 우습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중구난방인 듯 조합되는 에피소드와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상한 캐릭터의 인물들 속에 정교하고 치밀한 주장이 숨어있었다.  

그것은 뭐랄까, 신세대 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삼팔육이라고나 할까.

 

  이 두 작품을 읽어보고 나는 강영숙이라는 작가가 좋아져서 다른 작품도 찾아서 읽어보고 있다. 가능하면 그녀의 작품집도 가까운 시일안에 사서 읽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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