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의자나무
량 슈린 글 그림, 박지민 옮김 / 북뱅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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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멋대로 자기밖에 모르고, 누군가와 함께 지내고 친해지기를 싫어하는 나무. 거인 에이트가 그 나무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상냥하게 말을 걸고, 그 나무에 기대앉는다. 그 뒤로 나무는 변한다. 가지를 늘이고 꽃을 피우며, 새와 다람쥐를 맞는다. 그러다 땅 속의 지렁이와 개미까지 그 나무를 돕기에 이른다. 나무는 결국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가 되어, 나무를 찾는 모두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

어찌 보면 무척 단순한 이야기다. 또 칭찬이나 관심이 한 존재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꽤 흔한 편이다. 하지만 이 그림책은 그리 흔해 보이지 않는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나무와 그 주변의 여러 존재들을 잘 살폈다. 그들의 특성과 바람 따위를 잘 살펴서, 그것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가 즐겁다.

또 그림이 꽤 특색 있다. 주인공 나무는 어느 정도 입체적으로 보이는데, 나머지 배경이나 등장하는 여러 동식물은 거의 평면적이다. 그런데 그런 그림이 공간감을 살린 그림을 그리지 못해 나온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정확히는 모르는 거지만). 그 평면적인 그림이 상상력을 제안하지 않고, 오히려 다채롭고 다정하며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색감과 그림으로 상상력을 북돋는다. 그림의 배치나 면 분할도 독특하여 한 몫을 한다.

어찌 보면 다채로운 색깔 사용이 그리 세련돼 보이지는 않고 또 이국적으로 보이는데, 그건 아마 타이완 사람이 쓰고 그린 그림책이어서 그런 것도 같다. 전체적으로 책에서 어떤 명랑한 힘 같은 게 느껴지는데, 그 까닭도 지은이에 있을까? 아마 그건 선과 색의 쓰임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하다. 선이 단순하고 직선이 많으며 선명하고, 색도 무척 분명하고 강하다(그렇다고 날카롭고 무겁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즐겁게 볼 그림 같다.

아, 이 책이 관심을 갖게 하는 이유는 아까 말한 대로 타이완 사람의 그림책이라는 점일 거다. 그것도 흔한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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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나리와 아기별 민들레 그림책 3
마해송 지음, 정유정 그림 / 길벗어린이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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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과 슬픔이 한껏 베어 있지만, 아기별이 아직도 바다 깊은 곳에서 빛을 내고 있다고 하니 마음이 많이 놓인다. 그런 마지막이 안정감을 준다. 그렇다고 이야기 안에서 벌써 잔뜩 깊어진 슬픔을 쉽게 해결해버린 건 아니다. 슬픔과 그리움을 그대로 담았지만 마음의 안정을 주는 이야기. 무척 마음에 드는 이야기다.

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구도도 잘 짜여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바위나리, 그리고 아기별과의 만남과 우정.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지만, 너무나 그리워하는 사이지만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기다리다가 끝내 만나지 못한다. 아주 흔한 이야기지만 그 원형을 쉽고 간결하게 잘 밝혀냈다. 아이들이 읽기에 무척 쉬운 이야기고, 슬픔과 그리움, 아름다움이라는 정서를 단순하면서도 아련하게, 그리고 복합적으로 직접 마음에 담아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림도 나쁘지 않다.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사람 모습으로 드러내는 과정이 따로 설정되어 있거나 그렇진 않지만 어색하지 않다. 색감도 부드럽고 은은해서 정감 있다. 구도나 시간 변화에 따른 색의 변화도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별나라 임금님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설정도 좋다.

아기별이 바위나리를 찾아갈 때 한 말이 마음에 남는다. “누가 이렇게 슬프게 울까? 내가 가서 달래 주어야겠다.” 누군가의 슬픔을 마음에 안고서, 그 슬픔을 나누고 도우려는 마음. 참 이쁘다. 인연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건가 보다. 아기별과 바위나리가 그렇게 만나 함께 이야기도 하고 즐겁게 노는 모습이 어찌나 이쁘게 마음에 들어오는지. 우정을 쌓고 사랑을 나눠가는 시간 안에 깃들었을 행복감이 참 소중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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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희네 집 두고두고 보고 싶은 그림책 1
권윤덕 글 그림 / 길벗어린이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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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게 자연의 빛을 뽐낼 것 같은 나무와 꽃들이 모두 흑백으로 되어 있고, 대문 안으로 살짝 들여다보이는 집 담이 빨간 벽돌로 색을 내고 있다. 빨간 벽돌로 써진(?) 제목 '만희네 집'을 한 번 읽고 나니, 대문 안으로 보이는 빨간 집에 눈길이 모이면서 궁금함을 준다.

만희라는 남자아이의 가족이 좁은 연립주택에서 살다가, 마당이 있어 넓은 할머니 집으로 이사를 간다. 그 이사 간 집 안을 따스한 그림이 죽 펼쳐 보여준다. 만희는 이런 집에서,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개 세 마리와 함께 즐겁게 사는구나. 아기자기하게 사는 가족의 냄새가 책에서 묻어난다.

그런데 나는 왠지 거꾸로 그 넓은 집에서 좁은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간 이야기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마당도 없고 나무와 꽃도 없으며, 따뜻한 볕 한 줌 들지 않는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갔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 만희가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가 있다면, 아니, 이 책의 이야기가 그런 것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너무 굳어 있는 거겠지? 남이 넓고 넉넉한 집으로 이사를 가서 그림이 내뿜는 냄새 그대로 풍기며 사는 모습을 보니까, 배가 아파서 그런 건가?

적어도 나는 연립주택에서는 만희네 가족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다. 그 좁은 연립주택에서 얼마나 예쁘고 단란하게 살아왔는지가 궁금하다. 그 좁디좁은 집을 더 샅샅이 그림으로 담아, 우리네 두 작은 눈이 쉽게 찾아 읽기는 어려운, 그 좁은 집 안에서의 살가움과 행복을 그려냈다면, 그랬다면 이 그림책을 읽고 난 느낌이 더 따뜻했을까? 잘 그린 그림이 예쁘게 담긴 그림책을 보고 나서, 외려 거꾸로 된 내용이 궁금하고, 그 내용으로 채워진 그림책을 보았다면 더 마음 따뜻한 감동을 가졌을 거 같다면, 이 책은 나에게 무엇인가. 글쎄…, 잘 모르겠다.

(하긴, 이런 그림책을 보는 아이가 사는 집이라면, 만희네가 이사 간 집 정도는 되겠지?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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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14
필리파 피어스 지음, 수잔 아인칙 그림, 김석희 옮김 / 시공주니어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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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정말 놀이가 삶(일)인가 보다. 내가 아이일 때도 그러했을 테고, 또 지금 어른인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을 텐데, 우리는 아이들 삶에서 놀이를 그리 크게 보지 않는다. 놀면서도 늘 무언가 깨닫고 알게 되기를 바란다. 놀이는 단지 그런 시간을 보조하는 때에, 잠깐 쉬는 때에나 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우리가 아이일 때엔 그렇지 않았고, 지금 아이들도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의 주인공 톰과 해티도 그렇다. 우리 같으면 뭘 하고 노나 걱정하고 지루해 할 시공간 안에서 온 관심을 ‘함께 노는 일’에 모은다. 그리고 그 놀이의 공간과 재료는 온통 자연이다. 톰과 해티의 노는 삶은 결코 시간 허비가 아니다. 놀고 있는 지금과 여기, 그리고 피어나는 관계에 관해 계속 탐구한다. 그것도 무척 진지하게. 노는 일에 흠뻑 젖어서 그럴 수 있는 걸 테다.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계속 오가는 톰의 놀이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도 어딘가 삐거덕 밀고 열어버릴, 정원으로 나갈 문이 있을 거 같은 느낌을 준다. 진심 어린 우정과 자연을 만끽하며 삶을 긴장으로 내몰 놀이들이 어디엔가 있을 거 같은 기대를 준다. 거대한 모험이 아니라, 나뭇가지 하나라도 부여쥐고 나무를 타며 느끼는 희열로 피어나는 작은 모험이 있을 거 같다.

어릴 적엔 정말 밤을 알지 못했다. 자정 넘어 새벽 시간은 알면 안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새벽에 문득 일어나면 엉엉 울며 엄마를 찾거나 눈을 끔뻑였고, 새벽에 깼다는 것 자체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밤을 맞으며 느끼던 설렘, 두려움, 그러면서도 밀려오는 기대감, 궁금함, 모험심…, 물론 지금은 잊고 만 감정들이다. 톰은 그런 아이들만의 감정을 그대로 품고 있다. 바로 그 감정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줄기였고, 시간과 공간을 교차시켜 톰과 해티에게 아름다운 우정, 감동 어린 사랑, 만남을 담아준 그릇이었다.

톰과 해티는 어른들에게 그런 어릴 적 감정들을 다시 추억하라 말한다. 다만 그 추억은 ‘그땐 그랬는데…’ 식의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지금 우리 둘레 아이들을 다시 보아야 하는 추억이다. 우리가 그랬듯, 아이들에게는 놀이가 삶(일)이다. 그 삶을 소중히 일궈가도록, 또 그럴 수 있도록 곁에서 도우라고 말해주는 추억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만날 때 그런 추억이 담긴 눈을 가질 수 있다면, 나이든 해티에게 달려와 껴안던 톰처럼 아이들도 우리에게 달려오지 않을까?

머리로는 알고 있던 ‘아이들에게는 놀이가 삶(일)이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제대로’ 알고 기억하고 또 몸에 담으라고 짚어주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인 것 같다. 아, 아이들에게는 톰과 해티처럼 자기 삶을 꽈악 놀이로 채우라고 말하며, 아이들도 그러고 싶어하는 마음에 근거를 팍팍 대주는 게 미덕인 거 같고. 아 또, 책 읽는 것도 꽤 재미있는 놀이구나 하는 생각도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미덕도 있군.
(여기서 말하는 ‘놀이’가 컴퓨터 오락 같은 걸 말하진 않는다고, 다들 아시겠지?)

내용 말고 이 책 자체만 두고 볼 때 아쉬운 점(이것만 아니면 별 다섯 개 주는 건데)이 있는데, 오자가 두세 군데 있고, 삽화가 정말 너무 안 좋다. 들어가지 않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삽화다. 그리고 글에서 아이들이 읽기엔 좀 어렵게 번역된 부분이 몇 군데 있고, 쉼표가 좀 많다는 것도 지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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짖어봐 조지야 - 3~8세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41
줄스 파이퍼 글 그림, 조숙은 옮김 / 보림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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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라는 강아지가 있다. 조지 엄마가 조지에게 한번 짖어보라고 하는데, 그때부터 조지가 강아지 아닌 강아지가 된다. 조지가 짖는 소리가 그걸 말해준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 의사를 찾아가 도움을 받고, 조지는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그러자 조지 엄마는 도움을 준 의사와 함께, 조지가 조지일 수 없었던 까닭들, 그 까닭의 제공자들에게 뽀뽀를 한다.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이 책 이거 단순한 그림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과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고 쉽지만 책이 드러내려고 하는 바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 책이 무척이나 좋다.

이 책을 본 뒤 나도 내 안에 있는 ‘나 아닌 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 안에는 얼마나 많은 ‘나 아닌 나’가 있을까. 나는 정작 내 안에 ‘나 아닌 나’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나를 나일 수 없도록 하는, 그런 ‘나 아닌 나’가 내 안에 있을 것이다. 나 자신도 ‘여러 나’ 가운데 어떤 나가 진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 수 있다. 어쨌든 나에게는 분명히 ‘내가 바라는 나’도 있을 테고, 그 ‘내가 바라는 나’란 존재에게는 어떤 기대도 품을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내 목숨이 그대로 드러내는 ‘자연 그대로의 나’가 있을 터. 그 나는 물론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과 연결되고,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 존재여야 하나라는 고민과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나 아닌 나’라는 존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부정하고 싶은, 나이고 싶지 않은 나, 사람답지 않은 나인가?

이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그 ‘나 아닌 나’라는 존재는 애정을 갖기 힘든 존재가 된다. 하지만 이 그림책에서 조지 엄마는 조지가 조지일 수 없도록 한 존재들에게도 애정을 갖고 뽀뽀를 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뭔가 띵! 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정하고 싶은, 나이고 싶지 않은 나, 사람답지 않은 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그 ‘나 아닌 나’와 ‘진짜 나’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말해주는 것 아닌가. 이 장면이 없었다면 이 책은 그냥 그저 그럴 수 있는, 간단한 아이디어가 만들어낸 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지 엄마는 ‘엄마’이기에, 조지 안의 ‘조지 아닌 조지’한테까지 그렇게 애정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장면은 또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지는 다시 조지 아닌 조지가 된다. 애써 자기를 되찾았는데, 왜 그랬을까.

예전에 <민들레>라는 대안교육 잡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공동체적인 삶을 이념으로 하는 어떤 외국의 대학에서, 그 대학에 다니던 사람 하나가 어떤 교수에게 “공동체는 ‘안녕’이라는 인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고 말하고서는 학교를 나왔다는 내용이었다. 그 교수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조차 잘 보여주지 않던, 그래서 가까이 하기가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 교수도 사람들에게 공동체는 어떠해야 한다는 이념을 두고 여러 가지를 가르쳤을 텐데 말이다.

‘안녕’이라는 인사, 그 간단한 인사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조지는 잠깐 다시 조지 아닌 조지가 되었던 걸까? ‘나 아닌 나’를 그저 끄집어내야 할 존재로만 보지 않고, 어떨 때는 그 ‘나 아닌 나’를 나에게 일부러 불어넣어야 할 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 내 안으로 불어넣을 ‘나 아닌 나’는 긍정하고 싶은, 나이고 싶은 나, 사람다운 나일 테지. 조지는 잠시, 굳은 표정으로 자기 길만 보며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주로 어른들)을 향해 자기 아닌 자기를 불어넣어 “안녕” 하고 크게 짖었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 아닌 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 조지의 짖음이 크게 들린다. “안녕”……. ‘본래의 나’ 그리고 ‘지향하는 나’를 생각케 한다.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내용인 것 같고, 나이가 좀 있는 아이들과는 조지의 짖음을 두고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좋을 거 같다. 너무 관념적인 얘기가 될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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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야맘 2004-07-06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이런식으로도 생각하다니... 참교님에게 머리가 숙여집니다.

산너머 2004-07-07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히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해 본 거죠 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