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이 처음 발을 디딘 이곳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면
언젠가 이 강바람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다고 느낀다면
마음에 드는 창문 아래에서 하루 종일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면
하루쯤 늦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차라리 마음이 편해진다면
옥상에 앉아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달빛이 비치는 산을 올려다보는 그 시간이 좋아진다면
상대방을 향해 먼저 웃음 짓는 순간이 많아졌다면
지금 당신 곁을 스쳐간 그 사람이 3년 전 기차 칸에서 당신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던 그 사람일 것 같다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면
구름의 무게가 몇 그램이나 되는지 궁금해진다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고마워진다면
막혀버린 길보다 여러 갈래의 길 앞에서 더 난감해진다면
정들었던 게스트하우스를 떠나며 마음이 물끄럼 해진다면
버스 안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중년 남자가 멋있게 느껴진다면
그와 함께 차를 마시며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면
망고를 사고 동전 하나를 더 거슬러 받았는데 이 세상을 얻은 것보다 더 기뻤다면
나중에 동전 하나를 덜 거슬러 받을 걸 알게 됐는데 이 세상을 잃은 것보다 더 슬펐다면
우리 모두 무언가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갑자기 내 삶이 대책 없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서서히 여행에 중독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2. 당신과 이곳으로 다시 여행을 올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새벽의 사원으로 가 기도를 드리고
안개 속을 산책할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흐르는 강물을 바라볼 것입니다
두 손으로 당신의 이마를 덥히는 뜨거운 태양을 가려줄 것이고
비가 오면 당신과 함께 나무 아래로 뛰어갈 것입니다
밤이면 당신의 발을 씻겨줄 것이고
당신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것입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아담한 식당도 미리 알아두었습니다
주인아저씨와도 미리 친해두었어요
넉넉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길 것입니다
당신과의 약속입니다
내가 당신 몰래 만들어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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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외로움에 시달리던 시절의 나는 혼자 길을 걸으며 휴대전화를 꺼내 통화하는 척하면서 혼잣말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어느 휴일 저녁 다음 날 마실 우유를 사기 위해 동네 슈퍼에 들러 "이거 얼마예요?" 하고 물어보면서, 문득 그 문장이 하루동안 입밖으로 꺼내본 첫 말이라는 걸 깨닫고 섬뜩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물 대신 캔맥주를 마시고, 텔레비전에서 외화가 방영되면 성우의 더빙을 따라하며 제 목소리의 안녕을 확인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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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변명이긴 해도 결혼을 할 시간이 없었다. 오피스텔과 직장을 오가고, 밤을 새고, 회의를 하고, 기획서를 작성하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돌아와 빨래를 하고, 간단한 요리를 만들거나 경조사에 얼굴을 내밀고, 가전제품을 구입하고, 오디오를 바꾸고, 외국으로 현지답사를 떠나고, 돌아오고, 그때끄때 트렌드에 맞는 옷을 구입하고, 승진을 위해 노력하고, 연봉협상에 임하고, 미용실을 바꾸고, 회식을 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잠을 자고, 일어나 샤워를 했을 뿐인데 15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있었다. 한 해 한 해 미뤘던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마흔살의 독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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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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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볼이 토실해 보여서 한창 연애 중인 줄 알았어."
"그런데 왜 정말 몸무게가 줄지 않는 걸까요? 그 남자를 아무리 평가절하 한다고 해도 상당한 무게일 것 같은데. 참 이상해요."
"그만큼 우울이 쌓였겠지."
"몸무게는 결코 줄지도, 늘지도 않을 거야. 인연에는 무게가 없더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 그런 것 따위 없더라. 습관 같은 거더라. 사랑해야 하고, 사랑을 시작하면 무겁게 사랑해야 하고, 거기서 끙끙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참아야 하고."
"누가 참으라고 한 걸까요."
"그러게. 알면 내가 가서 뺨이라도 한 대 날려줄 텐데."

한 사람을 기쁘게 만들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은 어김없이 욕망을 접어야 했을 테고. 그게 온통 슬픔의 근원이라는 것을, 그 중독의 고달픔을 미처 몰랐겠지. 관계의 부작용은 늘 뒤늦게야 나타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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