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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평점 :
사적인 경험으로 보자면, 내겐 무서운 트라우마가 있다. 학교에서 교지 편집장을 할때, 종간호를 내면서 신문에 대한 평가를 싣는데 신문의 언어에 대한 평가를 하자고 한 것이다. 특히 불필요한 외래어나 비문들에 대한 평가를 보면 이 후에 좀더 좋은 문장으로 신문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 학기에 발행한 신문을 모아서 한글학회 소개로 알게된 선생님께 보내드리고, 원고지 20매의 글을 부탁했다. 그런데 온 원고는 원고지 50매가 넘었었다. 내용에서 확인한 내용은 참담했다. 거의 모든 기사가 외래어와 비문 투성이었고, 그래도 봤다고 싶었던 편집과 교열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원고를 받아든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엄격하면,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X세대를 '모를세대'라고 바꾸라니... 기사는 대중의 언어를 따르는 것이지 사전의 언어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1.
이 아픈 기억이 떠오르는 데는 단 10초면 족했다.
"수염은 염소수염으로 길렀다. 스물아홉 살인 젊은 사진가인 프레드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즐거운 청년이었다. 요즈음 다섯 살 손위 여자친구와 살고 있는데, 곧 딸이 태어난다며 즐거워했다."
라는 문장은 아래의 문장을 수정한 것이다.
수염은 고티 스타일로 길렀다. 29세의 젊은 사진가인 프레드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해피한" 청년이었다. 현재 5년 연상의 여자친구와 살고 있는데, 곧 딸이 태어날 거라며 즐거워했다.(16쪽)
개인적으로 나는 딱 '고티 스타일' 이 부분의 수정에만 동의가 된다. 어쩔 수 없이 정석대로 고친 글을 보면 읽는 맛이 떨어지는 것이다. 아~ 옳은 것과 즐거운 것에는 큰 간격이 있다.
2.
최종규가 쓴 <뿌리깊은 글쓰기>는 충분히 시사적이다. 그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그러한데, 소위 한글운동의 한계와 연성화된 글쓰기의 문제다.
이오덕 선생은 참 좋은 단어를 사용하셨다. 그리고 그런 단어는 글의 깊이를 더해 참 구수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최종규의 글쓰기는 왠지 답답하고 강박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이 책이 기존 문장의 잘못을 짚는 성격탓이긴 하겠지만, 그렇게 바꾼 표현이 옳다면 온 세상의 글은 그야말로 의미의 '매개물'로서만 기능할 뿐 그 자체의 매력은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빨간펜보다는 자신의 한글로 에세이나 동화를 쓰는 것이 나을 뻔했다. 솔직히 이 책에서 제시된 한글번역 중 동의되는 단어는 단 하나도 찾기 어려웠다. 소울메이트라는 영어단어가 심하기는 하지만 마음동무라는 말도 썩 와닿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이면엔 사실 연성화된 글쓰기 문제가 있긴 하다. 문어가 구어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본적인 문장구조는 물론이고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 되었다. 최근 SNS에서 쉽게 사용되는 축약어들은 숫제 그냥 새로운 단어로 받아들어야 할 문제다. 멘붕, 소위 멘탈붕괴나 열폭 즉 열등감 폭발이라는 단어를 '마음 무너짐' 등으로 바꾼다면 말로 말해지는 단어의 느낌은 사라지고 만다. 말은 쓰여지는 것과 동시에 말해지는 것이 중요하고, 요즘은 말해지는 것 조차 '복수'로 존재하는 것이다.
3.
그래서 이 책은 참 많은 고민거리를 준다. 나처럼 40대를 바라보는 사람조차도 이 책에서 나오는 영단어가 더욱 익숙하다. 커피숍과 찻집이 같은가 다른가, 나는 다르다고 본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것과 마우스를 누르는 것은 역시 다르다.
그럼에도 눈으로 책을 보면,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고민스럽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나중에 올 최종규의 글을 더 보고 내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