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로 가는 마차
김수현 지음 / 열매출판사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1. 오랜만에 詩集이 읽고 싶어서 서점에 갔는데 드라마 작가로 더 유명한 김수현의 소설『겨울로 가는 마차』(이하, '겨울로')가 눈에 띄었다. 서서 몇 페이지 읽다가 구입. 시집은 M군이 골라준 백석詩集으로 구입.

2. 최근 몇 년간 읽은 로맨스소설에서 내가 만난 최고로 멋있는 남자주인공을 꼽으라면『겨울로』의 '박우섭'을 꼽겠다. 

3. 나는 말을 할 때, 표현을 할 때 미사여구를 아끼지 않는 버릇이 있다.
최고야, 제일 좋아, 정말 좋아... 아낌없이 최상급을 가져다 쓴다.
아주 오래 전 이런 내 말 버릇에 제동을 건 건 역시 M군이었다. 오늘은 좋지만 내일은 안 좋아하게 될 지도 모르는데 왜 그렇게 단정지어 버리느냐는 거였다. 실제로 나의 최고와 제일과 정말은 그동안 여러번 바뀌었지만, 게중엔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도 물론 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 말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박우섭에 대한 애정은 아마 꽤 오래 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멋있는 남자'에 대한 취향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만약 이 '멋있는 남자'에도 원형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박우섭같은 남자가 아닐까 한다. - 참고로 영화에선,《라스트 모히칸》의 '호크아이(Hawkeye /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부동의 내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다. 

4. 이 소설은 내용 곳곳에서 보이는 몇 가지 흔적으로 보아 그리고 동명의 영화가 80년대 초반에 개봉했었던 걸 볼 때, 오래 전에 이미 출판되었던 것을 이번에 다시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제목부터가 옛 냄새를 솔솔 풍기지 않는가. 물론 이야기 또한 신파와 통속 그 자체다. 하지만 뻔하디 뻔한 과정을 도는 롤러코스터에 독자를 끌어다 앉히는 것은 작가의 능력. 시청률 귀신이라는 작가는 그녀의 통속적인 세계 속에 시청자인 나를 잡아다 앉혔듯 독자인 나도 그렇게 만들었다.  

5. 금방이라도 나열할 수 있는 몇 개의 작품을 리스트에 올린 작가라면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는 자기복제의 혐의를 김수현 작가 역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작가가 공통적으로 변주하고 있는 요소를 꼽으라면 역시 캐릭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캐릭터들은 식상하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예순이 넘은 이 노련한 작가는 캐릭터를 구현하는데 있어 가히 발군의 감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6. 보수적이고 반듯하고 언뜻 마초적인 냄새도 풍기지만 사랑하는 여자앞에서는 굽힐 줄도 알고 부드러워질 줄도 아는 남자와, 더없이 신파적이고 청순가련형에다 쉽게 순응하지도 비굴하지도 않는 자존심을 가진 여자는 김수현식 로맨스에 빠져서는 안 될 요소인 동시에 김수현식 로맨스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김작가의 로맨스는 캐릭터에서 출발하기 때문.
다시 말해서 강하지만 유연한 남자와 약하지만 부러지지 않는 여자는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한편 역설적으로 김수현식 신파와 통속을 대중과 소통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들 캐릭터는 다소 구식이고 답답하지만 그런만큼 성실하고 정직하고 주도적이고 주체적이다. 한 마디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한 성인의 성숙한 연애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들은 매력적이다. 이 점이 김수현 드라마의 힘은 스토리보다도 캐릭터에 있다고 보는 이유이다. 스타가 드라마를 성공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김수현 드라마는 드라마속 캐릭터가 바로 스타다. 작가의 뚜렷한 스타일로 인해 몇 가지 면에서 계속 비판을 받고 있지만 어쨌든 작가 김수현은 국내의 어느 드라마 작가보다도 로맨스의 속성을 가장 잘 이해하는, 로맨스를 로맨스이게 구현해낼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다.

물론 드라마 시청과 독서의 집중도는 엄연히 다른 점이 있고 그래서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작가의 어법을 빌려 '쩍' 소리가 나는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 예로 이제는 구닥다리처럼 보이는 몇 가지 소품들 그리고 부모님 세대에나 통할 것 같은 경직된 말투는 애교로 봐준다 쳐도 '흰 런닝, 흰 팬티'에 이르면 작가를 향한 원망의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 시대의, 그 시대를 위한, 그 시대에 의한 정서는 그것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 후대를 사는 우리의 몫이 아닌가 관대해지기로 한다.
다만 완벽주의라고 소문난, 그래서 세간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드라마 대본에서 보여주었던 작가의 꼬장꼬장한 장인 정신이 책에도 발휘되어 오타와 표준문법, 편집등에 좀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해방前에 태어난, 국내 드라마 역사에 계속해서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는 이 노작가를 내가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한 사랑을 그리는 작가의 밑그림은 늘 감동 받는다. 고백하건데 그런 사심이 이 책에 점수를 후하게 준 것일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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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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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 호프먼의 영화《졸업》을 봤을 때, 나는 결혼식장에서 도망쳐 나와 버스에 올라탄 연인의 뒷얘기가 몹시 궁금했다. 마찬가지로 드라마《불꽃》의 마지막 장면, 두 남녀가 각자 자동차를 몰고 와서 해후한 뒤의 얘기 역시 진심으로 궁금했다. 순전히, '그들은 과연 그 후 행복했을까? 아마 아닐 것 같은데...', 라는 이유에서 그들의 후일담이 궁금했던 것이다.
갑자기 웬 영화 타령인고 하니, 이 소설『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이 007과 본드걸의 후일담'격' 소설인 까닭이다.

일단 먼저, 본드걸의 이름은 '미미'다. (성은 끝내 안 나온다. 혹시 양?)
그럼 007의 이름은? 당근 제임스 본드다.
007의 무수한 본드걸중 하나가 되지 않기 위해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한 미미양. 미미는 테스트를 통과하고 신입연수도 무사히 마친 뒤 013을 부여받는다. 왠지 재수 없을 것 같은 번호 '13'은 다들 거부해서 남아 있던 번호.
그럼 미미양이 사랑해마지 않는 007은 어떤 남자인가.
우선 007은 만둣국, 청국장, 라면, 감자탕을 먹는다. 그리고 TV로 축구와 코메디 시청하는 것을 좋아하고, 섹스할 때 애무하는 걸 귀찮아 한다. 잘 때는 코도 골고 입가에 침도 묻힌다. 참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만 한국적 남성형인 찌질한 007이다. 

주인공들의 면면에서도 보여지듯『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은 본격소설도 장르소설도 아닌 굳이 장르속으로 밀어넣자면 로맨스판타지액션어드벤처쯤 되겠다. 임무를 마친 007의 품에 안겨 오렌지색 열기구를 타는(p.8) 시작이 그러하고 내부 스파이를 잡기 위해 성냥팔이 처녀로 위장하고 성냥갑 모서리에 성냥을 그으면서 주문을 외는(p.205) 소설의 말미가 그러하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의 암호같은 구절을 종종 발견한다. 이를 테면, 미미양이 스파이 테스트를 받기 위해 찾아간 술집의 주인 이름은 강내휘인데 미미양이 술집에서 공짜로 계속 주워먹었던 것이 강냉이다. 또 미미양은 1.5리터 사이다를 한 번에 마시는데 미미양이 첫번째 임무에서 부여받은 가명은 '오란실'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오란C를 연상했는데 오버인가? 어쨌든 이런 식의 언어 유희가 소설 여기저기에 심심찮게 포석처럼 깔려있다. 미미양이 스파이가 되려고 열심히 탐독하는 저서들의 제목들도 마찬가지.『스파이는 페루에 가서 죽다』『너희가 스파이를 믿느냐』『암호 읽어주는 여자』『간첩이 있던 자리』『스파이와의 인터뷰』『꼬리에 꼬리를 무는 작전』... 참고로 나는 이러한 제목들을 작가의 농담으로 그냥 유쾌하게 읽었다. 사실 소설에서 발견하게 되는 몇 가지 이유로 작가가 소설을 가볍게 썼으리라 짐작되는 혐의가 있긴 하다.

나는 작가 후기나 소설의 말미에 있는(이를 테면 비평에 해당하는) 해설 읽기를 좋아하는데 말하자면 본 메뉴를 잘 먹고 나서 후식을 먹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재미있게 읽고 난 이 소설의 해설은 좀...
해설의 제목은 '남근이여 안녕'인데 최근 몇 년간 출판되는 본격문학의 경향을 '남근(남성성)의 붕괴' '아버지의 부재' '가부장주의 해체'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행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소설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보다는 그냥 순수하게 '재미있는 소설'로 읽으면 그만이지 않나 싶다.

다음은 영어 55단어로 쓰인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중 하나다.

<침실에서>

"조심해. 그 총 장전되어 있어." 그는 침실로 다시 들어서면서 말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이 총으로 부인을?"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해. 청부업자를 고용해야지."
"나는 어때요?"
그는 씩 웃었다. "순진하긴. 어떤 바보가 여자를 고용하겠나?"
그녀는 총구를 겨누며 입술을 적셨다.
"당신 부인."
  

이 짧은 소설을 읽고 현대 가족사회의 붕괴,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부부의 소통의 단절, 총기소유 허가가 낳은 비극, 남근의 아이러니... 등등을 떠올려야 한다면 즐거워야 할 독서가 얼마나 피곤해지겠는가. 이렇듯 원작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과잉해석은 늘 넘쳐난다.

결론은『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은 재미있고 가벼운 소설이다. 재미있는 소설은 그냥 재미있게 읽으면 된다. 나는 이 소설을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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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의 아내 1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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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스포일러 있습니다 

한때 내겐, 유학 시절에 만난 일본인 친구, 말하자면 '베스트 프렌드'가 있었다.
언어가 통하는 것과 정서의 뿌리가 통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탓에 그 친구와 나는 매우 친한 것 같기도 하고, 좀 친한 것 같기도 한 그런 애매모호한 사이였는데 녀석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어느 날 저녁, 진지한 얼굴로 나한테 말했다. 자기와 Best friend가 되려면 두 가지 조건, funny 하거나 smart 하거나, 중 적어도 하나는 만족시켜야 하는데 내가 그 조건을 만족시킨다는 거다. 즉 내가 녀석의 Best friend인데 이유는 내가 매우 'funny'해서라는 것이다. (이왕이면 smart로 해주지-)

사실 '영리하거나 재미있거나'는 친구보다는 책을 고르는데 더 유용한 사항이다.
그리고『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이 두 조건의 중간쯤에 있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이 소설의 제목이 왜『시간 여행자의 아내』인가 알게 되는데 소설의 주인공은 헨리와 클레어 두 사람이지만 어떤 면에서 클레어가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보여진다. 다음은 책을 읽다가 콧날이 시큰해지더니 기어이 눈물이 나와 버린 장면이다.

아이가 선생을 돌아보며 미소를 짓는 바람에 나도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내 딸의 얼굴을 보고 있다. 바로 옆 전시관에 서 있던 나는 아이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갔고, 아이도 나를 보더니 얼굴이 환해지면서 작은 접이식 의자를 쓰러뜨리며 일어나 나에게 달려온다. 영문도 알아차리기 전에 나는 무릎을 꿇고 앨바를 내 품에 꼭 안고 있고 아이는 몇 번이고 나에게 '아빠'라고 속삭인다.
- p.144, 같은 제목 2권 

이후 눈물은 시시때때로 나왔는데 즐겁고 재미있었던 1권에 비해 작가의 묘사와 서술이 두드러지는 2권은 클레어에게 감정이 제대로 몰입이 되게 한다. 아이는 참으로 경이로운 존재다. 새롭게 생성된 삶과 그 속에 깃든 새로운 미래의 희망만으로도 아이란 그 자체로 축복이 가득한 존재다. 그러니 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기적에 다름아닌 아름다운 아이를 가진 헨리와 클레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다. 

삶의 시계가 43년이면 긴 걸까, 짧은 걸까.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와 헨리의 하루는 같지 않다. 그러나 ('시간일탈장애'로 불리는)시간여행을 해야 하는 헨리에게 43년은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야'라던 그의 말처럼 짧기만 한 시간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에 잠깐 등장하는 '원숭이 손' 일화가 주는 교훈처럼 삶은 우리에게 공짜로 뭔가를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헨리와 클레어가 행복한 연인이었으며 그들 앞에 어김없이 찾아온 이별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를 향한 조그만 투정은 있다. 헨리는 왜 미래의 클레어 앞에 좀 더 자주 나타나 주지 않았을까. 클레어라면 행복한 기억을 좀 더 많이 가질 자격이 있는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운명이 왜 헨리를 클레어 앞에 데려다 놓은 것인지 수긍하게 된다. 클레어야말로 시간 여행자의 아내가 될 자격이 있는 용감하고 현명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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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 - 서머싯 몸이 뽑은 최고의 작가 10명과 그 작품들
서머셋 모옴 지음, 권정관 옮김 / 개마고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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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M군이 "네 책장에서 책 세 권을 꼽는다면?" 질문을 던졌을 때 한참 고민하다 세 권을 고르고 그러고도 또 한참을 더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M군이 다시 "책 한 권을 추천한다면?" 물었을 때는 별 고민 없이 금방 한 권을 골라내었다. 세 권과 한 권의 차이는 과연 뭐였을까...

사실 열 권이든 세 권이든, 누군가 고심 끝에 꼽은 그 몇 권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재미있는 소설은 아닐 것이다. 흔히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는 꼬리표를 단 추천 목록은 거기에 언급된 작품이 가장 뛰어나다라는 절대 우위의 개념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우연적 요소가 포함된 비교 우위의 목록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이하 『불멸의...』)에서 10인의 작가와 작가의 대표 소설을 소개하면서 서머셋 몸 역시 이 부분을 염려하고 있다.
『불멸의...』는 서머셋 몸이 직접 꼽은 열 권의 소설에 관한 비평집(평론집)이다. 몸은 어느 날 기자의 청에 별 생각 없이 열 권의 책을 추천했다가 이후 출판사로부터 그 내용을 엮어 출간하자는 제안을 받고 고민에 빠졌던 과정을 책의 서두에 밝히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불멸의...』출판 과정을 밝히는 의미 외에도 세상의 수많은 책 중에 열 권의 책을 고르는 고민이 담겨 있다.

작가의 독서일기 또는 비평집은 재미면에서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다. 한식당에서 비빔밥을 고르는 것과 비슷하달까, 이미 검증된 작가의 필력은 소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어서 소설만큼 혹은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비평집도 많다. 그러니까 장정일의 경우처럼 소설이 아닌 독서일기 때문에 장정일의 팬이 된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서머셋 몸은 소설이란 무릇 첫째도 둘째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 그 자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소설이야 이미 검증되었으니 말할 것도 없겠고, 거기에 비평까지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게 잘 쓰니 한마디로 '쓰는 재기'를 타고난 작가가 아닌가 싶다. 

『불멸의...』의 목차는 10인의 작가로 나뉘어져 있는데 작가의 출생과 성장배경, 작가를 둘러싼 해프닝, 작가의 소설과 관련된 일화들로 꽉꽉 채워진 내용은,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다음 얘기로 유기적으로 이어져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책에서 한 눈을 팔지 못하게 만든다. 특히 작가의 사생활을 얘기할 때 몸의 어조는 어찌나 수다스럽고 유창한지 천일야화로 왕의 분노를 가라앉힌 세헤라자드가 이랬을까 싶다.

『불멸의...』에서, 몸은 '작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이라는 명제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입장을 취한다. 물론 몸이 고른 10인의 작가들은 모두 그 범주에 포함되는 인물들이다. 

오늘날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18,19세기만 해도 작가가 글의 소재나 자료를 얻는 경로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어 세상의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사생활까지도 몽땅 소재로 끌어다 썼다고 한다. 샐린저처럼 철저하게 은둔하는 작가도 있지만 근대에 활발하게 활동한 작가들에게 사생활의 비밀을 지키기란 거의 불가능했던 걸로 보인다. 그리하여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 작품 속에 자신의 얘기를 대놓고 하니 작품을 통해 작가를 읽는 것이 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작품 자체가 작가를 연구하는 자료인 경우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목차중 내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건 발자크와 스탕달 편. 이 두 사람은 A.뒤마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그들 특유의 기질만으로도 배꼽을 쥐게 하는데 거기에 몸의 맛깔나는 서술이 더해지니 재미가 배가 된다. 몸은 그들에게 '위대한 작가' 호칭을 붙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얄미울 정도로 신랄하게 '까'는데 왠지 그런 모습이 밉지 않고 정겹다. 동네아줌마들한테 남편의 치부를 흉보는 중년의 아내 같다고나 할까, 얼핏 '우리 남편은 무식하고, 교양 없고, 파렴치한 놈이에요' 라고 고자질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호흡 사이사이 '그래도 내 남편이 최고지' 하는 것 같은 애정이 느껴진다.
인상 깊었던 대목은 발자크나 스탕달은 물론 디킨스에 이르기까지 '원고 노동자'라는 표현. 실제 그들의 집필력은 이러한 표현이 가히 부족하지 않게 양적으로 대단하다. 이는 오늘날로 치면 '연재'에 해당하는 방식을 고수했던 당시의 출판 관행이 작가들로 하여금 원고 노동자로 전락하도록 했다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이들 작가 스스로도 글 쓰기를 돈버는 수단으로만 봤다고 하니 그 시대의 풍속이 그러했던 모양이다.

책 넘김이 느려졌던 목차는 허먼 멜빌과『모비딕』편인데『모비딕』은 미드 시리즈 CSI에서 그리섬 반장이 즐겨 인용하던 소설이기도 하다. 유명세에 비해 국내에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몸의 설명에 의하면 멜빌의 문장이 꽤 난해한데다 다층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니, 타국의 번역자에겐 상당히 어려운 도전이겠구나 싶다.
(몸에 의하면)멜빌은『모비딕』이 알고리즘 소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지만 멜빌의 소설은 실제로 그렇게 읽히고 있고 또한 그 덕에 오늘날까지 각종 '읽어야 할 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소설이 되었다 하니 일견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같은 언어권인 몸조차도 난해하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번역자의 어려움이 능히 짐작가고도 남는다. 일간 모 출판사에서 출간 예정이라니 기대를 해봐도 좋을 듯.

도스토예프스키 편은 다른 의미에서 인상적이었는데 최근 읽은 이병주의『허망과 진실 1 - 서양편』에 등장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듯 사뭇 달라서였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사람, 같은 에피소드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해석은 판이하게 달라지는 점이다. 그러니까 몸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린 소녀와 강제적으로 맺은 성관계를 자랑처럼 떠벌리고 다니는)파렴치한에 한심한 도박꾼에 열등감 가득한 찌질이 작가지만 이병주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요절한 형의 가족들을 평생 부양하고, 부정한 부인이지만 그녀가 죽을 때까지 헌신적이었던 순정파 로맨티스트이며, 사형을 사면받고 복역했던 감옥에서의 경험에 빗대어 소설의 사회적 기능에 고민이 많았던 작가다.
사실 누구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실제에 가까운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작가의 사생활이 작가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독자인 우리는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덧. 역자의 공은 웬만하면 드러나기 힘든데《불멸의...》는 정성을 들인 역자의 주석이 감탄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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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3-23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발자크 평전 한 권 읽는데도 엄청 오랜 시간을 소비했는데요. 이런 책이 있었군요. 리뷰당선 축하드립니다.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3-24 14:00   좋아요 0 | URL
발자크평전이면 혹 츠바이크의 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책장 좋은 위치에 꽂아두고 늘 읽어야지 읽어야지 노려보는 책 중 한 권인데 벌써 읽으셨다니 부럽습니다.
'불멸의 작가...'의 장점은 목록 중 관심 가는 작가만 골라 읽어도 된다는 거 아닐까 합니다. 취향이 다르실 수도 있어 조심스럽습니다만, '발자크 편'은 소리 내어 웃어가면서 정말 재미있게 읽은 목록이에요.
(앗, 감사합니다. 리뷰에 당선되었군요!)
 
왑샷 가문 연대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2
존 치버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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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는 기성 작가들이 '책을 말하는 책'에서 언급하는 걸 가끔 본 적은 있으나 그때마다 아, 이런 작가도 있구나, 하는 정도였을 뿐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작가였다.
프랑스를 제외하면 작가의 국적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지만 그래도 굳이 분류를 하자면 미국 작가의 소설은 '틈이 나면 읽어야지' 쪽이다. 그러니까 '틈을 내서 읽어야지'는 아닌 것인데 덧붙이면 나는 대체로 영국이나 독일, 동구권 출신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그리고 읽고 났을 때 깊은 감흥을 받는다. 그러니 그동안 치버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무래도 그가 미국 작가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거리의 문학'이라고도 하는 미국 문학은 읽다 보면 활동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곧잘 받는데 이런 느낌은 20세기 초-중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작가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고 물론 치버도 그렇다. 거기다 존 치버의 소설은 거의 풍속소설에 가깝다.
'교외의 체호프'라고 불리운다는 존 치버는 수십 편의 단편소설을 썼지만 장편소설은 겨우 다섯 편에 불과하다.
치버의 최초 장편소설『왑샷가문 연대기』를 읽은 감상은 체호프보다는 피츠제럴드에 더 가깝지 않은가 싶다. 구체적으로 풍경 등의 묘사가 두드러지는 1, 2부는 피츠제럴드를, 내용의 어조와 상관없이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 순간 순간 피식- 웃게 만드는 장면이 많았던 3부는 나보코프를 읽는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

소설 초반은 눈으로 문장 사이 사이에 '/'를 그어 가며 읽어야 할 정도로 겹치고 겹치는 복문이 성가시기도 했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니 그럭저럭 읽을만 하다.
『왑샷가문 연대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풍경 묘사인데 말 그대로 사진 한 장을 앞에 놓고 보는 듯 하다. 읽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것이 더 제격인 치버의 묘사는 시간과 공간, 사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하게 그려넣는 식인데 이를테면 이렇다.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트래버틴에서부터 이미 그 기차에 올라타 화장실에 숨어 있던 코벌리가 나와서 형과 함께 은 식기 공장을 지나고, "동물드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라는 전설적인 문구가 쓰여 있는 라킨 씨의 낡은 헛간을 지나고, 렘센스의 밭과 '선원의 집'을 지나고, 얼음 연못과 양모제 공장을 지나고, 틀림블 부인의 세탁소를 지나고, 9시 18분 기차가 덜컹거리며 창가를 지나갈 때 민스파이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을 먹는 브라운 씨의 집을 지나고, 하워드의 집과 타운센드의 집과 건널목과 공동묘지와 줄로 톱날을 세우던 노인의 집을 지나갔다. 노인의 집이 마을의 맨 마지막 집이었다. - p.142 

'연대기'라는 거창한 제목에 자칫 겁을 먹을만도 하나 가계도가 필수였던 마르께스의『백년동안의 고독』에 비하면 왑샷 가문의 가계는 아주 단촐하다. 게다가 전체 등장인물의 수는 수적으로는 많지만 모두 주변인물일 뿐, 실제 이야기는 리앤더의 두 아들 모지스와 코벌리를 쫓아가기 때문에 내용도 복잡하지 않다.
형인 모지스는 의지나 노력에 비해 일이 잘 풀리는, 운이 좋은 인물인 반면 치버 자신이 모델이기도 한 둘째 코벌리는 뭘 해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결국 풀리긴 하나 쉽게 갈 길도 어렵게 가는, 인물이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간 두 형제의 족적을 따라가는 중간 중간에 아버지 리앤더의 일기가 삽입되는 구성을 하고 있는 소설은 사건보다는 일상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한다. 즉 사건을 통해 인물이 드러나고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통해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이런 양식이 익숙하지 않으면 시종일관 건조하고 객관적인 작가의 어조가 자칫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약간의 인내심만 유지한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두꺼운 페이지 수가 얇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다음은 소설을 읽던 중에 웃고 말았던 한 대목.

모지스는 역까지 그녀의 가방들을 들고 가서 클리블랜드행 기차에 실어 주었다. 비어트리스가 그에게 우아하게 작별 키스를 하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 모지스, 내가 끔찍한 짓을 했어. 당신한테 꼭 말해야 할 것 같아. 그 사람들이 항상 사람들을 조사한다는 거 알지? 그러니까 누구한테나 당신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 것 말이야. 어느 날 오후에 어떤 남자가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그 사람한테 한참 동안 얘기를 늘어놓았어. 당신이 날 이용했고, 결혼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내 돈을 전부 가져가 버렸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내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이 날 부도덕한 여자로 생각했을 테니까. 미안해. 당신한테 나쁜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어." 이윽고 차장이 모두 승차했다고 외치자 기차가 클리블랜드를 향해 출발했다. - p.261 

내용의 뒷부분을 부연하면,
불쌍한 모지스는 비어트리스의 깜찍한 거짓말로 인해 직장에서 해고된다. 하지만 얼마 뒤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게 되니 모지스로서는 이 해프닝이 그리 비극도 그렇다고 그리 희극도 아니게 된 셈이다. 이러한 관조적 태도는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작가의 배경을 알고 나면 이 소설이 작가의 자서전이겠거니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현실과 많이 겹치는데 소설이 현실보다 덜 세속적인 것은 아마도 그의 심성 일면이 그러해서가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읽으면서 재미있는 소설이 있고, 읽고 나서 재미있는 소설이 있다. 어떤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도 재미를 못 느끼다 한참이나 지나서 문득 "그 소설 재미있었는데" 하기도 한다.『왑샷가문 연대기』는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다 읽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었어' 만족했던 소설이었다.

- 덧. 이 소설을 읽고난 후 그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그에게 붙여진 별명 그대로 '교외의 체호프'가 딱 어울린다고 공감하게 되었다. 한편,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그들 뒤로 펼쳐진 모든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를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은 치버의 서술을 읽으면서 장편이 딱인 것 같은 이 작가가 왜 대표적인 단편 작가가 된 것일까, 들었던 의문도 해소되었다. 단편소설로 퓰리처상을 받은 그의 이력이 충분히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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