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이스탄불
부르한 쇤메즈 지음, 고현석 옮김 / 황소자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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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우리가 고통 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고통 받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p.389

'부르한 쇤메즈'

책을 읽는 동안 종종, 그리고 책장을 덮고 나서 한 번 더. 버릇처럼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고 기억한다.


이 소설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듣고 싶은 얘기도 많고. 

내용과 형식 면에서 '소설'이라는 전통적인 정의에 걸맞는 소설을 읽은 지가 얼마인지 꼽아보게 하는 『이스탄불 이스탄불』. 읽는 내내 이토록 스토리텔링이 강한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에 감동했다.


책 소개에 '21세기 고전'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소설을 완독하고 나니 이 표현이 얼마나 적확한가 새삼 공감한다. 장담컨데 이 소설은 오래오래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회자되는 고전이 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렇게 되어야 하고.


소설이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너무 고통스럽다. 영상이나 이미지와 달리 텍스트가 구현하는 온갖 표현과 장면에는 비위가 무척 강한 편인데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 왜 세 손가락인가 하면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이 소설이 유일하진 않을 것이므로. 


모든 생명은 유한하기 때문에 고통에 내성이 없도록 태어났다. 고문은 그 고통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하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위정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도구이다. 아마 고문을 금하는 국제 조약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 모두가 다 알다시피 유명무실한 약속이다.


작가의 이력과 소설 속 배경으로 추측컨대 시기는 아마 2010년 대, 구체적으로 에르도안 집권 중반기 쯤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와 동시대 인물로 보인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고통스럽고 가슴 아팠던 이유 중에는 바로 이런 배경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소위 정치범으로 지하감옥에 갇힌 화자 네 명의 입을 통해 진행된다. 이들은 고문으로 극한에 몰린 육체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돌아가며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심문 중에 자신의 동료들 혹은 사랑하는 이들의 정보를 누설하지 않기 위하여 상상의 얘기만 나눈다.


『이스탄불 이스탄불』이 고전적인 소설 형식을 빌어왔다는 건 이런 전개 방식 때문이다. 


어떤 계기로 인하여 한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 상상 속 이야기를 나누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꼽는데 쇤메즈는 화자들의 입을 통해 보카치오를 대놓고 그것도 여러번 언급함으로써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소설적 형식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 


사실 나는 보카치오보다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를 떠올렸는데, 아마 이런 형식의 소설의 계보를 그린다면 '보카치오 - 초서 - 쇤메즈'이지 않을까. 사적 감상으로 내가 그리는 계보는 그러하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쇤메즈의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보카치오의 외형적 형식과 초서의 내형적 서술 구조가 문학적으로 진일보한 소설이라고 느꼈고 소설로도, 문학으로도 거의 완벽한 인상을 받았다. 스토리텔링, 서사 구조와 내러티브, 플롯 등 소설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독자의 오감을 충족시킨다. 이제 3월이지만 아마 올해 내가 읽은 그리고 이후 읽을 소설 중 최고의 소설일 것이 틀림없다.


목차는 첫째 날부터 열째 날까지 열흘로 나누어져 있고 씨줄과 날줄을 엮듯 화자들의 상상 이야기와 화자들의 사연이 플롯을 이루며 정교하게 서술된다. 작가의 대단한 점은, 화자들의 상상 이야기도 화자들의 현실 이야기도 모두 하나같이 문학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난지도에서 핀 이름없는 들꽃의 감동과 여운이 이렇지 않을까.


나의 애정은 데미르타이에서 의사로 다시 데미르타이로 넘나들었는데 결국 일격을 당한 건 이발사 카모에게서였다.

다음은 소설을 읽다가 전율했던 장면.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던 심문자는 손에 쥔 진압봉을 마치 장난감인 양 빙글빙글 돌리다가 위로 치켜들었다. 심문자는 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심문자가 치켜든 손을 한 번에 잡아챘다. 진압봉은 공중에 떴다. 심문자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p.120


'나의 오늘이 누군가는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라는 신파같은 아포리즘이 유독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스탄불 이스탄불』이 터키 현대사의 한 장면을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면의 주인공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펜의 힘'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쇤메즈는 한 권의 소설로 지구 다른 나라에서 터키와 무관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던 타국인인으로 하여금 터키의 현대사를 공부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정자들을 향한 저항과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게 했다.


소설은 작가 후기도, 역자 후기도 없이 바로 끝난다. 내겐 그것이 '이스탄불'에 대한 예의처럼 느껴졌다.


故신영복 선생이던가, 어느 정치인이던가. 사상범으로 수감되었다가 출소하고 몇 년 후 우연히 길에서 자신을 고문했던 당사자와 마주쳤는데 상대가 머쓱하게 웃으며 인사 비스무리하게 하고 지나치더라는 거다. 길에서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멱살을 쥐고 내게 왜 그랬냐고 악을 쓸 거라고 상상했는데 막상 마주치니 그냥 허무하고 기운이 빠지더라고.


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그건 마치 죄는 미워하고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일종의 면죄부처럼 느껴진다. 성선설, 성악설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악은 그냥 악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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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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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There is only good vodka and very good vodka. there is no such thing as bad vodka.”
(번역) ˝보드카 좋은 거, 아주 좋은 걸로 주시오.- 나쁜 보드카야말로 최악이지.˝

이쯤되면 번역이 아니라 창작이지.
완독하긴 했지만 읽는내내 읽는 게 의미가 있을까 씨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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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9-11-18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나쁜 번역이네요.

안녕하세요? 최근에 <최후의 증인> dvd를 사서 다른 알라디너들은 어떻게 보셨나 살피다 여까지 오게 됐어요. 반갑습니다.
 
수용소군도 세트 - 전6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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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안 작아요. 기존 열린책들 세계문학 판형보다 조금 더 큽니다. 가독성도 나쁘지 않아요. 다만 양장이 아닌 건 아쉽네요. 그리고 박스 내구성이 정말 별로예요. 뚜껑은 금방 떨어질 거 같고 박스 표면은 접착불량으로 우글거리고. 그래도 전권을 다시 출간해주신 열린책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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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네 인생의 이야기」

이 소설이 얘기하는 것은 결국 '시간'이다. 시간을 보는 관점, 시간을 통해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얘기한다.

 

1. 인과론적 해석 vs 목적론적 해석

하나의 결과물을 두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심리학은 보통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프로이트의 인과론적 해석과 아들러의 목적론적 해석인데, 인과론적 해석은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로 이어진다고 보고, 목적론적 해석은 현재의 목적이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관점이다.

  

2. 표의 문자 vs 표음 문자

'마음 먹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다.

관점을 바꾼다는 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는데 소설이 설정한 '시간'의 패러다임을 이해하려면 먼저 언어학에 대해 약간의 기본 지식이 필요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헵타포드의 언어와 인류의 언어는 표의문자표음문자로 대변된다.

 

어느날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7足(헵타포드) 생물 외계인과 대화를 하기 위해 언어학자 루이즈가 호출된다. 루이즈는 거대한 거울로 묘사되는 체경을 통해 헵타포드와 대화를 시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헵타포드의 문자는 말하자면 표의문자에 가깝다. 인류가 현재 사용하는 문자체계는 알다시피 음성에 기반한 음성+기호로 이루어진 표음문자다.

표의문자는 표식, 그림과 같이 직관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문자로 상형문자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듯 하다.

흔히 드는 예가 교통표지판인데 붉은 원 안에 붉은 사선이 그어져 있는 표식을 봤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진입금지'라고 해석한다. 기호를 보는 순간 뇌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읽는 과정 없이 바로 인지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같은 기호를 글자(인류 언어)로 표현해보자. 짧게는 '진입금지'부터 길게는 '여기서부터는 차량통행을 금지합니다'까지 표현할 수 있다. 언어의 궁극적인 목적이 의사소통에 있다고 할 때 그냥 단순비교로도 인간의 표의문자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고 낭비로 보인다. 

  

3. 사피어-워프 이론 vs 페르마 이론

헵타포드와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를 구분했다면 다음 단계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개의 이론인 사피어-워프 이론과 페르마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사피어-워프 이론 - 인간은 사용하는 언어의 영향을 받는다

페르마의 최적화 이론 -  빛이 표면에 도착하는 최단 거리

 

이 두 이론은 이 소설을 구성하는 처음과 끝이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로 소설 전반을 아우르는 핵심이다.

 

4. 언어와 인지

마지막으로 헵타포드의 언어와 인류의 언어의 차이를 보자.

 

헵타포드의 언어 - 동시적 체계, 목적론적 해석

인류의 언어 - 선형적/순차적 체계, 인과론적 해석

 

언어학자인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헵타포드의 언어를 익히게 되고 그것에 영향을 받아 기존에 갖고 있던 인류의 시간 개념이 깨어지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겪는다(사피어-워프 이론). 즉 과거-현재-미래를 순차적으로 나열하여 해석하는 선형적 체계,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에 이른다는 인과론적 태도에서 벗어나 헵타포드의 동시적, 목적론적 사고 체계를 체득하게 되는데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인지하게 되면서 루이즈에게 시제(時制)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루이즈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된다.

 

인류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시제(時制)의 틀 안에서 운용된다. 즉 '읽었다(과) - 읽는다(현) - 읽을 것이다(미)'로 이어지는데 이와 달리 헵타포드의 언어는 시제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한 덩어리 즉 동시적(同時的)으로 기능한다. 즉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과정 전체가 하나의 결과=목적이기(페르마 이론) 때문에 헵타포드의 사고 체계에서 시간은 연쇄적, 순차적으로 흐르지 않을 뿐더러 그것이 의미도 없다. 이것을 페르마 원리에 빗대면, 빛이 대기를 통과해 표면에 닿는 최단 거리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굴절 등의 우연적인 요소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특정 목표지점에 도착하도록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최종 목적인 최단 거리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소설에선 '목표는 이미 결정되었으며 남는 것은 최소와 최대라는 목적 뿐'이라고 표현한다(이 내용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등장하므로 페이지 표기는 생략합니다).

 

5. 결정론적 세계관

여기까지 전개하면 떠오르는 개념이 '결정론적 세계관'이다. 흔한 말로 '운명론적 태도'로 이미 결정지어진 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태도인데, 여담이지만 이쯤 이르면 뉴턴의 역학이론에서 출발해 아인슈타인 - 하이젠베르크 - 슈뢰딩거를 거쳐 다시 뉴턴인가 싶은 약간의 논리적인 비약의 유혹도 살짝 생긴다. 

 

궁금한 건 이러한 관점의 변화를 과연 낙관적, 긍정적인 태도로 볼 것인가인데, 일단 소설은 '인과적 해석'에서 '목적론적 해석'으로의 시간 패러다임의 전환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자신의 일생을 시작(탄생)과 끝(죽음)으로 연결된 하나의 사건으로 동시적으로 관조하는 루이즈의 변화는 비극이 예정된 미래를 성실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기실 이러한 관점이 긴 생애 동안 마주치게 될 비극을 받아들이는 데 긍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면 갈등도 고민도 없다.

 

6. '세월의 책'

소설은 미래를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식인 인과론적 태도와 목적론적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 '세월의 책'을 등장시킨다. 한 여자의 생애가 기록된 '세월의 책'이 있다. 여자는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 그녀가 하게 될 일을 미리 읽어본다. 그리고 그 날이 왔을 때, 그녀는 책에 적힌 대로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자유의지'이다.

이 딜레마가 재미있는 건 행동을 해도, 안 해도 이미 그녀의 자유의지는 박탈당했다는 관점이다. 왜냐하면 일어날 일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가 기본 상수로 이미 지정되었기 때문에 이후 그녀의 행동은 그 상수에 따른 결과일 뿐이고, 때문에 자유의지는 박탈되었다는 해석이 재미있다.

결론은, '자유의지'가 존재하려면 '세월의 책'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아니면 '세월의 책'을 읽지 않던가.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건 그 순간이 왔을 때 어떤 행동을 해도 or 안 해도 이미 자유의지로부터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즈는 말하자면 세월의 책을 읽은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생이 50년인 걸 알며 그 책의 결말이 자신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당연하다). 루이즈는 남편과 이혼할 것이고 이후에 딸이 산악 등반 중 추락으로 사망할 것을 안다. 하지만 루이즈는 이미 자신이 봤던 그 미래의 길을 간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하고 동시적, 목적론적 세계관을 터득한 루이즈에게 시간은 이제 의미가 없다. 인간에게 미래가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인데 루이즈에겐 그 미래가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 이미 일어난 과거에 연연하지 않듯 이미 알고 있는 미래도 의미가 달라진다. 미래를 아는 루이즈에겐 이혼도 딸을 잃는 것도 자신의 전 생애가 씌어진 50년 인생의 한 페이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루이즈에게 의미를 갖는 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7. 미래가 갖는 의미 

숙명은 뒤에서 다가오고, 운명은 앞에서 다가온다고 한다. 그리하여 숙명은 피할 수 없지만 운명은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점에선 굉장히 결정론적인 이야기다.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나는 그것을 미리 알고 있지만 바꿀 수 없고, 그리하여 정해진 미래로 간다는 것이니까.

여기서 본질적인 의문이 생긴다.

a. 미래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인가, 아직 내가 모르는 시간인가.

b.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이미 알고 있다면 그것은 미래인가 아닌가.

c. b가 미래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兩義的)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두 가지의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는 언술에 해당된다. 한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인류와 헵타포드들의 조상들이 처음으로 자의식의 불꽃을 획득했을 때는 양 종족 모두 동일한 물질 세계를 지각했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다. 궁극적인 세계관의 상이함은 이런 차이가 낳은 결과였다. 인류가 순차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킨 데에 비해, 헵타포드들은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켰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원인과 결과로 지각한다. 헵타포드들은 모든 사건들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 최대화라는 목적을.

(pp.188-189)

 

놀라운 점은 익숙하지 않은 물리학과 언어학의 개념을 황새 다리 쫓는 뱁새 심정으로 쫓아가던 와중에 책의 마지막 페이지, 정확하게는 조금 앞 부분의 '그릇을 사는 장면'을 읽으면서부터 고개를 갸웃(진짜 갸웃- 했다)하다 다시 지나간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겨가며 내용 전개 상의 시점을 재확인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어? 뭔가 좀 이상한데... 오독했나... 근데 아닌 것 같아... 어, 진짠가? 아닌가? 이런 과정을 거치고 세 번째 읽었을 때 작가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는 무의식 중에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는 순차적 시점으로 책 속 사건의 흐름을 의심 없이 쫓아갔던 것이다.

 

사족이지만 재미있는 점은, 스스로 좀 놀라운 깨달음이기도 한데, 나는 무의식 중에 루이즈에게 일어난 비극이 과거이길 바랐다는 점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다시 앞 부분을 뒤적거린 데는 그러한 바람이 컸다. 나는 이미 일어난 비극은 덜 슬프다고 생각한 것일까? 모르겠다. 남편과 이혼하고 딸을 사고로 잃은 개인사가 이미 발생한 과거이면 루이즈의 개인적 고통이 덜어지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앞서 액자식으로 등장했던 루이즈의 개인사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라는 엔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울러 이 저항심이 정확한 시제를 확인하고자 책을 여러 번 읽게 했던 동기이기도 하다.

 

 

8. 컨택트(원제: Arrival) by 드니 빌뵈브

 

 

국내에 들어오면서 현지 제목 'Arrival'이 'Contact'가 되었다. 영화의 주제와 크게 동떨어진 제목은 아니다. 제목을 고른 센스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굳이?' 하는 의문은 남는다.

 

책과 달리, 당연한가?, 상대적으로 영화는 헐리우드 상업영화의 키워드를 곳곳에 배치한 점이 많이 아쉽다. 이들 키워드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소영웅주의'인데 이를 위해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언어가 안 통하는 외계인과 전면전을 벌이려는 중국과 그에 동조하는 몇몇 국가들, 우주전쟁 카운트 직전 헵타포드의 언어를 완전히 깨우치면서 미래를 미리 본 루이즈가 직통전화로 중국의 수장을 설득하고 우주전쟁을 막는 것,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 목적은 3천 년 뒤 루이즈로 인한 도움을 받기 때문이라고 털어놓는 것 등등... 상업영화 마인드에 충실한 사족은 개연성을 떠나 그냥 좀 많이 오글거렸다.

 

SF소설을 영화화할 때 역시 가장 기대되는 부분은 텍스트로는 부족한 상상의 빈 부분을 영상으로 확인한다는 것일 텐데, 이 작품의 경우는 이를 테면 헵타포드A와 헵타포드B로 정의되는 헵타포드들의 언어 - 글자가 그에 해당한다. 그것이 원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하나의 원이 분화? 변이? 등등의 형태로 '± 나선' 구성인가 막연히 상상만 했던 것을 작가와 관련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영상으로 구현한 장면을 확인하는 건 책에서 얻을 수 없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아래 이미지 참고)

 

 

루이즈가 들고 있는 판넬의 이미지가 헵타포드의 언어다. 

 

대개 원작을 시나리오화 할 때 원작자의 자문을 받기 마련이고 <컨택트> 역시 작가가 자문을 하였으니만큼 작가의 의도가 왜곡될 리도 만무하다. 책이 은유와 암시를 반전의 묘미로 활용했다면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착각할만한) 효과로 루이즈가 미래를 보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건 루이즈의 미래를 보는 능력이 앞서 얘기한 '소영웅주의'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부분이다. 미래를 본 루이즈가 중국의 수장을 설득해 우주전쟁을 막는다니... 아, 이건 몇 번을 떠올려도 오글거린다.

 

쉽지 않은 내용이다. 머리는 이해하는데 적응이 안 될달까. 지구는 둥글다고 했을 때 16세기 이탈리아인들의 인지부조화가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

시간을 시제(時制)와 무관하게 총합의 결과물로만 인지하는 이러한 태도가 정말 낙관적인가? 글쎄. 잘 모르겠다.

 

 

알아도 그닥 쓸 데는 없지만 그래도 궁금한 의문.

- 봉감독이 이 영화를 연출했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까.

- 루이즈와 대화를 나누는 헵타포드 둘의 이름이 원작과 다르다. 왜?

- 원작이 있을 경우, 원작 - 영화 순으로 감상한다. 소설을 읽기 전에 영화를 먼저 봤다면 어떤 감상을 느꼈을까.

 

 

* 영화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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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해피엔딩 - 황경신 연애소설
황경신 지음, 허정은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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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1부 덜 사랑하는 자

2부 더 사랑하는 자

3부 모두에게 해피엔딩

 

 

예전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와 비의 엇갈린 연애가 안타까워서 애닳아하고 그것도 모자라 책을 덮은 뒤에도 이런 찜찜한 연애소설이라니, 괜히 읽었다는 후유증이 오래 갔다. 그리고 몇 년 만에 책장을 훑다가 문득 눈에 띄어서 다시 읽은 이 소설은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당황스럽다. 나와 에이와 비의 얘기는 더 이상 애틋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기 때문. 변한 게 있다면 아마 나일 거다. 정확히는 내 감성이 변한 것일 테다. 나이 들어 어릴 적 첫사랑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이 소설보다 재미있는 연애소설을 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첫사랑 연애담이 이 소설보다 훨씬 더 애틋하고 재미있으리라는 거.

 

중/고생 때 등교하지 않는 날은 집에서 케이블 채널의 영화를 보곤 했다. 그 중에 <풋사랑>이라는 한국영화가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1년 개봉작인데 출연자가 무려 나훈아, 문희, 노주현 되시겠다.

이 영화의 줄거리가 어떠한가 하니..., 여주가 남주1도 좋고 남주2도 좋고, 결국 두 남자 중 어느 한 사람을 선택할 수 없어 그냥 정신줄을 놓아버린다는 여주 멘붕 스토리. 천지 구분 못하던 시기임을 감안해도 도통 이해가 안 가는 결말이지만 그래도 풋사랑의 '풋'이 어떤 의미인지 어린 나이에도 개념 공부는 됐다.

 

갑자기 왜 거의 반 세기 전의 영화를 언급하는가 하면 영화 <풋사랑>의 연애소설 버전이『모두가 해피엔딩』이기 때문. 재미있는 건,『모두가 해피엔딩』을 몇 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땐 영화 <풋사랑>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는 거다. 그러니 변한 건 '나'다.


『모두가 해피엔딩』은 소제목을 길라잡이로 진행된다. 얜 너무 좋아서 못 가지겠고, 쟨 덜 좋아서 못 가지겠고, 에라 모르겠다 너(3의 인물)하고 놀아야겠다. 그럼 모두가 해피엔딩이지?... 가 줄거리.

 

우정이냐 사랑이냐, 이성과 친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황경신의 글에 일관되게 등장한다. 전형적인 십대 소녀감성인데, 그래서 이 소설은 연애소설 보다는 감성소설로 읽으면 차라리 속편하다.

정통소설이라기엔 글의 밀도가 약하고 오히려 장문의 아포리즘을 읽는 기분에 가까운데 이건 소설과 에세이를 경계 없이 쓰는 황경신의 글쓰기 방식에서 비롯된 걸로 보인다. 그렇다 보니 분명 소설인데 고백에세이와 차이가 안 느껴지는 부분도 분명 있다. 실상 노희경의 에세이『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의 몇몇 에피소드를 떠올려 보면 그거랑 이거랑 뭐가 달라? 싶기도 하다. 

나는 이런 쪽으로는 좀 고지식한 데가 있어 장르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작가의 애매모호한 글쓰기 방식은 좀처럼 응원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황경신의 글이 전반적으로 이런 형식을 고수하니 결국 황경신과 내가 맞지 않는 거다.

그럼 연애소설의 예를 들어봐라, 한다면 아마 드라마 작가 노희경 때문인가 싶지만 지금 막 떠오르는 건 김수현의『겨울로 가는 마차』. 이거 수애 주연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면 배우도 작가도 시청률도 대박날 텐데...는 아묻따 내 생각.

 

뭐 어쨌든,

영화 <풋사랑>은 결말이 공감은 안 가지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여주에게 동정적이기라도 했다면『모두가 해피엔딩』은 연애를 장기판으로 보고 에이와 비와 예술가를 장기말로 부리는 여주를 보는 기분이라 뒷맛이 영 찜찜하다. 마지막의 '모두가 해피엔딩이지' 하는 여주의 독백도 실상 여주에게만 해피엔딩일 뿐 그녀의 연애스토리에 들러리가 된 세 남자는 무슨 죄인가 싶다. 첫 독서 때 내 감성이 그토록 자극 받았던 건 아마 여주에 빙의했기 때문이 아닐까 반성해본다. 무려 세 남자에게서 사랑받는 여자라니, 게다가 세 남자 모두 여전히 선택지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결말이라니 한마디로 '여주만 좋지 아니한가' 결말인 거지. 

 

이 소설을 재독하기 전에 황경신의 신간 서너 권을 주문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았는데 소설을 읽고 나서 장바구니에서 뺐다. 그중『국경의 도서관』은 내 책장에 있는『초콜릿 우체국』의 두 번째 이야기라고 하니 조금 더 고민하고 장바구니에서 삭제했다. 처음 글자를 배우고 줄거리가 있는 소설이라는 걸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껏 변치않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안 읽히는 글은 안 읽는다라서.

최근 몇 년은 내 감성이 좀 심하게 메마른 사막이라 가끔 오아시스처럼 사막에 습기를 뿌려줄 감성충만한 글이 필요해- 위기의식을 느낄 때는 이런 류의 소설을 막 쓸어담는데 이번은 적절한 때에 브레이크가 걸린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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