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인간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나쓰메 소세키 외 지음, 정수윤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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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좋고. 안마. 여보세요.

손짓하는 억새풀. 저 뒤편에는 분명 무덤가가 있습니다.

길을 물으니, 여자는 벙어리였네, 메마른 들판.


나조차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이것저것 적혀 있다. 무슨 메모를 할 생각으로 적어둔 것일 텐데 나도 잘 모르겠다.


창밖에 검은 흙 사이로 바스락바스락 기어가는 못생긴 가을나비를 본다. 유별나게 튼튼해 죽지 않고 살았다. 결코 허무한 모습은 아니다. 라고 적혀 있다.


이걸 쓸 당시 나는 몹시 괴로웠다. 언제 쓴 것인지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여기선 밝히지 않겠다.


- p.183, 「아, 가을」


죽기 전에 온 힘을 다해 땀을 흘려보고 싶습니다.

그날그날을 가득 채워 살 것.


-p.189, 「그날그날을 가득 채워 살 것」


어떤 작가는 읽는 순간 아, 이건 누구의 글이구나 알게 된다. 그러니까 지문처럼 식별되는 자신만의 문장과 문체를 쓰는 작가가 있다. 이를테면 다자이 오사무처럼.


몇 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삼도천을 건너는데 성공한 다자이 오사무는, 사실 예전에는 막연히 염세주의, 허무주의에 발목을 잡힌 인간이려니 했다. 그러나 이번에 오랜만에 그의 산문을 읽으면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삶의 의미가 무거운 것과 삶의 의미를 못 느끼는 건 분명 의미가 다를텐데. 다자이 오사무가 죽음을 동경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별개로 삶을 가볍게 여긴 건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에게 삶은 너무 무거웠던 게 아닐까. 길가를 구르는 돌멩이와 나비에게 조차 삶의 편린을 보았던 그는 그저 가벼워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정부와 함께 아타미로 사랑의 도피를 떠났다. 그의 아내가 아이들 서넛을 데리고 아타미까지 쫓아와 한 여관에 투숙했다가 작심하고 아이들을 죽인 뒤 자살해버렸다. 한편, 남편과 정부도 그날 밤 다른 여관에서 동반자살했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몰랐고 남편도 아내와 아이들이 아타미까지 와서 다른 여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남편과 아내는 각기 상대에게 한 사람은 사과의 유서를 한 사람은 원망의 유서를 남기고 죽음을 맞았다.


-p.273, 「온천마을 엘레지」


아내는 남편의 사과를 듣지 못했고, 남편은 아내의 원망을 듣지 못했다.

아내에겐 불행, 남편에겐 다행일까.

혹은 용서할 권리를 빼앗긴 아내야말로 남편의 유서를 읽지 않아 다행이었을까.


26인 작가의 산문 중 가장 재미있었던 사카구치 안고의 『온천마을 엘레지』. 

제목이 아재 감성이라고 스킵하면 후회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지루한 구석 없이 다 재미있다. 작가의 입담이 장난 아닌데 말발이 워낙 좋아 필담과 입담을 구분하는 게 의미 없는 작가로 국내는 황석영 정도가 떠오른다. 음. 두 사람에게 조금 못 미치지만 김영하 작가도 끼워주자. 


이 책에 실린 사카구치 안고의 산문은 「온천마을 엘레지」한 편이지만 분량만 보면 다른 작가들의 산문 두, 세 편과 맞먹는다. 근데 분량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읽게 된다는 거. 일본의 유명 온천이 자살자들로 몸살을 앓는다는 간단한 소재에서 출발한 글은 자살의 메카가 된 온천에 얽힌 사건 사고와 유래를 물 흐르듯 막힘 없이 풀어간다. 


이 책은 북마크를 해두고 싶은 괜찮은 산문이 많지만 사카구치 안고의 산문 한 편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데 드는 유무형의 비용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오카모토 가노코는 감탄과 실망을 동시에 느꼈던 작가인데 「복숭아가 있는 풍경」에서 관능적인 문체로 사람을 홀리더니 「갈색의 구도」에선 어용 신문에 기고한 매문인가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실망스럽다.


눈 딱 감고 복사꽃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게 잊혔다. 교태롭게 해쓱한 연분홍빛 선비가 기모노와 피부를 투과해 미각에 상쾌한 차가움을 전했다. 그 미각을 맛보는 혀가 신체의 어느 부위에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맛이 느껴졌다. 이 복숭아종이 흡사 사람 이름처럼 '덴주로'였다는 게 생각나 우스워졌다. 나는 아하하 소리를 내 웃었다.


-p. 240,「복숭아가 있는 풍경」 오카모토 가노코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독일 베를린 유학 시기 불교 사원에서 만난 독일인 학생과 나눈 대화는(「갈색의 구도」) 일본 특유의 정서인 교조적인 상황 전개가 너무 전형적이라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나 뜨악스럽다. 특히 현실에 혼란을 느껴 방황하는 와중에 붓다에게 흥미를 가지게 된 독일인 대학생이 작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장면은, 나아가 작가가 헤세의 '싯다르타'를 추천하는 장면에 이르면 뭐라 덧붙일 의욕조차 사라진다. 뭐. 본인이 그랬다는데 그랬겠지. 그래.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하여튼 나는 부끄러웠다.


오카모토 가노코의 「복숭아가 있는 풍경」과 가지이 모토지로의「벚나무 아래는」은 미문(美文)과 현학적인 글의 차이를 비교하기에 좋은 예다. 미문은 오감을 글자를 훑는 눈에 집중하게 하는 반면 현학적인 글은 문장이 눈을 통해 뇌로 전달되기도 전에 글자 위에서 눈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맥락인데 미문은 하나의 소재 혹은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면 현학문은 소재, 주제 같은 글감보다 단어 자체의 개념을 쫓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부사와 형용사가 지나치게 많아 맥락을 잃기 십상이다. 그러니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뭔 소리를 하는 거야'가 되는 거고.


벚나무 아래는 시체가 묻혀 있다!

이 말은 믿어도 된다. 왜냐고? 그렇지 않고서야 벚꽃이 그렇게 아름답게 필 수 있을까. 나는 믿을 수 없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요 며칠 불안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겨우 알게 되었다. 벚나무 아래는 시체가 묻혀 있다. 이 말은 믿어도 된다.


-p.294, 「벚나무 아래는」 가지이 모토지로


발췌는 산문의 첫 대목인데 읽으면서 와, 감각적! 했던 감탄은 다음 문단으로, 또 다음 문단으로 넘어갈수록 점점 피로해진다. 불과 다섯 페이지 분량인데 첫 문단을 빼곤 뭘 읽었는지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아쉽다.


가자이 모토지로의 약력에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문체로 주목받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의 글을 보면 수긍이 가는 평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글이라는 건 문체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서. 

문학이 타인과 소통하는 매개는 글자인데 출구 없는 미로 같은 문장이라면 독자를 따돌리는 방백과 뭐가 다른가. 






『슬픈 인간』에 실린 작가들의 생몰은 대개 19세기 전후에 걸쳐 있다. 그러니까 근대사와 떼놓을 수 없는 연대인데 신기할 정도로 관련 내용을 주제나 소재로 다룬 산문이 없다. 소설도 아니고 산문인데도. 


그나마 고바야시 다키지의「감방수필」에서 동시대 세태를 엿볼수 있는데 다음은 읽으면서 좀...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던 대목.


옆방에는 조선인 동지가 있었다. 우린 가끔 서신을 통해서나, 운동이나 목욕을 다녀오는 길에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고향의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도쿄에서 비합법운동을 하다 잡혀왔기에, 동지들도 그가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에게 뭘 넣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미결수인데도 파란 옷을 입고 파란 이불에서 잤다. 내 경우는 가끔 가족들이 필요한 물건도 넣어주고 과일이나 과자도 살 수 있었지만, 이 조선인 동지는 한번도 밖에서 누가 뭘 넣어준 흔적이 없었고 물건을 사는 법도 없었다. 특히 여기서는 어디서 누가 무슨 물건을 받고 샀는지 훤히 알 수 있어서, 내 물건이 들어올 때마다 옆방 동지 생각에 맘이 쓰였다.

언젠가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간수의 눈을 피해 그의 독방 문을 두드리며,

"괜찮나? 아픈 데는 없나?"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안에서,

"괜찮소."

조선인답게 또록또록한 발음으로 대답을 해준 적이 있었다.

그 옆방 동지가 이불을 꺼내며 무슨 말인가를 했다. 문득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니, 이불만 시켜주지 말고, 인간도 햇볕을 쬐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닌가. ㅡ나는 엉겁결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가 아까 한 말을 듣고 곧바로 조직적으로 뒤를 이어준 것이다!

"뭐야, 아까 18번방이 하는 소릴 들은 거냐? 니들한텐 진짜 질렸다."

보라! 나는 생각했다 ㅡ동지란 이런 것이다!

나는 발로 바닥을 쿵쿵 구르며 응원했다.


-pp.159-161, 「감방수필」 


소설이 아니라 산문이다. 다키지의 옆방 조선인은 어떻게 됏을까. 바깥에선 그가 투옥된 걸 아무도 모른다고 하니 조선인의 이후 행로를 짚어보려니 여러모로 심란하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게공선』의 작가인데 그의 생몰연대가 1903-1933 이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자로 노동자들의 실상을 폭로하는 작품을 쓰고 노동 투쟁에 앞섰으나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던 중 서른 살에 사망했다.






앞서 언급했던 19세기 전후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산문에 근대사를 다룬 내용이 없어 묘하다 했는데 책은 마지막에 가서야 근대사를 직접적으로 다룬 하라 다마키의 산문 두 개를 내놓는다.


나는 그때 살아 있었다. 죽지는 않았다. 갑작스레 암흑이 머리 위로 쏟아져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그때 나는 나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머리 위로 부서진 파편들이 떨어졌다. 하지만 훨씬 더 엄청난 것에 두드려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스쳐갔다. 어마어마한 속도가 내 안을 훑었다. 그때부터 나는 '갑자기'라는 말이 기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지상으로 내팽개쳐진 인간이었다. ……그날 밤 일을 떠올려본다. 히로시마의 거리는 밤에도 내내 불타고 있었다. 나는 강가 자갈밭에 모로 누워 사람들 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어떻게 될까. 다들 판단이 서지 않는 가운데 이상한 고요함이 있었다. 아마도 지구는 파멸할 것이고 인류에게는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데서 오는, 이상한 고요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둑한 가운데 부상자와 피난민이 한가득 웅크리고 있었다. 내 바로 옆에 웅크린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육안으론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로 그 사람의 인격을 알 것 같았다.

"아저씨 옆에 꼭 붙어 있어. 아저씨 옆에 있으면 괜찮아."

남자는 같이 있는 아이를 안심시키며 반복해서 말했다.

"길 잃은 아이인데 어제부터 제 곁에 붙어서 걷고 있습니다."

나는 남자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내팽개쳐졌다는 격앙된 감정 속에 길 잃은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이도 남자도 그리고 나도 모두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속에 내팽개쳐 있었다. 그러니 그 순간 세계가 소멸한다 해도 내게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는 소멸하지 않았다. 날이 밝았지만, 나는 다시 참극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 후로 길 잃은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남자가 정말로 아이를 보호하고 구해주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남자와 헤어져 외톨이가 됐을까.


-pp.310-311, 『불의 아이』


늘 궁금했다. 일본 국민은 왜 일본 정부를 향해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앉는가. 뿐더러 당시의 위정자들은 세습을 거쳐 21세기 일본을 여전히 통치하고 있다. 전후(戰後) 독일과 다른 노선을 선택한 일본의 행보는 종종 청산되지 않은 전범국의 무덤을 보는 기분이 든다. 독일 대학생에게 헤세의 소설을 추천하고 학생의 미래를 걱정하는 오카모토 가노코의 산문이 일종의 모욕에 가까운 희비극을 느끼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독은 대기 중에 녹아버린 듯하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 속눈썹에 눈물이 고여 있던 너……. 손에 박힌 가시를 바늘 끝으로 빼주시던 어머니……. 사소한, 너무도 사소한 사건이, 아무도 없는 지금에서야 내 안으로 둥실 떠오른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이가 아픈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죽은 네가 나타났다.

"어디가 아파?"

너는 손끝으로 내 이를 빙그르 문질렀다. 그 손가락의 감촉에 눈을 떴을 때, 통증은 사라져 있었다.


-p.331. 『염원의 나라』


이곳은 내가 자주 다니는 철도 건널목인데 차단기가 내려오면 여기서 한동안 기다리곤 한다. 전차는 니시오기쿠보 방면에서 오거나 기치조지역에서 온다. 전차가 다가오면 철로가 상하로 확실히 흔들리며 움직인다. 전차는 쌩하니 전속력으로 이곳을 지나쳐 간다. 나는 그 속도에 어쩐지 가슴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든다. 전속력으로나의 인생을 스쳐가는 사람을 나는 부러워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더욱 초연한 눈빛으로 이 선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인간 세상에 부대끼며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을 쳐도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곳으로 떠밀려 넘어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언제나 이 선로 부근을 서성이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잠겨 건널목에 우뚝 서 있는 나, ……나의 그림자도 어느새 이 선로 주변을 서성이는 것은 아닐까. 


-pp.332-333, 『염원의 나라』


『염원의 나라』는 「1951년 무사시노시」라는 부제로 시작한다.

1905년에 출생한 하라 다마키는 1951년 기치조지역의 철로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작가의 이런 이력을 알고 읽어서일까. 『염원의 나라』는 작가의 유언처럼 느껴진다.


목록에 제목이 안 보여서 표제 『슬픈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가 궁금했는데 아마 하라 다마키의 『불의 아이』에 등장하는 친구의 묘사에서 따온 듯 싶다.


"그러니까 이런 일도 있었어. 내가 아이 때 장난을 쳐서 아버지가 벌로 두 손을 줄로 묶고 벽장 속에 가둬버렸지. 잠시 후 내가 벽장 속에서 울음을 터뜨렸는데 묶였던 끈이 풀렸으니 다시 묶어달라고 운 거였네. 세상에 이렇게 슬픈 아이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내가 그 시절 막연히 그 친구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건, 그 친구 안에 존재하는 남달리 슬픈 인간의 모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p.322, 『불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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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26인의 산문으로 꽉 채워진 『슬픈 인간』은 읽고 나서 한껏 포만감이 들었던 한 권이었다.

일본문학으로 국한하자면 20세기 초반, 구체적으로 1950년 이전 출생 작가들의 글이 여전히 취향임을 확인했고.


그중 특히 좋았던 산문은 의식흐름을 따라 들고 나는 서정적인 문장이 돋보이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의 스미다 강」, 재미있는 글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카구치 안고 「온천의 엘레지」, 그리고 여러가지로 인상적인 다카무라 고타로 「촉각의 세계」. 특히 「촉각의 세계」는 제목부터도 그러하지만 조각가가 글을 쓰면 이런 촉각적인 문장이 나오는구나 신기했다. 마지막으로, 묵직한 문장의 울림이 깊고 무거웠던 하라 다마키의 산문은 가끔 기억날 것 같다.


주례사 비평이 미덕인 듯 상식인 듯 보편화된 업계의 전통에 비추어 책 표지를 장식하는 유명 작가들의 추천사에 눈길을 주지 않은지도 오래 되었는데 『슬픈 인간』은 허은실 시인이 남긴 추천사도 버릴 데가 없다.


어떤 밤엔, 저물녘 새의 예감으로 떨리는 글이었다. 

어떤 날엔 속눈썹에 묻은 눈물 같은 글이었다. 책을 덮고 먼데를 자주 바라보았다. 어떤 글은 위태로운 아름다움으로 아슬아슬해서, 저자의 생애를 앞질러 들추어보고는 아득해졌다(하략…) 

- 허은실 시인

『슬픈 인간』을 읽노라니 같은 시대를 살았던 국내 문인 51인의 산문을 엮은 방민호 교수의 『모던 수필』이 떠오른다. 향연에서 출간된 이 책은 『모단 에쎄이』로 제목을 바꾸어 다른 출판사에서 복간되었다. 시대 배경의 영향이겠지만 오래 전에 읽었던 『모던 수필』과 이번에 읽은 『슬픈 인간』은 여러모로 복합적인 감상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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