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너져 내리다 : 피츠제럴드 단편선 ㅣ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7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보영 옮김 / 이소노미아 / 2020년 5월
평점 :
"아, 왜요? 제가 즐거워 보이지 않나요?"
"바로 1분 전에 당신이 창밖을 바라보는 걸 봤어요. 몸을 떨던데."
"그냥 저의 상상이었어요." 샐리 캐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전 모든 걸 밖에서 해결하는 데 익숙해져 있나 봐요. 가끔씩 밖을 보는데 눈발이 날리는 걸 보면 마치 죽은 것들이 움직이는 것 같아요."
p.132,「얼음궁전」
이하, 목차별 간단 리뷰
「무너져 내리다」
자신의 처지를 토로한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를 발표한 후 작가로서 명성이 추락하고 몇 달 뒤 뉴욕포스트의 인터뷰로 세간의 조롱을 받았다(p.103, 최민석 『피츠제럴드』)는 일화는 거의 한 세기 전에 일어난 일인데도 마음이 불편했다. 피츠제럴드가 오늘만 사는 욜로족처럼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다고는 하나 본인이 정직하게 번 돈을 본인이 쓰고 싶은 대로 썼는데 그게 조롱받고 욕 먹을 일인가 싶은 거다. 사회 현안에 입 꾹 닫고 본인 사생활만 챙겼다고 한들 실망하고 무시하면 말 일이지 '너는 왜'라고 비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결과와 책임은 온전히 본인 몫인데. 실제로 피츠제럴드는 젊은 시절 방탕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치렀다.
업계는 물론이고 피츠제럴드 까기에 빠질 수 없는 헤밍웨이도 여성스럽다고 비난했다는 「무너져 내리다'(The crack up)」의 경우 하루키처럼 나 역시 인상적으로 읽었던 터라 이 에세이를 둘러싼 후일담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17년 중 1년은 일부러 빈둥거리고 쉬면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일이라면 그저 내일의 멋진 기대감을 갖는 것뿐인 나날들이 이어졌지요. 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49세까지는 괜찮을 거야. 그건 확실해. 나처럼 사는 사람이 그 정도는 기대할 수 있지, 뭐."라고 말입니다.
ㅡ그런데 마흔아홉을 십 년 앞두고 갑자기 내가 이미 무너져 내렸음을 깨달았습니다.
-p.24
13년 뒤엔 뉴욕으로 돌아와 새로운 경험을 할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미래를 상상하던 1932년의 피츠제럴드는('나의 잃어버린 도시'-『재즈시대의 메아리』), 성공한 작가로 또다시 도약하고자 의지를 불태웠던 1935년의 피츠제럴드는, 1940년 LA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미완의 원고를 남기고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피츠제럴드는 마흔네 살이었다.
참고로 나는 '무너져 내리다(Crack up)'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느 작가의 오후』 수록 버전 '망가지다'도 읽었는데 판본이 다른가 싶을 정도로 두 책의 번역이 다르다.
「머리와 어깨」
타고난 천재성이 가리키는 인생의 항로에서 벗어나 사랑을 선택한 열여덟 천재가 뒤늦게 자신이 버리고 포기한 삶의 가치와 크기를 깨닫고 충격받는 장면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사는 동안 두 갈래 길을 만나고, 고민하고, 그 중 하나의 길을 걷는다. 가다가 틀렸다고 생각되면 되돌아오면 되겠지 생각하지만 운명은 인간에게 기회비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원래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못 담그는 게 인생의 냉혹한 진리다.
「얼음궁전」
소설을 읽다 문득, 피츠제럴드가 잘 제련된 문장을 쓴다고 생각했던 단편이다. 내용은 가치관과 환경이 다른 남녀가 그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실패한 사랑이야기인데 약혼자를 만나러 겨울에 들어선 북부 도시에 간 남부 태생인 샐리 캐롤이 느끼는 고립감과 외로움이 생생하다. 눈 폭풍, 고드름을 매단 차가운 흉벽, 그리고 '얼음 궁전'. 샐리 캐롤이 약혼자를 놓치고 낙오된 채 미로처럼 엉킨 동굴 속에서 헤매는 장면은 18세기 고딕소설의 기시감을 불러오는데 피츠제럴드는 스릴러도 잘 쓰는구나 했다. 아울러 백 수십 편이 넘는 단편을 쓴 작가의 저력을 너무 얕봤다는 반성도 했고.
「버니스 단발로 자르다」
피츠제럴드가 생전에 쓴 단편이 160여 편에 이른다고 하니 섣부른 얘기일수도 있다만 내가 읽은 범위로 한정할 때 가장 유쾌하고 위트 넘치는 소설이었다. 성향이 정 반대인 버니스와 마저리는 사촌간인데 버니스가 한 달 일정으로 마저리가 사는 작은 도시에서 머무는 동안 일어난 소동을 다룬다. 말하자면 마을의 인플루언서인 마저리는 작은 계기로 고루하고 지루한 버니스의 착장과 애티튜드에 참견하고 사촌의 충고를 받아들인 버니스는 파티의 월플라워에서 한순간에 인기인이 된다. 심지어 오랫동안 마저리에게 구애를 보내던 이웃 남자마저 버니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것처럼 보이는)데 이쯤되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할 것이다. 여자라면.
나로 말하면 '마저리 요나쁜뇬' 도끼눈을 뾰족하게 세우다 '그래 버니스! 그거지!' 깔깔 웃으며 버니스를 응원했다. 역시 '미덕의 불운'보다 '악덕의 번영'인가.
나는 재미있거나 괴상한 소설을 읽으면 거의 대부분 M에게 공유하는데 이 단편도 마찬가지. 그리고 덧붙였다. "남자들은 이해 못하는 여자들만의 정치가 있어." 그런데 피츠제럴드가 여성 심리를 소재로 소설을 쓴다. 그냥 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잘' 쓴다. '버니스 단발'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피츠제럴드의 소설 전반이 그렇다.
「겨울 꿈」
미인을 보면서 스물네 시간 아름답다고 감탄하지 않는 것처럼 소설을 읽으면서 매번 잘 쓰는구나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문득 '아, 잘 쓰네' 할 때가 있는데 '겨울 꿈'이 그랬다. 개츠비 군집 류인데 피츠제럴드의 '개츠비 식 사랑 이야기'를 읽는 건 한겨울 정오에 아주 잠깐 눈부신 햇살이 지상을 비출 때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흔한 돌조각에 그 빛이 닿아 반짝 빛나는 순간을 목도하는 기분이 든다.
피츠제럴드가 써내려가는 소설 속 여성은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도록 섬세하고 예민하고 예쁘다. 뿐만아니라 당당하고 자립적이고 도전적이다. 다만 한 가지, 변덕스럽다. 그리고 이 변덕이 그녀들을 사랑하는 남자들을 절망에 빠트리고 이별로 이끈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남자에겐 재앙의 도래인 것이다.
M.프루스트는 인간에게 중요한 건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 자체라는 말을 했지만 적어도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 남성에게 중요한 건 '대상'인 것 같다. 오직 데이지여야만 하고, 잔퀼이어야만 하고, 마샤여야만 하고, 주디 심스여야만 한다. 결국 개츠비 식 로맨스는 사랑의 대상이 원인이고 목적이고 결과여서 일어나는 비극의 전과정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시 찾은 바빌론」
자전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다 보니 소설에 등장하는 찰리와 오노리어가 피츠제럴드와 딸 스코티인가 싶기도 하다. 비록 인물은 허구일지 모르겠으나 미국 호황기와 붕괴를 함께 했던 인간 군상이나 동시대 파리 스케치 등은 확실히 경험에서 빌어다 쓴 것으로 보인다.
줄거리는 1920년 대 미국 호황기가 불려준 재산으로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아내를 잃고 알콜중독으로 쓰러졌던 찰리가 과거를 청산하고 처형 부부에게서 사랑하는 딸 오노리어의 양육권을 되찾고자 하는 얘기다.
개인적으로 피츠제럴드의 작가로서의 재능을 만끽할 수 있는 단편으로 꼽는다. 주 플롯만 보면 「바람 속의 가족」(『어느 작가의 오후』)과 일면 겹치는데, 과거의 과오를 딛고 손상된 현재를 회복하고자 하는 찰리와 그런 찰리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과거 잔재들의 악의가 벌이는 줄다리기가 의외로 치열해서 그 과정의 긴장감이 상당하다. 단편임에도 읽는 도중에 엔딩을 확인했을 정도.
「잃어버린 10년」
'버니스 단발로 자르다'가 재미있어서 두 번 읽었다면 '잃어버린 10년'은 순식간에 지나간 풍경을 다시 확인하는 기분으로 두 번 읽었다. 거의 엽편에 가까운, 매우 짧은 길이의 단편인데 두 번 읽어도 지나간 풍경에 뭐가 있었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그저 극 중 화자의 대사로 '그렇구나' 미루어 짐작할 뿐. 어쩌면 단지 '풍경' 그게 전부였는지도 모르고.
:::
「구니스 단발로 자르다」「겨울 꿈」을 읽고 이 책을 주변에 추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책 후면- 이 책의 기획과 편집을 한 두 사람의 대화형 후기를 읽고 한차례 꺾이는데 특히 편집자 마담쿠는, 이 사람은 뭘까 싶었다. 그래도 피츠제럴드와 소설은 죄가 없으니까 추천함.
안 읽은 소설을 중심으로 피츠제럴드 도장깨기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밤은 부드러워라』 한 권을 남겨두고 있는데 피츠제럴드는 읽으면 읽을수록 독특한 작가, 문제적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장편을 비롯해 단편 몇 권을 읽을 때는 '개츠비 군집'에 치여 남주 직업과 여주 이름만 다른 일일드라마를 보는 기분에 회의도 들었는데 이는 피츠제럴드가 무려 160여 편의 단편소설을 쓴 작가라는 사실을 간과한 섣부른 생각이었고, 개츠비 군집을 헤치고 만나는 단편은 피츠제럴드가 다양한 얘기를 썼음을 알려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츠제럴드의 전형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다른 단편을 읽고 싶은 욕심이 든다
개인 취향으로 앞서 읽었던 『'어느 작가의 오후』보다 『무너져 내리다』의 목록이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