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 전21권 세트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읽은 날. 2008/09  

 

1. 개인적인 완독 감상은, 역사소설로는 부족하지만 연애소설로는 괜찮았다. 

2. 1, 2부는 훌륭하다. 이야기를 엮어 내는 힘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고 이야기의 응집력도 대단하다. 생명력이 넘치는 등장인물들의 면면은 누구 하나 버리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굉장한 감정이입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지문과 대사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이 당연한 얘기를 왜 언급하는가 하면 3부를 지나 4부에 이르면 대사와 지문의 역할에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실험성이나 독창성 등의 작가의 '새로운 시도'로 이해할 범위를 넘어선다.

3. 3, 4부에선 지문과 대사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데(다행히 5부에선 한결 깔끔해진다) 그중에서도 지문이 대사인지, 대사가 지문인지 구분하기 힘든 장면과 마주칠 때는 적잖이 당황스럽다. 소설 속에서 대사란 인물과 인물 간에 주고 받는 것이 규칙이다. 그러나『토지』에서는 한 사람의 대사가 지문이나 상대방의 말줄임표 없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장면이 몇 있다.  

4. 심지어 5부에 들어서면 느닷없이 ‘독자는 기억하는가’ 운운 작가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그렇지 않아도 5부는 양현과 영광, 오가다와 인실의 사랑 때문에 통속극의 분위기가 짙은데 거기에 변사의 역할을 하는 작가의 지문이 등장하니 당황스럽다. 다행히 이런 지문은 한 번만 등장한다.

5. 문장의 호응에 문제가 있는 단락이 여러 권에 걸쳐 나타난다. 특히 ‘그러나’ ‘그래서’ 등의 등위접속사의 쓰임이 적확하지 못하여 어색한 문장이 많은데 다음은 14권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과거지사는 어찌 되었건 윤필구는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 당시는 부친인 윤 도집 그늘에 가려 있었지만, 그는 동학의 골수분자다. 비록 육임(六任)의 제삼위인 도집이 직책이나 상당한 지식과 뛰어난 지략가이기도 했었던 부친에 비하여, 지략은 떨어지나 학문의 깊이는 부친을 훨씬 능가하여 동학경전에 투철하다. (p.134)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기예학교의 여선생이 항의편지를 냈다 하여 만나자 한 것은 조용하의 경우 파격적인 처사라 아니 할 수 없다. 불미스럽고 참혹한 사건, 그것은 인실이 담임하고 있는 반에는 방직공장 여공 아이가 서너 명 있었다. 그 중의 박차순(朴次順)이라는 아이가 방직공장 창고에 끌려가서 감독으로부터 추행을 당하려다 심히 반항을 하여 팔이 부러졌던 것이다. (p.329) 

6. 출판사 편집부의 오역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어이없는 오탈자가 몇 군데 있다. 한 예로 지문 말미에 느닷없이 쌍따옴표가 등장하고(p.232, 13권 첫 줄), 반대로 대사가 끝나는 자리에 응당 있어야 할 쌍따옴표가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7.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중과거에 대한 논란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란으로 보인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인 만큼 변화하고 진화하는 유기적인 속성을 가진다. 잘 안 쓰거나, 사용하지 않거나, 낡은 언어는 이미 죽은 언어다. 중요한 건 이중과거든 영어식이든 일본식이든 우리말(=한글) 체계는 그것을 모두 수용할 수 있고, 또한 한글이기 때문에 '안 먹는다'도 '먹지 않는다'도, '먹었다'도 '먹었었다'도 모두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은 이렇듯 우수하고 위대하고 최고로 멋진 문화 유산이다.

8. 평사리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1, 2부에 비해 3, 4부는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항일단체(혹은 항일운동가들),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고 암중모색하는 동학잔당, 서울에 모여든 신지식인 등이 전면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들이 둘 이상만 모이면 술상을 앞에 놓고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탁상공론식 설전(舌戰)을 늘어놓기 바쁘다는 것인데, 그들이 늘어놓는 장광설은 툭하면 길을 잃고 헤매는가 하면 중구난방에 결론도 없이 흐지부지 흩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나마도 장광설의 주인공이 (지문을 통해 설명되듯)스스로도 습관적으로 얘기를 늘어놓는 것일 뿐 생각은 다른 데 가 있거나,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나’ 회의를 느끼기까지 한다. 강조하지만 장광설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맥락도 없고 요체도 애매한 대동소이한 내용의 장광설이 거듭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이 문제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여러 번 들으면 지겨운 법이다.
더 나쁜 것은 3부 중반쯤부터 나타나는 '다음 중 틀린 문장을 고르시오' 하면 답으로 고르기에 딱 안성맞춤인 요상한 문장 구조다.『토지』에 쏟아지는 문학적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이러한 비문들은 심심하면 등장하는 장광설만큼이나 독서를 피곤하게 한다.

9. 13권. 서울역에서 우연히 명희를 만난 조찬하가 명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집에 도착해서, 그리고 그의 방에서 잠들기 직전까지 무려 13페이지에 걸쳐 조선인과 일본인의 민족적 자의식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pp.176 - 188) 이 장면은 리얼리스트가 어떻게 신비주의와 동일한 개념이 되는지 논리의 비약을 보여준다. 

10. 16권 후반부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무라가미가 병문안을 온 오가다에게 하는 니체의 초인 관련 대사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pp.351-352, 16권) 작가가 지문을 통해 따로 언급하지 않으면 독자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작가의 목소리(=주장)겠거니 생각하기 마련이다.
대사에 등장하는 니체의 초인(超人)은 일본식 한자 조어의 예를 그대로 수용한 어휘인데 한자어를 그대로 풀이하여 받아 들였다가는 자칫 오류를 범하는 낭패를 피할 수 없다. 흔히 어휘는 개념의 집이라고 한다. 물론 ‘초인=超人=초월적 인간’이라는 어휘를 가지고 위버멘쉬 개념을 이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겠다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이런 부분은 작가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11. 소설속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인식에 관하여.
토지와 민족자본을 수탈당하던 일제강점기의 그 어려웠다던 시절이 무색하게, 정작 평사리 사람들은 교육과 자산에서 성공을 이루고 거기에 신분의 상승까지 이루는 성공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 '대체적이었던' 것처럼 보여지는데, 이는 조정래가『태백산맥』『아리랑』등을 통해 농한기에 굶주리며 마름에게까지 수탈 당하고 핍박받는 농민과 고리대금의 덫에 빠져 각종 부역에 팔려가는 농민들을 통해 헐벗은 시대를 조명했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특히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가 우리 민족 자본 수탈로 이어진 전형적인 한 예인 광산 열풍이 조준구의 몰락이라는 개인사에 머물고 마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소설의 시작과 끝인 1897~1945년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시기를 배경으로 삼는 대하소설에서 작가의 짤막한 서술과 야무네와 석이네 정도를 제외하면 식민지 조국의 역사적, 시대적 고단함을 전달할 매개체=민중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12. 민족주의에 대한 작가의 시각(파시즘을 경계하는)이 재미있고 이범호, 강두매를 통해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명백히 드러내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13. (8의 장광설에 이어)얘기가 쌓여갈수록, 뒷 편으로 갈수록 중언부언하는 장면이 잦다. 특히 석이가 조준구의 모함으로 왜경에게 붙잡혀 가는 아버지(한조)의 신발을 손에 쥐고 쫓아가는 장면은 석이의 회상과 석이를 기억하는 혹은 석이와 마주친 평사리 사람들의 회상과 대사를 통해 여러 번 등장한다. 이 장면이 어린 한복이 함안의 외가에서 평사리로 돌아오던 장면과 함께 손에 꼽을 정도로 마음이 짠한 대목인 건 사실이지만(이 장면 역시 몇 차례 '언급'된다) 과유불급이라, 아무래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14. 마지막 21권은, 앞서 등장했던 장면들이 페이지를 통째 옮긴 듯 고스란히 다시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동진이 만주로 떠나기 전 최치수를 찾는 장면, 조병수가 별당의 서희를 훔쳐보는 것을 발견하고 화를 내는 길상, 오가다와 외조카 시게루가 환국의 얘기를 나누는 장면, 오가다와 조찬하가 별장에서 제문식과 설전을 벌이는 장면 등이다. 이중에는 두 번 이상 등장하는 장면도 있다.

15. 600-700여 명에 달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토지』에서 나를 사로잡은 인물은 단연 김 환 혹은 구천이다. 소설이나 드라마와 같은 픽션 속 인물은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떼어 놓고 바라보게 되는 객관적인 거리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환은 그 거리를 단숨에 부수고 시시각각 지면 밖으로 튀어나와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더 할 수 없이 입체적이고 극적이며 복잡다단한 면모를 지닌 환은 아마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 가장 뜨겁고, 가장 메마르고, 내면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인물일 것이 틀림없다. 환이 내뿜는 생생한 생명력은 그에게 동시성까지 느끼게 한다. 이야기 속에 머무는 인물이 갖는 구체성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생각하게 하는 문제적 인물이다.
환의 죽음이 등장하는 부분에 이르렀을 때, 미리 알고 있었던 그래서 읽는 동안 내내 그 순간이 언제 올까 두려워했던 그 장면은 막상 더 없이 담백한 작가의 한 줄로 정리되었다. 마흔 줄에 들어선 강쇠가 어린아이처럼 “으흐흐흣-” 울음을 터뜨릴 때는 나도 함께 울고 싶었다.
불륜과 패륜 그리고 동학의 후예로서 자신에게 남겨진 사명과 소명 그 모든 업보를 짊어지고도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남자는 비록 소설이라도 흔치 않다.

16.『토지』전반에 걸쳐 가장 아쉬운 인물은 김길상이다. 조준구로부터 평사리의 토지와 집을 되찾은 서희가 용정에서 평사리, 정확하게는 진주로 돌아온 뒤 용정에 혼자 남은 길상의 행보가 영 오리무중이다. 계명회 모임이 화근이 되어 진주로 압송된 뒤 2년간 옥살이를 하고 풀려난 뒤에도 마찬가지. 등장하는 분량의 길고 짧음이 문제가 아니라 서희와 혼인 이후 길상이라는 인물 자체가 본연의 힘과 빛을 현저하게 잃은 느낌이다. 특히 2부 마지막에서 용정에서 서희와 헤어진 후 3부에 들어서면서부터 길상이라는 인물이 소설 속에서 차지하는 역학적 위치는 급속도로 힘이 빠져 버렸다.

17.『토지』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요인물 중 여성의 경우 사랑 혹은 애정과 관련되었을 때 일정한 전형성을 보인다. (공통점이 아니다) 
『토지』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들, 그 중에서도 윤 씨 부인 - 최서희 - 임명희 - 유인실 - 이양현으로 이어지는 세대교체 중 가장 매력이 떨어지는 인물은 역시 양현이다. 윤 씨 부인과 서희는 가문에 집착하는 의지적 인물로, 명희는 가부장주의와 신문물 사이에서 방황하는 신여성으로, 인실은 사회주의에 경도된 독립운동가로 각자 정체성의 뿌리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안팎과 부단히 싸우는 반면 양현은 자신의 뿌리를 지키려는 자존심 강한 여성도 아닌, 그렇다고 시대의 불행을 고민하는 신념을 가진 여성도 아닌 말하자면 관상용 꽃에 가까운 인물이다. 예쁜 꽃받침 위에서 사랑받는 조화보다 하수구 옆에 핀 이름 없는 들꽃이라도 생명이 있는 것이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당연하다.

18. 땅을 목숨처럼 알고 땅과 더불어 사는 민중은 잡초마냥 강하다. 그러나 그 자식들, 소위 신식물을 먹고 사상과 신분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진 다음 세대에 이르면 그들 부모가 보여주었던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 대신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무기력하고 패배주의적이며 현실도피적인 모습을 보인다.  

19. 대하소설『토지』를 이끄는 힘은 민족 정기의 고양을 부르짖는 혁명가, 식자들이 펼치는 그들만의 논리·사상·주의·고민 같은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의 터전를 꿋꿋이 지켜내며 민족적 정취를 유감없이 뿜어내는 평사리의 농민들에게 있다. 그런 점에서 스토리텔링이 강한 1, 2부에 비해 3, 4, 5부가 겉도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야기를 지탱하는 인물들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싶다. 1부 혹은 2부에서 끝을 맺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3부에서라도. 3, 4,(5)부가 구성상 앞선 이야기의 연속성을 잇기 위해 혹은 완성하기 위해 과연 불가결한 전개였는가 의문이 든다.

20. 작가와 독자, 출판사가 모두 동시대를 살면서도 그래서 완간 이후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책 여기저기서 적지 않게 발견되는 오자(誤字)는 물론 문법적 문장구조의 문제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3부 중반을 넘어 4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작가가 어지간히 글을 쓰기 싫었나, 생각이 들만큼 뭉텅뭉텅 아무렇게나 잘려나간 문장의 어미, 오자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마침표와 쉼표를 아무렇게나 혼용한 것, 지문이 충분하지 못하여 화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한 대사, 기본 문법을 아무 이유 없이 무시한 문장들, 색인이 귀찮을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호응이 엉망인 문장, (심지어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회상 장면의 잦은 반복, 작가의 역사적 현실 인식을 읽어내기에 여러모로 부족하게 느껴지는 시대 구현에 이르기까지 아직 남은 과제가 많아 보인다. 그리하여 마지막 장을 덮고 책을 책장에 꽂은 뒤 가장 많이 든 생각은『토지』의 문학적 성취가 아니라 우리나라 문단과 문인들이 그와 그의 소설에 얼마나 많은 짐을 지우고 있는 것인가, 하는 거였다. 

분량 때문에 대하소설 읽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친구들이 꽤 있다. 사실 첫 권을 잡는 것이 어렵지, 근데 이건 어느 책이나 마찬가지다, 막상 시작하면 의외로 마지막 권까지 한 호흡으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이 또한 대하소설이다. 대하소설의 특성상 긴 흐름을 유지하는 요소들 즉 인물은 인물로, 사건은 사건으로 이어지는 극의 연속성이 독서를 지탱해주기 때문인데, 더군다나『토지』는 공중파에서 여러 차례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탓에 드라마를 봤든 안 봤든, 소설을 읽었든 안 읽었든 대중들에게 서희·길상은 한 번쯤 들어 본 낯익은 이름이 되었고, 어린 계집아이 서희의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 테야!”는 어느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이 눈을 부릅뜨고 읊조리던 “부셔버릴 거야!” 만큼이나 유명한 대사다.

모든 소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 소설은 ‘소설을 읽는 관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따라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느끼는 재미와 감동의 영역이 달라진다. 때문에 한 권의 소설을 누구는 연애소설로, 누구는 역사소설로, 또 누구는 사회고발소설로 읽기도 한다. 대하소설『토지』역시 수없이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또 그 인물들의 수만큼 많은 이야기가 펼쳐지므로 읽는 관점이 다양하다.
막대한 재산을 두고 벌이는 친인척간의 암투. 빼앗긴 토지를 되찾으려는 집념 강한 한 여성의 일대기. 일제강점기 찢어진 산하에서 버티고 살아 남는 민족혼. 만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항일투사들과 민족의 산하에 남아 민족의 정기를 지키려는 동학 잔당들. 일제 강점기 친일파와 민중들 사이에 벌어지는 민족적 갈등. 그 외 기타 등등... 

이렇듯 한 권의 소설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과 선택이겠으나 내가 읽은『토지』의 이야기의 근간은 독립 운동도 아니요 동학 운동도 아니요 그렇다고 민중의 이야기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게『토지』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나는 서슴없이 ‘연애사건’이라고 하겠다.『토지』는 숱한 인물들이 벌이는 연애사건을 빼고는 얘기가 안 되는 소설이다. 

언젠가 인터넷에 떠돌았던 우스개 소리처럼 그들은 동학운동을 하면서 사랑을 하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랑을 하고, 신지식과 아나키즘을 부르짖으며 사랑을 하고, 예술을 하면서도 사랑을 한다. 평사리에서도 사랑을 하고, 진주에서도 서울에서도, 용정 만주 상하이 일본에서도 사랑을 한다. 특이한 것은 주요인물로 범위를 좁혔을 때 정상적인 사랑을 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다 보니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불륜은 예사고 때로 패륜도 등장한다. 연애사건의 백미인 삼각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그냥 ‘Love’도 아닌 ‘Love affair’다. 이건 박경리 작가의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왜곡된 사랑’의 형태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런 점 때문에 소설『토지』의 통속성이 유난히 부각되는 것은 사실이다. * 통속성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의미 그대로 통속적이라는 뜻이다.

연애사건의 주인공들 외관이 평범해서야 아니 될 말이다. 그랬다간 이야기의 재미와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할 터, 당연히『토지』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귀골의 선남선녀다. 그중 연애소설의 통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들이 이양현과 송영광인데 이 두 사람은 단연 돋보이는 아름다운 얼굴과 예민한 감성, 그것에 어울리는 상처를 지닌 인물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정체성은 각자 양어머니 최서희, 아버지 송관수에 기대고 있어 막상 그들 본연으로는 이야기를 끌고 가거나 지배할 힘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즉 그들 자체로는 존재감도 없고 매력도 없다는 얘기인데, 그들의 아픔, 상처, 방황, 사랑에 썩 공감하거나 연민을 느끼기가 힘드니 그들에게는 안 된 일이다.

『토지』에는 환(구천)과 별당 아씨, 용과 월선, 서희와 길상-상현, 상현과 명희-기화(봉순), 인실과 오가다, 양현과 영광은 물론 오송과 선혜, 인옥과 상길, 몽치와 모화에 이르기까지 따로 떼어내도 한 편의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나올 것 같은 인물들이 많다. 이들 중 인옥과 상길은, 물론 둘 다 큰 상처를 극복한 후이긴 하지만 등장인물들 중 드물게 슬며시 웃음이 나게 했던 귀여운 중년 커플이어서 기억에 남고, 이야기가 좀 더 있었으면 싶었던 이들은 몽치(박재수)-모화였다. 양현과 영광처럼 아름다운 외모도 아닌, 뛰어난 예술적 감성을 가진 것도 아닌 하물며 등장하는 장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아름답고 청초한 수선화 같은 양현과 영광에게 질릴 즈음 등장한 이들은 토지 후반부를 읽는 동안 내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이 두 사람에 관해 잠깐 부연하면, 모화는 첫 결혼 실패 후 아들과 노모를 데리고 통영의 뱃사람을 상대로 술 장사를 하는 강인한 심지를 가진 여성이다. 결혼 전력, 딸린 식구 거기에 나이마저 연상인 자신의 주제로는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몽치의 청혼을 뿌리치는 모화와 그런 모화에게 사정하고 화내고 빌다가 나중에는 두들겨 팬 끝에 ‘혼인은 안 하지만 동거는 하겠다’는 대답을 받아내는 몽치. 결국 소원하던 합가를 이룬 뒤 몽치는 장가들었다 하고, 모화는 같이 산다고 하니 일견 김유정 식 해학을 느끼게 한다. 한편 몽치는 환의 죽음 이후 근근히 명맥을 잇는 동학 모임에서는 또다른 일면을 드러내는데 어린 나이에 깊은 산중에서 죽은 아비의 곁에서 밤을 지샌 이력이 있는 몽치는 동물적인 직관을 지닌 인물로 얼핏 환을 잇는 면모가 보인다. 

내게『토지』세트를 선물한 이는 M군이다. 평균 하루 한 권 꼴로 읽은『토지』는 책을 읽는 이십여일 동안 1부 2부 3부 4부 그리고 5부로 진행될수록 그것과 비례해서 M군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는 횟수도 늘어갔다. 내가 혼자 롤러코스터처럼 떠드는 동안 비록 대꾸는 없었지만, 가끔 짜증도 냈지만, 어쨌든 묵묵히 그 많은 불평을 들어준 M군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누군가에게 쏟아내지 못했더라면 독서가 훨씬 지루해지고 편협해졌을 것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M군이 어릴 때 읽었다는 임어당(=린위탕)의『북경호일』얘기를 해 준 적이 있는데 그때 인상적인 얘기를 했다. 어린 나이에도『북경호일』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과연 이들이 행복했을까, 했다는 것이다. M군이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주인공들을 괴롭히던 시대가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라고 했다.『토지』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그들은 그후 행복했을까...

해방 소식을 들으며 기뻐하는 평사리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휘감고 있던 쇠사슬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를 듣는 서희의 모습에서 끝나는 이 긴 이야기는 그러나 그대로 조정래의『태백산맥』의 시대로 이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직전까지도 헐리우드에서 영화화할만큼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코드를 지닌 가벼운 장르소설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핑계를 대자면 이는 영화 포스터 일부를 띠지로 두른 출판사 쪽의 책임도 일부 있다. 장르소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경우 그 동안의 독서 경험으로 장르소설은 아무래도 줄거리 중심으로, 본격소설은 줄거리 자체보다는 행간에 담긴 상징적 함의에 주의하면서 읽게 된다. 이는 경험에 의한 상대적 구분일 뿐 부연하면 장르냐 본격이냐의 분류와 상관없이 대개 처음 몇 페이지를 읽는 중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독서의 차이가 생겨난다.

『더 리더』는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고 1부는 두 사람의 만남과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게 되는 과정, 2부는 몇 년 후 법대생이 된 미하엘이 사라진 한나와 재회하고 한나의 비밀을 눈치채는 내용, 3부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재회하기까지 그들의 모습을 다룬다. 

나로 하여금 생각이 복잡해지게 만든 건 2부에 들어서면서다.『더 리더』는 내용이 진행될수록 내가 막연히 짐작한 것처럼 재회한 두 사람의 갈등이 부딪치고 해소되는 과정이 아닌, 미하엘과 한나가 그들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태도'의 문제로 다가왔다. 한나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가, 진실을 알고 있는 미하엘은 왜 판단을 미루고 시종일관 모호하게 구는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을 들키는 수치심이 학살에 가까운 수많은 죽음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 누명을 쓰는 수치심보다 더 강하다는 것인가. 사적 수치심이 공적 수치심보다 더 강하다는 건가.
비슷한 경험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런데 언뜻 간단해 보이는 이 문제가 미하엘이 친구들에게 답을 얻고자 시도하는 장면에 이르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예민하고 민감한 주제가 아닌가, 앞서의 판단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당시에 친구들과 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시도했다. 한번 생각해봐. 어떤 사람이 고의로 자신을 망치고 있어. 그런데 네가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입장이야. 그러면 너 그 사람을 구하겠니? 어느 환자가 수술을 받으려고 하는데 말야, 그 환자가 약물 복용자야. 그런데 그 약물이 마취에 방해가 돼. 그렇지만 환자는 자신이 약물 복용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것을 마취 전문 의사에게 말하려고 들지 않아. 너는 마취 전문 의사와 의논하겠니? 한번 생각해봐. 어떤 사람이 재판을 받는데 말야. 그 사람이 자신이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입장이야. 범행은 오른손잡이의 짓이기 때문에 그는 범인이 아닌 거야.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이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어. 너라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판사에게 말하겠니? 그 사람이 동성연애자라고 생각해봐. 그런데 그 범행은 동성연애자가 저지를 가능성이 없는 거야.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해. 피고가 자신이 왼손잡이라든가 동성연애자라든가 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계제가 아니야. 그런데도 피고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봐. - pp.148-149 

미하엘은 그녀의 자존심과 진실 사이에서 고민하지만 좀처럼 대답을 찾지 못하고 철학교수인 아버지를 찾는다. 친구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묻는 미하엘에게 아버지가 내놓은 것은 '품위'와 '자유'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리고 "당사자와 직접 얘기해 볼 것"을 조언한다.

이런 류의 소설은 읽는 내내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난감한 숙제를 남겨 놓는다. 이를테면 나치 당원이었던 그녀의 손을 거쳐간 수많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동정해야 하는가,라는. 그녀가 느끼는 수치심과 그녀의 자존심을 이해하는 한편 어쨌든 가해자인 그녀를 '그때는 무지했으니까' 라는 이유로 동정하거나 용서하고 싶지 않은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결국 바보처럼 훌쩍이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작가의 힘이다) 

소설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문맹을 떨쳐 낸 후의 한나의 변화다. 재판 과정에서 한나가 반응하는 방식을 '그녀는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다'라고 그녀의 무지가 문맹에서 비롯된 것임을 꿰뚫는 미하엘의 독백이 의미심장하다. 마침내 읽고 쓰는 것을 배웠을 때 그리하여 한 때 자신이 속했던 역사의 일부를 직시하게 되었을 때(=무지에서 벗어났을 때) 한나의 세상은 과연 희망적이었을까?

'읽고, 쓴다'.
공기를 호흡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겼던 이 사소한 행위에 대해 올해 들어 참 많이 생각하게 된다.
짧은 홍보 문구만 보면 얼핏 어린 소년과 중년 여성의 엽기적인 사랑이야기쯤일까 싶지만『더 리더』는 한나의 문맹과 미하엘의 침묵을 통해 독일이 계속 안고 갈 수밖에 없는 과거 나치 역사를 현재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역사에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라는 전후 세대의 갈등과 고민을 다룬 진지한 소설이다.

읽는 내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기억에 남는 독서였다.

3분의 2쯤 읽었을 때, 그리고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미하엘이 친구들에게 물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나도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이 단지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고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의 책임을 지려고 해. 그런데 너는 그것을 알고 있어.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친구의 대답은, 중요한 건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가이고 본인이 그것을 원한다면 3자가 끼어들고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였다. 나는, 그 사람의 판단이 올바른 상황에서 정당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럼 진실을 알면서도 그냥 방관해야 한다는 것이냐,고 친구의 의견에 재차 반론에 반론을 거듭하였는데 순순히 친구의 대답에 수긍하기가 힘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6 때, 담임선생님은 곧잘 반 아이들을 반으로 나누고 절반은 질문만, 다른 절반은 대답만 쪽지에 적어내게 했다. 그런 다음 무작위로 질문지 한 장, 답변지 한 장을 골라 맞춰 보게 했는데 아무렇게나 적어낸 질문과 대답이 일부러 맞춘 것처럼 그렇게 용하게 잘 들어 맞을 수가 없었다. 물론 전혀 얼토당토 않은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신기할 정도로 아귀가 잘 맞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
질문 : 선생님이 화나면?
대답 :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소설은 미디어 언론이 사실을 어떻게 왜곡하고 그것을 권력화하여 어떤 식으로 한 개인과 그의 주변을 파멸로 몰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책의 무게가 사뭇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40여년 전 독일에서 일어난 일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벌어지고 있어서일 것이다. 유시민 교수님이 작년 어느 강연에서 이 소설을 추천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소설을 반쯤 읽었을 때였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 한 언론사 기자가 젊은 여성에게 살해된다. 기자를 살해한 직후 여성은 자수한다. 사정은 이렇다. 크리스마스 시즌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남자와 사랑에 빠진 카타리나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다. 사실 남자는 지명수배자였고 감시당하던 중이었다. 아침이 되자 경찰이 아파트에 들이닥치고 남자를 놓친 경찰은 카타리나를 심문한다. 이 과정을 <차이퉁>이라는 한 신문사가 특종을 내세워 실시간 보도하면서 카타리나는 남자의 정부였다가 공범 테러리스트였다가 급기야 사회전복을 꿈꾸는 '빨갱이'가 된다. 뿐만 아니라 <차이퉁>은 카타리나를 지지하고 그녀를 도우려는 주변인들에게까지 보도를 확대하여 그들의 사회적 도덕적 윤리를 비웃고 의심하며 그들의 일상을 위협한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사실만 보도하고 있는 '대부분'의 신문들을 보여주며 위로하는 친구에게 카타리나가 반문한다.

"대체 누가 이걸 읽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차이퉁》을 읽거든요!" - p.96 

진실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을 규명하기는 몹시 어려워도 그것을 왜곡하기는 너무나 간단하고 쉽다.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전, 미국 의회에서부터 시작된 매카시즘이 한 때 미국 전체를 뒤흔들었을 때, 그리고 해방과 분단을 겪은 직후 남한이 폐허가 되었을 때, 미워하는 누군가를 없애고 싶으면 한 가지만 있으면 됐다. 바로 검지다. 검지로 누군가의 뒤통수를 가리키기만 하면 되었다. "저 사람이에요!"

미디어는 순수하지 않다. 오히려 교활하다. 미디어는 방심한 대중 속으로 교묘하게 파고들어 의심과 불신의 씨를 뿌려둔다. 일단 뿌려만 두면 씨는 저절로 싹을 틔우는데 이때부터 미디어는 프로파간다(선동)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신문과 뉴스로 대변되는 '언론'을 향한 대중의 충성심이나 신뢰는 언제나 절대적이다. '뉴스에서 그랬어' '기자가 그랬어' 이 한 마디면 콩을 팥이라고 해도 대중들은 (의심하면서도) 일단은 믿는다.
언론을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 과연 옳은 일일까?
지면을 채우는 상업 광고가 곧 수익이 되는 언론은 당연히 광고주의 입김을 받는다. 언론사 사주와 사주의 직원들(=기자)에게 최우선하는 관심사는 회사의 이익 실현에 있으며 언론인의 사명, 진실 규명, 휴머니즘 따위는 모두 그 다음의 일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이런 현실에서 언론이 특정 권력에 예속되는 것, 혹은 그 자체로 권력화되는 것은 정말이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그는 블룸 부인에게 사실들을 들이댔지만, 그녀가 괴텐을 전혀 몰랐던 탓에 모든 것을 이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차이퉁》에는 이렇게 썼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블룸 부인의 진술을 다소 바꾼 것에 대해 그는 기자로서 '단순한 사람들의 표현을 도우려는 생각에서 그랬고, 자신은 그런 데 익숙하다고 해명했다. - p.107 

소설을 읽다 보면 활자체가 두꺼운 단어와 마주칠 때가 있는데 이런 부분은 한층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구분하고자 할 때 단어 선택의 범위는 한층 좁아지고 민감한 문제가 되는데 '의사'(意思)를 표현하는 행위에는 사용하는 단어뿐 아니라 말하는 이의 어조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미디어 프로파간다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유롭게, 다양하게 전개되어야 할 대중의 심리를 미디어 당사자의 주관적이고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앞세워 언제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염소몰이하듯 몰아갈 수 있다. 물론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중의 결론을 그들이 원하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소설 출간으로부터 10년 후에 쓰여진 작가 후기, 역자 해설까지 꼼꼼히 정독해볼만 하다.
가독성도 좋고, 흡인력도 상당하여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꼭 일독해 볼 것을 권하고 싶은 소설.

덧.
소설을 읽고 얼마 안 되어 '덫에 걸린 외계인을 박제해서 보관해왔다는' 한 독일인의 기사가 인터넷에 뜬 것을 읽었는데, 출처가 '빌트'지(=소설속 '차이퉁'지)인 것을 확인하고 "에이~"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이 기사는 해프닝으로 밝혀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하도 너도 나도 흔하게 남발하는 ‘반전’이라 "에게, 또?"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파이 이야기』에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반전’이 정말로 등장한다. 마지막 십 여 페이지에 이르면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영화《식스 센스》의 감독이 영화화 한다니 대충 짐작이 간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하는 부모, 형과 함께 살던 소년 파이는 가족과 함께 (동물원은 팔고, 북미 동물원과 매매 계약이 된 동물들을 데리고) 캐나다 이민길에 오른다. 하지만 도중에 그만 그들이 타고 있던 화물선이 침몰되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소설은 난파 이후 파이가 겪게 되는 227일간의 이야기이다. 그 227일 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화물선의 침몰 이후 혼자 살아남은 파이는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을 가진 몸무게 200kg이 넘는 벵갈 호랑이, 다리를 다친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과 함께 구명 보트를 타고 태평양 한 복판에서 표류한다.  

목차는 ‘작가 노트’와 1, 2, 3 부 그리고 ‘역자 후기’ 다섯 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 번째 목차인 ‘작가노트’부터가 소설의 시작이다. 나는 ‘작가노트’가 말 그대로의 작가의 얘기인 줄 알고 읽었는데 이 부분은 사실 조금 지루했다. 

하지만 ‘작가노트’를 지나 두 번째 목차 ‘토론토와 폰디체리’의 약 30여 페이지 정도가 지날 무렵 등장하는, 파이가 왜 ‘피신’이라는 본명을 놔두고 ‘파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는지의 배경과 파이가 각각 이슬람, 카톨릭, 힌두의 세 종교를 수용하는 사연이 펼쳐지면서부터 소설은 재기발랄해지고 재치가 넘친다. 이 때부터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래도 역시 재미있는 부분은 본격적인 태평양 표류기인 세 번째 목차 ‘태평양’이다. 책을 보지 않고 바로 영화를 봐도 재미있으리란 기대를 해 본다. 물론 감독이 각색을 얼마나 잘 했는가가 중요하겠다. 

소설을 읽을 때 의외의 장애물은 ‘구명보트’의 묘사 부분이었다. 도무지 구명 보트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서 몰입을 방해했다. 특히 ‘방수포’에 대한 정보가 절실했는데 이 부분이 해결되고부터는 수월하게 읽은 셈이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소설의 미덕은 읽는 동안 내내 '신(神)'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이다. 참 묘하기도 하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파이가 세 개의 종교를 가지는 이야기가 잠깐 등장하긴 해도『파이 이야기』는 어느 모로 보나 '신(神)'에 대해서, 종교에 대해서, 구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설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내 이야기를 들으면, 젊은이는 신을 믿게 될 거요." - p.10

이것이 바로 작가의 힘이다. 산을 설명하기 위해 산을 다 묘사할 필요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