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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초6 때, 담임선생님은 곧잘 반 아이들을 반으로 나누고 절반은 질문만, 다른 절반은 대답만 쪽지에 적어내게 했다. 그런 다음 무작위로 질문지 한 장, 답변지 한 장을 골라 맞춰 보게 했는데 아무렇게나 적어낸 질문과 대답이 일부러 맞춘 것처럼 그렇게 용하게 잘 들어 맞을 수가 없었다. 물론 전혀 얼토당토 않은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신기할 정도로 아귀가 잘 맞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
질문 : 선생님이 화나면?
대답 :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소설은 미디어 언론이 사실을 어떻게 왜곡하고 그것을 권력화하여 어떤 식으로 한 개인과 그의 주변을 파멸로 몰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책의 무게가 사뭇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40여년 전 독일에서 일어난 일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벌어지고 있어서일 것이다. 유시민 교수님이 작년 어느 강연에서 이 소설을 추천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소설을 반쯤 읽었을 때였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 한 언론사 기자가 젊은 여성에게 살해된다. 기자를 살해한 직후 여성은 자수한다. 사정은 이렇다. 크리스마스 시즌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남자와 사랑에 빠진 카타리나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다. 사실 남자는 지명수배자였고 감시당하던 중이었다. 아침이 되자 경찰이 아파트에 들이닥치고 남자를 놓친 경찰은 카타리나를 심문한다. 이 과정을 <차이퉁>이라는 한 신문사가 특종을 내세워 실시간 보도하면서 카타리나는 남자의 정부였다가 공범 테러리스트였다가 급기야 사회전복을 꿈꾸는 '빨갱이'가 된다. 뿐만 아니라 <차이퉁>은 카타리나를 지지하고 그녀를 도우려는 주변인들에게까지 보도를 확대하여 그들의 사회적 도덕적 윤리를 비웃고 의심하며 그들의 일상을 위협한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사실만 보도하고 있는 '대부분'의 신문들을 보여주며 위로하는 친구에게 카타리나가 반문한다.
"대체 누가 이걸 읽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차이퉁》을 읽거든요!" - p.96
진실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을 규명하기는 몹시 어려워도 그것을 왜곡하기는 너무나 간단하고 쉽다.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전, 미국 의회에서부터 시작된 매카시즘이 한 때 미국 전체를 뒤흔들었을 때, 그리고 해방과 분단을 겪은 직후 남한이 폐허가 되었을 때, 미워하는 누군가를 없애고 싶으면 한 가지만 있으면 됐다. 바로 검지다. 검지로 누군가의 뒤통수를 가리키기만 하면 되었다. "저 사람이에요!"
미디어는 순수하지 않다. 오히려 교활하다. 미디어는 방심한 대중 속으로 교묘하게 파고들어 의심과 불신의 씨를 뿌려둔다. 일단 뿌려만 두면 씨는 저절로 싹을 틔우는데 이때부터 미디어는 프로파간다(선동)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신문과 뉴스로 대변되는 '언론'을 향한 대중의 충성심이나 신뢰는 언제나 절대적이다. '뉴스에서 그랬어' '기자가 그랬어' 이 한 마디면 콩을 팥이라고 해도 대중들은 (의심하면서도) 일단은 믿는다.
언론을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 과연 옳은 일일까?
지면을 채우는 상업 광고가 곧 수익이 되는 언론은 당연히 광고주의 입김을 받는다. 언론사 사주와 사주의 직원들(=기자)에게 최우선하는 관심사는 회사의 이익 실현에 있으며 언론인의 사명, 진실 규명, 휴머니즘 따위는 모두 그 다음의 일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이런 현실에서 언론이 특정 권력에 예속되는 것, 혹은 그 자체로 권력화되는 것은 정말이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그는 블룸 부인에게 사실들을 들이댔지만, 그녀가 괴텐을 전혀 몰랐던 탓에 모든 것을 이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차이퉁》에는 이렇게 썼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블룸 부인의 진술을 다소 바꾼 것에 대해 그는 기자로서 '단순한 사람들의 표현을 도우려는 생각에서 그랬고, 자신은 그런 데 익숙하다고 해명했다. - p.107
소설을 읽다 보면 활자체가 두꺼운 단어와 마주칠 때가 있는데 이런 부분은 한층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구분하고자 할 때 단어 선택의 범위는 한층 좁아지고 민감한 문제가 되는데 '의사'(意思)를 표현하는 행위에는 사용하는 단어뿐 아니라 말하는 이의 어조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미디어 프로파간다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유롭게, 다양하게 전개되어야 할 대중의 심리를 미디어 당사자의 주관적이고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앞세워 언제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염소몰이하듯 몰아갈 수 있다. 물론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중의 결론을 그들이 원하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소설 출간으로부터 10년 후에 쓰여진 작가 후기, 역자 해설까지 꼼꼼히 정독해볼만 하다.
가독성도 좋고, 흡인력도 상당하여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꼭 일독해 볼 것을 권하고 싶은 소설.
덧.
소설을 읽고 얼마 안 되어 '덫에 걸린 외계인을 박제해서 보관해왔다는' 한 독일인의 기사가 인터넷에 뜬 것을 읽었는데, 출처가 '빌트'지(=소설속 '차이퉁'지)인 것을 확인하고 "에이~"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이 기사는 해프닝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