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책중엔 누구나 다 알지만 의외로 읽은 이는 별로 없는 책이 있다.『삼국지』가 바로 그런 책이다.
나 역시『삼국지』에 등장한 많은 인물들의 면면은 물론이고 그들이 치룬 전투에 대해서도 꽤 제법 알지만 막상 책은 읽지 않았다. 지나치게 잘 아는 이야기는 스스로도 내가 이 책을 읽었나 싶게 익숙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기회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삼국지』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8, 9년쯤 된 것 같다. 당시 내가 제일 재미있게 했던 컴퓨터 게임은 공명전이었다.
공명전은 주인공 공명과 (삼국지의 내용에 의해 간혹 전투에서 빠지기도 하지만)유비, 관우, 장비 기본 옵션에 데리고 있는 군사들 중 필요한 인물들을 골라 조조와 손권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전형적인 롤플레잉 게임인데, 게임을 하는 동안 내 군사들 중 가장 레벨이 높은 인물은 단연 조운(자룡)이었다. 내 일방적인 애정을 받은 조운은 역사의 주인공들인 유비, 관우, 장비보다도 더 레벨이 높았고 매 전투마다 발군의 전투력을 발휘, 승전보를 올렸다.
그렇다고 편애하는 장군을 계속 내보낼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조조나 손권 같은 적장들의 레벨은 당연히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전투를 봐가면서 맞붙여야지 안 그러면 애꿎은 장수만 잃는다. -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게임을 넘기면 다시 살아난다
즉 나관중의『삼국지연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삼국지』의 내용을 꿰고 있으면 전투에서 보다 훨씬 수월하게 이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적벽전을 치를 때 조조에게 관우를 맞붙이면 전투를 싱거울 정도로 쉽게 끝낼 수 있다. 한편으론 관우가 조조에게 진 빚을 잊지 못하고 조조를 놓아준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관우 넌 이번 적벽전투에선 제발 빠져!' 해봤자 소용 없다. 역사를 바꿀 순 없으므로 싫든 좋든 관우를 적벽전에 내보내야 한다. 각설하고...

지난 달에『삼국지』를 모태로 하는 영화 두 편,《삼국지 : 용(龍)의 부활》과《적벽대전 1부》를 봤다.

먼저《삼국지 : 용의 부활》
사전에 아무 정보 없이 봤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조운이었다. 제목의 '용'이란 조운의 자인 '자룡'을 뜻했던 것.
영화의 문제점이라면, 조운이 명장인 건 분명하나 그래서 삼국지 인물들 중 내가 가장 아끼는 인물인 것도 사실이나 그를 지나치게 영웅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기록된 사실만으로도 그는 이미 충분히 영웅인데 굳이 거기에 신화적인 요소까지 덧입혀야 했는지 영화는 내내 그를 비장하게 몰아댄다. 물론 나는 중국인이 아니므로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정서가 존재하겠으나 한 인물을 영웅으로 조명하는 것과 신화화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적벽대전 1부》
적벽전을 치르기 전까지가 1부 내용이고, 본격적인 적벽전은 2부에서 다룬다. 그런데 주연급 캐스팅 과정의 비화 탓인지 아니면 그것이 원래 감독의 의도였는지 주유(양조위)의 분량이 지나치게 많다. 단지 분량뿐 아니라 2/3 지점이 넘어 가면서부턴 그야말로 주유의, 주유에 의한, 주유를 위한 영화가 되었다. (그냥 '주유전'이라고 해도 됐을 듯...)
연출과 관련, 좀 황당했던 대목도 있다. 공명이 손권과 동맹을 맺기 위한 방편으로 주유를 찾아가는 장면인데, 때마침 군사훈련을 참관하고 있던 주유의 옆으로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우아하게 슬로모션으로 날아가는 화면이 나온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감독이 오우삼이었다. (오감독님, 도대체 하얀 비둘기를 얼마나 키우시길래 아직도 비둘기를 날리시는 건가요... --;)
뭐, 어쨌든, 이리하여 이때부터 주유의 말이 난산 끝에 새끼를 낳는 장면도 구경하고, 주유가 공명과 가야금 대결하는 것도 지켜보고, 주유의 집 처마에서 예쁘게 슬프게 비장하게 떨어지는 낙숫물을 보며 나도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 부러워하다 보니 어느새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 끝에 아, 이제 좀 볼만하려나 했더니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조조의 십만군을 주유와 공명이 사이좋게 내려다 보면서 1부가 끝나버렸다.

나는 호기심이 많아서 영화《삼국지》두 편을 보면서도 궁금한 것이 참 많았다. 원래 어중간하게 알면 궁금한 것도 많은 법. 하여 내 주변에서 유일하게『삼국지』를 읽은 M군에게 계속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었더니만 어지간히 귀찮았던 모양이다. 일주일 뒤에 M군으로부터 택배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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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가 세인트 제임스 홀의 만원을 이룬 청중 앞에서 ‘올리버 트위스트’를 큰 소리로 낭독했을 때 그의 심장 박동은 72에서 124까지 치솟았다. 당연한 일이다. 우선 그는 페이긴이 되었다. 측면에 날개처럼 붙은 청중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친구 찰스 켄트는 그 몇 분간 디킨스가 “악마의 화신” 같았다고 전한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으며, 차양을 친 듯한 눈썹은 무시무시한 파충류의 더듬이처럼 움직였고, 반쯤은 여우같기도 하고 반쯤은 독수리 같기도 한 그의 모습 전체가 굶주린 맹수처럼 사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파충류, 포유류, 조류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려면 누구라도 맥박이 빨라졌을 것이다.) 이어 디킨스는 책의 여백에 써놓은 무대 지시 사항(“몸을 부르르 떤다… 공포에 질려 주위를 돌아본다… 살인이 다가온다.”)을 흘끗 본 뒤에, 빌 사이크스가 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몽둥이를 휘둘렀다. 마지막으로 그는 낸시가 되어 숨을 헐떡였다. “빌, 오, 빌.” 그녀는 자신의 피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디킨스는 낸시를 몽둥이로 때리고 사이크스의 목을 매단 뒤에는 무대 밖의 소파에 엎어져 10분 동안 말을 제대로 이어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 p.147,「낭독의 쾌감」 

 

앤 패디먼의 에세이『서재 결혼 시키기』의 미덕은, 같은 활자중독자로서 작가에게서 유사한 경험을 발견하고 공유하는 데서 오는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트루먼 카포티의 자전적 소설『인 콜드 블러드』가 원작인 영화《카포티》에도 문제의 ‘낭독’ 장면이 나온다. 카포티는 영화《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이자 시나리오 작업도 했는데 당시엔 출판 전후에 홍보를 겸한 자신의 책을 낭독하는 행사가 일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낭독’에 대한 부분은 온다 리쿠의 장편『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4장에서도 잠깐 언급되는데, 작가는 읽는 책이 보는 책이 된 디지털 세대인 지금의 다음 세대쯤에 이르면 아마 다시 ‘듣는 낭독’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라고 자신의 견해를 살짝 내비친다. - 사족이지만,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 타고' 이다. 단어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도 그 느낌이 참 다르다. 왜 쓸데없이 제목을 잘라 버렸을까 궁금한 대목.

나도 낭독을 할 때가 가끔 있는데 주로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한다. 대부분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 혹은 반대로 너무 싫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입 밖으로 쏟아내고 싶은 욕구를 도저히 참기 어려울 때 낭독을 하는데 내 낭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어 하던 친구가 유학을 간 후로, 지금은 M군이 내 낭독의 대상을 도맡아 한다. 처음엔 전화기를 붙들고 M군에게 그 책을 꼭 읽어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다가 급기야 M군이 ‘문제의 책’을 읽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내 성급함이 전화선을 타고 ‘낭독’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M군, 처음엔 잘 들어주는 것 같더니 차츰 귀찮아하다가 나중엔 들어주는 척만 하다가, ‘척’하면 한 번 들을 걸 두 번 듣게 된다는 걸 경험한 후에는 이젠 제법 성의있게 들어주고 촌평도 해준다(하지만 여전히 귀찮아한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고민은 내가 낭독자로서 얼마나 객관적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사실 내가 상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인간이다 보니 ‘낭독’하기에 이르면 스스로 알아서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니 낭독 전에 자연히 사설이 길어지게 되는데, 전화기 저쪽에서 내 이런 사설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던 M군이 결국 못 참고 한 마디 한다. 

“다 감안해서 들으니까 그냥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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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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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 p.254 

작년 여름호부터였던가,『엄마를 부탁해』가 창비 계간지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연재이긴 하나 그것이 우리 집에 처음 등장한 신경숙의 글이었다. 첫 회 앞 부분을 읽다가 곧 흥미를 잃은 것은 아마 인칭 때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취향이 아니야'라고 내던졌던 소설을 (이번엔 완성된 한 권의 책이지만) 주문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고 해야 할까. 이쯤되면 인연이 없는 게 아니라 인연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사실 신경숙은, 나하곤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던 작가였다. 어디까지나 내 의지적인 문제인데 내가 없는 동안 내 책장을 차지한 그녀의 책들은 아직도 읽지 않은 채 그대로 꽂혀 있고, 지금까지 출간된 그녀의 소설 중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했을『엄마를 부탁해』도 딱히 읽어야지 라거나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신작 베스트셀러를 주문한 것은 몇 가지 우연적 요소가 작용했기 때문인데 과정이야 어떻든 소설을 읽고 난 감상은, 소설가 김연수의 말을 빌려, "당장 서점에 가서 이 소설을 사서 읽으세요" 

이 땅의 모든 딸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특히 이 땅의 남편들, 아들들에게 무조건 읽히고 싶다.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소설의 인칭은 '너' '당신' '그' '나' 로 이동하고 그래서 읽는 동안 나는 '너'가 되었다가 '당신'이 되었다가 때로는 관찰하고 때로는 화자가 되어 실종된 엄마의 족적을 따라 간다.
누구의 말처럼 소설을 읽다가 '펑펑' 우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내가 아직 엄마가 되어 보지 못해서가 아닌가 짐작한다. '펑펑'은 아니지만 내가 결국 울음을 터뜨린 것은 3장을 읽던 중 엄마의 상처와 마주쳤을 때였다. 우리는 '엄마'의 역할을 벗어난 '엄마'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누군가의 딸로 태어난 엄마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아버지는 약주 한 잔 하시면 남매 중 그나마 싹싹하고 만만한 나를 붙들고 곧잘 옛날 얘기를 해주시곤 했는데 '나 어렸을 적에' 류의 얘기를 좋아하는 나는 하도 들어서 대개가 거기서 거기인, 벌써 몇 번째 듣는 아버지의 그 얘기들이 늘 들어도 늘 재미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아버지가 들려준 얘기는 다른 날 들었던 것과 조금 달랐다.
아버지가 자란 곳은 그 시절엔 흔했던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모두가 잠드는 밤이 되면 달과 별이 세상을 밝히는 유일한 빛이 되는, 한밤중에 잠에서 깬 아이들이 어두운 마당을 가로질러 외따로 있는 짚으로 엮은 캄캄한 화장실에 가는 것이 무서워 배를 움켜 쥐고 끙끙 참는 그런 시골이었다.
그날은 해가 빨리 져서 저녁도 함께 짧아지는 어느 겨울밤이었다. 그날도 다른 날처럼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는데 유독 아버지만 잠을 못자고 문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겨울 초입이라 바람이 많이 불 때였는데 마당에서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꼭 산에서 내려온 여우나 멧돼지 같은 야생 짐승이 마당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만 같더라는 것이다. 참다 참다 결국 무서웠던 아버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깨웠다. 왜 그러느냐는 할머니에게 아버지가 마당에 뭔가가 있다고 하자 할머니가 낙엽들이 바람에 굴러다니는 소리라고 안심시켜 주셨다고 한다.
"그때 아빠는 몇 살이었는데요?" 내가 물으니 아버지는 "다섯 살인가 여섯 살쯤 됐을 거다."고 하셨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때 아버지한테도 다섯 살, 여섯 살이 있었구나 좀 많이 놀랐던 것 같다. 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인식하기 전부터 아버지는 늘 아버지였고 엄마는 늘 엄마였다. 우리 아버지도 나처럼 아이였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낙엽 구르는 소리가 무서워서 할머니를 깨우기도 하셨다는 것이 생소하고 낯설었던 것이다. 그 때는.

책을 읽은 다음 날, 마침 귀국 사흘 만에 딸을 내팽개치고 휘리릭 남쪽으로 떠났던 엄마가 이모와 함께 올라오셨다. 나는 엄마를 붙들고 종일 책 얘기를 했다. 엄마, 내가 어제 책을 한 권 읽었는데요, 엄마에 관한 내용인데…… (쫑알쫑알)

내가 응석부리고, 나의 응석을 받아 줄 엄마가 내 옆에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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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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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두 편『백야행』과『용의자 X의 헌신』을 읽었다. 

두 소설을 읽고 난 소감은 일단 히가시노의 소설은 '로맨스 추리소설' 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로맨스'와 '추리'라는 두 단어의 전후(前後) 순서가 중요한데 추리소설에 로맨스를 가미한 것이 아니라 로맨스에 추리 요소를 넣었다는 의미에서 '로맨스 추리소설'이다. 

같은 시기에 읽은 미야베 미유키와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한데 책 표지를 두르고 있는 홍보 띠지가 가리키듯 히가시노의 두 소설에서 '사랑'을 빼놓고는 소설을 얘기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이 여느 로맨스소설처럼 달달한가 하면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주인공들이 용의자로 혹은 피해자로 음침하고 음울한 사건의 중심에 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들이 비극적인 보다 큰 이유는 그들 사랑의 방향성 때문이다. 수학선생인 이시가미가 연모하던 이웃집 모녀에게 불행이 닥치자 자발적으로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용의자X의 헌신』은 그렇다 치고『백야행』역시 몇 가지 점에서 유키호와 료지가 양방적 사랑을 했다고 보기엔 의문점이 남는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자국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된『백야행』은 3인칭 시점인 소설과 달리 유키호와 료지의 독백을 삽입, 1인칭 시점을 취한다. 
덕분에 11부작인 드라마는 소설에서 여백으로 남겨졌던 부분을 어느 정도 메꿔주지만 소설에 비하면 두 사람의 행로를 지나치게 운명적 신파로 몰고가는 경향이 있어 오히려 원작의 의도를 흐리는 감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유키호의 동기를 해석하는 부분에서 원작과 시각의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유키호가 선택한 '행위'의 동기를 유키호 자신이 아닌 료지에게 두는 점에서 그러하다.

나를 위해 했는가, 타인을 위해 했는가의 차이는 명백하다. 무엇보다도 이타적 이유의 동기는 상대를 향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드라마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다. 드라마는 유키호의 독백을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이 양방향적인 평행을 이루게 하지만 사실 소설은 일방적인 것에 좀 더 무게를 싣는 듯 보인다. 일방적이라고 해서 료지의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유키호에 비해 료지의 사랑이 더 절실하고 무조건적이라는 의미다. 료지가 오로지 유키호를 위해, 유키오에 의해 백야행을 선택한 것과 달리 유키호의 백야행은 보다 개인적이고 자기애에 의한 이유가 더 강하게 작용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눈에 띄는 점은 직업적인 책임감이 투철한 형사 사사가키를 불쌍한 연인을 집요하게 뒤쫓는 위험하고 미운 인물로 설정한 드라마의 선택이다. 두 아이가 사사가키의 추적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빌며 마음 졸이게 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강요하는 이러한 인물 해석은 가해자는 가해자일 뿐이라는 (원작)작가의 냉정한 시각을 가장 많이 비켜가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살인'이라는 범죄 행위를 보는 시각은 소설이 드라마보다 훨씬 냉정하고 객관적이다. 소설은 두 아이를 옹호하지도 변명하지도 않는다.

로맨스의 가장 큰 비극은 뭘까. 개인적으로 로맨스의 가장 큰 비극은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이 아닌가 싶다. 

덧. 드라마에서 유키호의 의상실 이름은 유키호와 료지의 약자인 'R&Y' 인데 정작 (국내 번역본)소설에선 'R&B'다. 어떻게 된 것일까. Y와 B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이 굉장히 크다. 이 한 글자로 인해 소설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기 때문. 정보를 검색한 결과 일본내 원서에는 'R&Y'라고 분명하게 표기되어 있다고 하니 'R&B'는 국내 출판사의 업무적 실수인 듯 하다.

덧2. 영화《포레스트 검프》와 유사한 방식의 서술 구조를 취하고 있어 소설의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80년대 일본의 시대적 변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덧4. 내가 구입한 것은 개정판인데 예전 표지가 훨씬 낫다. 

덧5.『백야행』과『용의자 X의 헌신』중『용의자 X의 헌신』쪽에 점수를 더 주고 싶다. 사실『용의자 X의 헌신』의 미덕은 딱 한 페이지 혹은 한 줄에 있다. 읽고 나면 희미해질 그저 그런 흔한 추리소설을 인상적인 추리소설로 기억하게 만드는 그 한 부분이 작가에게 '재능있는' 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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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메리 스튜어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이마고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사실 읽기 직전까지 엘리자베스1세의 이복자매인 '블러드 메리'의 얘기인 줄 알았다. 

메리 스튜어트는 동시대에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를 통치할 때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던 여왕으로 비록 그 기간은 4-5년에 불과하지만 통치자로서가 아닌 여자로서의 삶에 더 열정적이었던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즉위식에서 '영국과 결혼했다'고 선언한 엘리자베스의 삶과 매우 대조적인 삶을 살았는데, 여러 권의 저작을 통해 인문주의 지지자임을 드러낸 츠바이크는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라는 두 여왕 중 보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메리 스튜어트에게 더 우호적인 듯 하다.
반면 엘리자베스에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츠바이크의 이런 성향은『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서 카스텔리오를 박해한 칼빈을 다루는 태도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나는 메리보다 엘리자베스에게 끌린다. 한 사람의 여자로서 열정을 제대로 불태웠으니 본인은 만족스러웠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메리 스튜어트는 간통녀이고, 전남편 살해에 가담한 살인 공범이며, 사랑에 빠져 조국을 등한시한 직무유기의 죄를 지은 죄인임에 틀림없다. 반면 츠바이크가 비열하고 저급하다고 비난하는, 그 중에서도 특히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감금하기로 한 선택은, (그녀 입장에서)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으로 보인다.

태어나면서부터 여왕이었던 메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여왕이었는데, 고귀한 혈통이라는 '자존감'은 메리의 가장 큰 장점인 동시에 또한 단점이다. 혹 엘리자베스에겐 없었던 메리의 이런 타고난 품성이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라이벌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을 인색하게 했던 것은 아닌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얻어야 하는 사람과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삶에 대처하는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실례(實例)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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