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책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앤솔러지
기 드 모파상 외 지음, 최정수 외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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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관찰자와 몽상가라는 이중의 삶'(pp.422-433)에서 빌려왔다.


사랑의 책죽음의 책은 현대문학 단편선 시리즈에서 '사랑', '죽음'를 주제로 선별한 앤솔로지인데 목차 중 몇 편을 찍먹해보자.



모파상 달빛

 

투명한 아침 안개 속에서 긴 계곡, , , 마을들이 보이자 나는 황홀한 마음에 손뼉을 치면서 그이에게 말했지. "여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에요. 나 좀 안아 줄래요?" 그러자 그이가 어깨를 조금 으쓱하더니, 친절하지만 차가운 미소를 띠며 나에게 대답하더구나. "경치가 마음에 드는 것이 포옹을 할 이유가 되오?"

 

-p.12, 달빛


첫 번째 목차인 모파상의 소설을 읽던 중 방심하고 있다가 웃음이 픽 샜던 장면이다. 나는 MBTI 신봉자는 아니지만 그중 /E, T/F는 근거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하자면 이 부부의 대화는 전형적인 FT의 대화다. 나중에 해당 장면을 M에게 들려주었다.

 

"모파상의 소설인데, 부부가 마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어. 그러다 전원 풍경을 보면서 아내가 남편에게 풍경이 너무 예뻐요 나를 안아줄래요? 했더니 남편이 풍경이 예쁜 거랑 안아주는 거랑 무슨 상관? 했단 말이지 그러자 매정한 남편에게 상심한 아내에게 애인이 생겨! 너처럼 극극극F들은 명심해야 할 교훈이지 깔깔"

 

해당 장면 이후 불륜을 털어놓으며 괴로워하는 언니에게 동생이 '달빛 때문'이라고 위로한다. 놀라운 건 바로 이 지점인데 직전까지 짧은 콩트 같던 소설은 고작 '달빛' 한 단어로 서정 가득한 소설이 된다. 모파상의 '달빛'은 나쓰메 소세키의 달이 되었다가, 체호프의 달이 되었다가 끝내는 정의할 수 없는 사랑이 된다.

 

명성은 공짜가 아니구나 싶었던 모파상의 한 방이었다.

 

달빛과 /F의 대화 어쩌고 떠들다 보니 드뷔시의 파리(캐서린 카우츠키)에서 나를 박장대소하게 했던 커플이 떠오른다.

 

"말해봐요, 내 사랑. 저 달이 사랑의 꿈을 꾸게 하나요?"

"글쎄요. 달을 보니 아침에 먹은 멜론이 떠오르네요."




피츠제럴드 현명한 선택

 

원제는 'The Sensible Thing'이다.

 

이 단편은 위대한 개츠비의 예고편처럼 느껴지는데 발표 연대를 확인하니 역시  현명한 선택위대한 개츠비보다 1년 앞선다. 1년 동안 피츠제럴드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첫사랑에게 외면당하고 절치부심 성공의 레일 위에 올라 첫사랑 앞에 금의환향한 것까지는 두 소설이 동일한 흐름이지만 첫사랑과 재회 후 조지와 제이는 다른 선택을 한다.

 

단순 정리하자면 제이 개츠비는 문학적인 선택을 했고, 조지 오켈리는 장르적인 선택을 한다. 다만 현명한 선택은 원문은 어떤지 모르지만 일단 번역으로 읽은 소설은 오픈엔딩인데 관점을 살짝 비틀어보자면 현명한 선택에서 열어두었던 엔딩을 위대한 개츠비에서 닫은 것 같은 혐의가 있다. 그러니 위대한 개츠비를 읽을 예정이라면 가급적이면 두 소설을 차례로 연속해서 읽기를 권함.

 

조지와 제이 중 누구의 선택이 더 옳았는가 논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때의 선택이 그들을 어떤 결말로 데리고 가든 이미 그들의 삶에 깃든 우울은 그들과 평생 함께 할 텐데.



땡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건널목을 지나면서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 기차는 드넓은 교외의 풍경을 뚫고 석양을 향해 달려 나갔다. 어쩌면 그녀도 석양을 바라보며 잠깐 걸음을 멈추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옛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밤이 찾아올 것이고, 그는 그녀와 함께 잠 속으로 빠져들며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날의 해 질 녘 어둠은 영원히 태양을 가릴 것이고, 나무를 가릴 것이고, 꽃과 그의 젊은 날의 웃음을 가릴 것이다.

 

p.208, 현명한 선택


철로가 꺾이면서 기차는 이제 태양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태양은 점점 낮게 가라앉으며 그녀가 숨 쉬었던, 점점 멀어져 가는 도시 위에 마치 축복이라도 내리듯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한 줄기 바람이라도 잡으려는 듯, 그녀가 있어 아름다웠던 그 도시의 한 조각이라도 간직해 두려는 듯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제 눈물로 흐려진 그의 두 눈으로 바라보기에는 도시는 너무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 도시에서 가장 싱그럽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p.215-216, 위대한 개츠비/ 김욱동, 민음사


현명한 선택위대한 개츠비의 산모였구나 했던 장면이다. 연인으로부터 내몰리듯이 올라탄 열차의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조지에게서 석양이 퍼지는 지평선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던 쓸쓸하고 우울한 개츠비의 영혼을 엿본 것 같은, 서러운 비애가 느껴졌던 장면.

 

'위대한 개츠비'는 출간 당시에는 인기가 없어 초판은 오랫동안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2차 대전 중 군인들에게 보급되고 소설을 읽은 군인들이 제대하면서 뒤늦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궁금하다. 위대한 개츠비의 실패한 연애담을 읽고 제대한 군인들은 좀더 이성적이고 현명한, 자본주의적인 연애를 했을까.




오 헨리 목장의 보피프 부인 

 

'사랑이야기'라고 하면 으레 장르적인 어떤 것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그런 점에서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단편은 오 헨리, 피츠제럴드, H.G.웰스, 알퐁스 도데, 윌리엄 포크너, 그레이엄 그린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중에서 다시 장르적 공식에 좀더 충실한 단편을 꼽자면 오 헨리 목장의 보피프 부인, 피츠제럴드 현명한 선택이고. (모두 개인 기준)

 

오 헨리의 소설은 오 헨리에게 익숙한 혹은 길들여진 독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커플의 예쁜 이야기.

목장의 보피프 부인은 전형적인 로맨스소설이다. 단적으로, 할리퀸소설 한 편 읽은 기분.

 


운명의 길을 따라간 지네 한 마리가 상황을 밝혀 주었다.

 

p.183, 목장의 보피프 부인

 

앞뒤 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오 헨리가 쓸만한 문장이다.

 



그리고 레이 브래드버리

 

4월의 마녀는 브래드버리의 연작소설 시월의 저택바람 속의 마녀와 동일한 소설이다. 소설을 읽기 시작한 직후엔 혹시 세시와 톰의 프리퀄 혹은 시퀄인가 했는데 그냥 같은 소설이다.

 

시월의 저택리뷰에 세시와 톰의 엔딩을 보겠다는 오기로 예쁜 사오정 같은 이 소설을 완독했다고 썼는데 세시와 톰의 에피소드는 똑 떼어 '사랑의 책' 목차에 넣어도 위화감이 전혀 없는 '사랑이야기'. 다시 봐도 사랑스러운 아이들... 바람이 풀잎을 살랑살랑 흔드는 초원 어딘가에서 예쁘게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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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도박 페이지터너스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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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베토벤의 5번 교향곡 1악장처럼 '운명이 문을 두드리듯' 옛 동료의 방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날 아침의 방문객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별 일 없이 그냥저냥 평탄하게 흘러갔을 젊은 군장교의 인생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회삿돈을 횡령한 옛 동료 장교를 돕기 위해 도박판에 꼈다가 순식간에 감당 못할 액수의 빚을 진 빌헬름 카스다 소위(빌리)가 막다른 순간으로 내몰리는 과정을 다루는 이 소설은 줄거리만 보면 장르 언어로 '피폐물'인데, 선의에서 비롯된 작은 일탈이 어느 시점부터 운명의 발길질이 되어 빌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난장판을 불러온다.

 

<한밤의 도박>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나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악의적인 그들은 모두 빌리의 악운에 일정량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중요한 건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며 하물며 빌리의 비극에 방관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소설을 덮으면서 마음이 아팠던 것도 이 대목이었다. 빌리의 악운에 첫 단추를 끼운 보그너도, 악운에 결정적 쇄기를 박은 슈나벨 영사조차도 빌리의 비극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붕괴되었는데도 누구도 원망할 수 없으니 이래서 지옥은 층층이 몇 겹인 듯. 빌리 본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선택의 순간 지난 과거와 현재의 과오에 책임을 수용하는 빌리는 소설이 진행되는 그 어느 순간보다 차분하고 이성적이다.

 

놀랍지만 대부분의 선의와 악의는 이란성 쌍둥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다는 의미.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악의로 느껴질만한 상처를 남겼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과거 어느 날, 빌리는 바로 이 '예의'에 무심했고 그날의 무신경 혹은 무책임은 어김없이 현재의 빌리에게 영수증을 내민다. 그러나 이 모든 지표에도 나는 진심으로 이 젊은 청년에게 청년이 바라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과정이 어떻든 동료의 곤란한 사정을 딱하게 여겨 돕기를 자청하고 동료의 곤궁한 현실에 연민을 느낄 줄 아는 빌리는 본성이 갖고 있는 선량한 조각이 더 컸던 청년이기 때문이다.

 


긴 장마에 카카오99% 반 조각을 먹은 기분을 남기는 <한밤의 도박>151페이지 분량의 중편이지만 자극적인 소재에 비하면 감정적 파고의 낙차가 완만한 편이다. 그리고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겨두고 방심했을 때 짧고 강하게 폭죽을 터트리는데 긴 꼬리를 남기며 사라지는 불꽃의 여운이 꽤 강렬하다. 그 불꽃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백하다.

 

<한밤의 도박>은 도박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어긋난 사랑이 젊은 장교의 비극에 종지부를 찍는 이야기다. 우연이 우연으로 이어지고 중첩된 우연이 필연이 되어 빌리의 나락에 디딤돌을 놓은 것인데, 그래서 제목 <한밤의 도박>에서 '도박'은 이중적인 의미로 보인다. 빌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몇 년 전 그날 밤 자신도 모르게 한 번의 도박이 더 있었던 것이다. 결국 빌리에겐 두 번의 밤, 두 번의 도박이 있었고 잊혀졌던 그날 밤 도박의 빚이 뒤늦게 도래한 것이다.

 

역자후기의 개념을 빌리자면, 직전까지 에로스(삶의 본능)을 불태웠던 빌리가 결국 타나토스(죽음의 본능)을 담담하고도 의연하게 받아들인 것도 결국 사랑 때문이다. 그게 본인의 것이든 상대의 것이든.

그렇다. 결국 사랑이 문제다.

 

빌리의 선택 이후 남겨진 사람들은 만족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는 지금보다는 훨씬 도덕적이고 선량했던 시절이니까.

 

장서가에게 소설을 읽는 의미를 던져주는 작가를 만나는 건 몇 끼 굶어도 즐거운 행운이다. 아르투어 슈니츨러도 그런 작가다. 내겐 최고의 도파민이 게임도, 영화도, 서브컬처도 아닌 순문학인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빌리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었다. 훌륭하군! 그렇다. 어쨌거나 보그너 문제는 책임지고 수습하고 싶었다. 빌리는 보그너가 아직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기를 바랐다. 보그너에겐 기적이 일어났으니까! 보그너는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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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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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판 제목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는 개정 복간되면서 <원도>로 바뀌었다.

초반 몇 페이지를 읽다가 생각했다. 초판 제목이 더 잘 어울리는데.

이 생각은 책을 읽는 도중에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나서도 여전히 변함없다.

편집장의 결정이 아쉽고 선선히 동의한 작가의 결정도 아쉽다.


고집이 세고 예민한 아이였던 원도는 아버지의 사망 후 줄곧 자신에게 질문한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상실과 결핍은 원도를 이루는 근원이다. 상실은 갖고 있던 걸 빼앗긴(잃어버린) 것이고, 결핍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원도는 상실의 공포와 결핍의 외로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한다.

나는 왜 죽지 않고 사는가.


원도의 상실과 결핍은 원도와 함께 성장한다.


(작가가 의도한 구도이겠지만) 원도에게 상실의 주체는 남성, 결핍의 주체는 여성이 역할을 양분하고 있다.

죽은 아버지와 산 아버지, 장민석, 야똘은 원도에게 책임과 선택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동성이고 어머니, 유경이, 그녀, 아내는 원도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는가 질문하게 하는 이성이다.

이들 중 원도에게 최초로 상실과 결핍을 심은 두 사람은 어린 원도의 눈 앞에서 죽어간 죽은 아버지와 보육원 봉사 때문에 어린 원도를 방치한 어머니다. 그리하여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원도의 질문은 존재의 근원으로 뻗어간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나는 왜 살아있나.

나는 왜 죽지 않고 사는가.


대단원의 끝자락에 작가가 불쑥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런 인물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은가?' (p.239)

개인 감상이지만,

원도의 결말에 같이 책임져달라는 회피로 보여 작가가 비겁하다고 생각했던 한 줄이었다.


-


형식은 카프카, 내용은 다자이 오사무를 떠올리게 하는 <원도>는 가능한 한 호흡에 읽는 게 좋다. 아마도 사십 후반에서 오십 초반 쯤일 원도는 중증의 간경화를 앓고 있는데 경찰과 빚쟁이에게 쫓기는 병든 원도의 몸은 의식과 무의식을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과정이 연속 불연속의 연장이라 꽤 집중을 요한다. 실제로 소설 초반부를 읽을 때 가장 지배적인 감상은 '끝말잇기를 읽는 것 같다'였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져라'(p.58)는 소설 전체에 걸쳐 강박적으로 등장한다. 산 아버지, 장민석, 야똘의 입을 통해 원도에게 박혀드는 이 말의 원조는 산 아버지이지만 매번 원도를 극단으로 몰고가는 인물은 장민석이다. 소설에서 원도가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인물도 장민석이다.


왜 하필 장민석일까.


소설에서 장민석은 원도에게 상실과 결핍을 모두 자극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한편 원도에게 지향점이기도 한 장민석에 대한 원도의 감정은 애증에 가깝다. 이상형인 상대가 무형이었던 상실과 결핍을 매번 실체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두 사람의 결말이 비극인 건 운명이다.


소설은 건너뛰지만 아마도 장민석을 해친 인물은 원도일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정황 요소는 '야구 배트'. 사고가 벌어진 그 순간 장민석은 원도에게 장민석이면서 산 아버지이면서 어머니이면서 그녀였을 것이다. 상상하기로, 아마도 그 순간의 원도는 아주 잠깐이지만 자신의 내면 깊숙이 뿌리를 내린 상실과 결핍을 부수는 희열을 느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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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도 작가 후기에도 등장하지 않는 화자의 이름 '원도'가 궁금하여 검색해보니 여러 검색 결과 중에 한유의 원도(原道)가 눈에 띈다. 이어령비어령이라고 그렇게 보니 그럴싸하다. 각설하고.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원도>는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읽힌다. 하나는 종교적 방식, 다른 하나는 신화적 방식인데 종교적인 관점의 원도는 원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나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자가 된 카인을 연상케하고(이때 장민석은 아벨이다),신화적 관점의 원도는 출생의 비밀과 직면하자 '태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다'고 절규하며 스스로 두 눈을 찌르지만 결국 삶을 선택했던 오이디푸스를 연상케한다.


사실 나는 카인과 오이디푸스에게 연민을 느끼는 쪽인데 그들의 비극이 신에게 떠밀려 선택과 책임을 강요받은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도도 그들과 처지가 다르지 않다. 원도의 인생을 시궁창에 밀어넣은 상실과 결핍은 애초에 원도의 부모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정작 원도는 한번도 동의한 적 없는 자유, 선택, 책임이라는 명분에 내몰려 원도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방치된다. 하물며 원도의 상실과 결핍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어머니는 결정적인 순간 원도가 최초로 던진 질문에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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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좀 의외로웠던 일... 사실 완독 직후에 나는 원도에게 일말의 동정도 연민도 느끼지 않았는데 리뷰를 쓰면서 원도를 향한 감정이 조금 바뀌었다. 누군가(아마도 신이겠지) 미리 값을 설정해둔 시스템에 던져져 좌우 뒤를 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앞으로 앞으로, 그 끝이 절벽인지도 모르고 성실하게 걸어갔구나 싶은 것이다.


아직 언어를 배우기 전 예민하고 사나운 원도의 기질에 소설 속 자아임에도 질리는 기분이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원도가 떼를 쓰고 울고 고집을 부리는 매순간이 나를 버리지 마라, 나를 봐달라 호소하는 간절함이었겠구다 싶다.


어떤 인간에겐 삶과 죽음의 중간 과정이 그 자체로 불가항력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 다른 시기, 다른 상황, 다른 나일 때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그때는 원도를 좀 더 넓게 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여담_

책을 읽는 도중에 불현듯 뜬금포 'M은 이 소설을 절대로 안 읽겠구나' 했다. M은 원래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책의 형태를 한 것이면 그게 뭐든 안 읽지만 새삼스레 100% 확신을 했다. 아울러 순문학은 읽는 독자가 대단하고, 장르문학은 쓰는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담2_

공부 못한다고 아이를 벌 세우지 마라. 학습능력이 떨어지고 암기력이 떨어지는 아이도 있는 거다. 그림 못 그리고, 노래 못 한다고 아이를 벌 세우지는 않지 않는가. 도대체가 국영수는 뭐가 다른가. 이해가 안 되고, 암기가 안 되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뭔가가 나를 뚫고 지나갔어.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확 지나가버렸는데 여기 구멍이 있어.여기로 자꾸 아픈 바람이 불어와.여기 있어야 할 게 없어.내 몸에 이게,이게 대체 뭐야 엄마.원도가 운다.무서워서 운다.

(p.67)

자살은 죽음의 형식일 뿐 내용이 아니다.내용에 대해서는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p.78)

원도가 운다.

목 놓아 운다.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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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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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이후 두 번째로 만나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 재미보다 의미로 읽는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고. 오래 고민했는데 구입하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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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펭귄클래식 7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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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셰익스피어 극 세계를 대표하는 한 단어를 꼽자면 '막장'이다. 여기에 사감으로 수사를 붙이면 '고급진 막장', 그중에서도 막장 오브 막장의 대향연이 『리어 왕』이다.


2.

『리어 왕』의 줄거리를 견인하는 축은 크게 두 개이며 매우 심플하다. 

여기 두 노부가 있다. 한 노부는 딸 셋을 가진 홀아비이며, 다른 노부는 아들 둘을 가진 홀아비이다. 두 노부는 믿었던 자식에게 배신당하고 광야로 쫓겨난다. 가산과 가신을 뺏기고 맨 몸으로 쫓겨난 딸 셋의 노부는 광인이 되고, 두 눈을 잃고 혈혈단신 쫓겨난 아들 둘의 노부는 광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한다. 


딸 셋의 노부는 리어 왕, 아들 둘의 노부는 글로스터 백작이다.


3.

『리어 왕』은 등장인물들 각자가 가진 정의와 악의의 대비가 의심할 바 없이 선명하며 각자의 정의와 악의는 각자의 운명을 '사필귀정', '인과응보'로 이끈다. 

사실 희곡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셰익스피어가 매우 엄혹하고 차가운 셈법을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공정한 셈법'이 아니라 '차가운 셈법'이라고 한 이유는 셰익스피어식 응징 엔딩이 이를테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를 한 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저울 눈금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베니스 상인』의 재판 장면에서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희비극을 갈랐던 '1파운드 살'이 단순히 소재가 아니라 셰익스피어식 '사필귀정', '인과응보'를 대변하는 레토릭의 핵심일 수도 있겠다고 느꼈던 대목.


3+α

리어 왕과 세 딸(고너릴, 리건, 코딜리어), 글로스터 백작과 두 아들(에드가, 에드먼드), 켄트 백작과 (고너릴의)시종 오스왈드, 콘월 공작과 올버니 공작은 모두 각자의 정의와 의지로 자기 운명의 엔딩을 준비하는데 선과 악의 결말이 흥미롭다. 단순계산으로는 선은 승리하고 악은 패배해야 하지만 문제는 등장인물 모두 선하기만 한 것도 악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정의와 선의로 한 행동이라도 상대에겐 불의와 악의가 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벌어진 결과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코딜리어와 글로스터 백작인데, 코딜리어는 굳이 애정을 확인하고 싶은 아버지의 심경을 알면서도 끝까지 자기 결백을 고집하고(예.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하옵는데), 글로스터 백작은 자신의 출생에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차남 에드문드를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모욕한다. 두 사람 모두 악의는 없었으나 문제는 둘의 태도가 상대에겐 악의로 작용했다는 거다. 결국 나의 선의는 결백하며 그것이 정의라는 두 사람의 오만과 무지가 이 모든 막장과 파국의 단초가 된다.


리어 왕의 어긋난 선의도 마찬가지.

권력과 재산을 나눠주면서 그 김에 딸들의 애정도 확인하고 공치사도 좀 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 정작 가장 아끼고 믿었던 막내딸이 입바른 소리만 늘어놓으니 그만 마음이 상할대로 상한다. 여기서 리어의 치명적인 잘못은 코딜리어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코딜리어의 몫까지 다른 두 딸에게 줘버렸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리어 왕'의 비극은 나의 선의가 상대에겐 악의가 되는 역설이 빚어낸 파국이다. 한편 나의 선의와 너의 악의가 빚어낸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자들의 장송곡이기도 하다.


4.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전개를 보며 '파국이다 파국!' 가슴 졸이다 보면 한순간 인물들의 서사가 충돌하며 빚어낸 비극의 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 막장의 비극은 산 자와 죽은 자로 정리된다. 살아남은 자는 당연히 나의 선의와 타인의 악의로부터 한 걸음 비켜간 자다.


5. 

셰익스피어 비극을 구성하는 핵심은 이분법적인 선악 대결 구도에 있다. 이 선명한 선악 구도가 등장인물들의 다층적인 서사와 맞물려 굴러가는 것인데, 즉 나쁜 놈도 할 말이 있다. 그리고 예의 셰익스피어의 차가운 셈법이 모든 인물들에게 '1파운드 살'의 저울을 들이댄다.



리어 너의 신분을 이토록 심히 착각하고, 너를 이곳에 묶어놓은 놈이 누구냐?

켄트 놈과 년입니다. 폐하의 사위와 딸입니다.

리어 아니야.

켄트 맞습니다.

리어 아니라고 했다.

켄트 맞다니까요?

리어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켄트 아니요, 그들이 그랬습니다.

리어 주피터에게 걸고 맹세하건대, 아니다.

켄트 주노에 맹세하건대, 맞습니다.



p.174 (펭귄)





파국의 발단 

*발췌 중 '(…)'는 내가 임의로 중략한 것임


LEAR (…)What can you say to draw A third more opulent than your sister? Speak!

CORDELIA Nothing, my lord.

LEAR Nothing?

CORDELIA Nothing.

LEAR

Nothing will come of nothing. Speak again.

CORDELIA 

Unhappy that I am, I cannot heave

My heart into my mouth. I love your majesty

According to my bond, no more nor less.

LEAR

How, how, Cordelia! Mend your speech a little

Lest you may mar your fortunes.


p.597-598 (펭귄 원서)


'Nothing, no more nor less' 라니...

코딜리어의 매정한 애정표현에 'How, how,' 되뇌는 리어의 심정이란. 이쯤되면 'Nothing bird' 코딜리어의 고고한 결백에 망할년 소리가 절로 나올만도 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샤일록의 딸한테도 비슷한 욕을 했던 것 같은데)


딸- 거너릴의 배신과 최초로 맞닥뜨린 직후 리어의 한탄은 운율의 결을 느낄 수 있는 원문이 보다 절절하고 가슴 아프다.


LEAR

Does any here know me? This is not Lear.

Does Lear walk thus, speak thus? Where are his eyes?

Either his notion weakens, his discernings

Are lethargied - Ha! Waking? 'Tis not so!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


p.632 (펭귄 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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