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기담 - 왕조실록에서 찾은 조선 사회의 뜻밖의 사건들 기담 시리즈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연애소설 돌려보다가 왕에게 반성문 쓴 선비들」

어느 늦은 밤, 정조는 자신의 곁에서 사초를 적고 있던 주서(注書)를 예문관에 보냈다. 그곳에는 김조순과 이상황 등의 몇몇 관리들이 숙직을 하고 있었다. 주서가 보게 된 것은 밤늦게까지 불을 켜고 산더미같이 쌓인 책들을 읽고 있는 숙직관리들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읽고 있었는지 인기척이 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공부하는 그것과는 묘하게 틀렸다. 이상하게 생각했을 즈음, 주서의 눈에 그들이 읽고 있던 책의 제목이 들어왔다.《평산냉연》. 주서는 깜짝 놀랐고, 이 사실은 정조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가게 되었다.《평산냉연》이란 장르를 구분하자면 청대의 정인소설(情人小設)이다. 좀 더 자세히 나누자면 재자가인소설(才子佳人小設)로,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로맨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은 대체로 천편일률적이다. 절세미남에 능력도 뛰어난 주인공이 역시 절세미녀에 똑똑한 여주인공을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하고 사랑을 꽃피운 다음, 주인공은 과거에서 장원급제하고 황제의 칭찬 속에 축복받은 결혼식을 올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단순한 내용이지만 그만큼 읽기도 쉽고 편안했을 것이다.
《평산냉연》뿐만 아니라 당송 시대의 소설도 함께 있었다고 하니, 아마 예문관의 숙직 담당 관리들은 서고에 있었거나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소설을 바리바리 짊어지고 와서 돌려보고 있었떤 것 같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당연히 정조에게 알려졌다.
정조는 신하들이 공부는 안하고 연애소설을 돌려봤다는 것에 크게 진노하여, 관련자들을 파직시키거나 반성문을 쓰게 하는 등 처벌했다. 이 중 이상황이 특히 무거운 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본다면, 그가 소설을 가져온 주모자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요즘의 감각으로 생각해보면, 겨우 소설을 읽는데 지나친 처벌인 것도 같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건으로 처벌을 받은 신하 중 훗날 정조와 사돈이 되었고,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었던 안동 김씨 가문의 김조순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 pp.292-293

 
『조선기담』은 조선조 사료에 남아 있는 기담과 괴담을 다룬 책으로「사회기담」「왕실기담」「선비기담」세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위 얘기는「선비기담」에 등장하는 네번째 얘기다.
그중 현재로 치면 본격적으로 엘리트 코스에 들어선 성균관의 젊은 인재들을 사로잡은, 대체로 천편일률적인 연애소설의 내용이 눈길을 끈다. 과거에 장원급제 하고 황제의 칭찬 속에 똑똑한 절세미녀와 축복받은 결혼식을 올리는 이라니, 음- 선비들의 로망이란 그런 것이군...
남녀를 막론하고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은 다 똑같은 것인지 나도 유사한 경험이 있다. 그러니까 중학생 때인데 시험 기간에 교과서 안에 연애소설을 숨기고 읽다가 그만 엄마한테 들켜버린 일이다.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예문관 선비들과 나의 차이점은 선비들은 다시는 연애소설을 읽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썼다는 것이고, 나는 몰래 읽던 소설로 먼지나게 맞았다는 것이다. 반면 정조와 엄마의 공통점은 사후 조치로 죄인으로부터 깊은 반성과 함께 다시는 연애소설을 읽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다는 것이 되겠다.
물론 추측이지만 아마 이후에도 선비들은 정조 몰래 연애소설을 읽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정조는 알면서도 모른 척 해줬을 것이다.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뭐 어찌 됐든, 나는 저 선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심으로.
이외 기억에 남은 건「사회기담」인데 이 책을 읽을 무렵 아주 드물게 무서운 꿈을 꾸고 새벽에 잠자리를 설쳤다. 나중에 생각해보니「사회기담」을 읽는 동안 느꼈던 공포가 무의식에 남아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때로 상상이 만들어내는 막연한 이미지가 감각적이고 선명한 진짜 영상보다 더 현실적이고 공포스러울 때가 있다. 

제목이 '기담'이니만큼 재미있고, 기묘한 얘기들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졸리는 책이었다. 수면제 대용으로 아주 건강한 처방이 되겠군 생각했을 정도. 서너 페이지 넘어갈 때쯤이면 예외없이 눈꺼풀이 천근만근 내려앉는다.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  

이 책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우습게도 책의 내용보다 책의 포장에 관한 것이다. 양장이 아닐 뿐더러 속표지가 충분히 예쁘고 훌륭한데, 나는 오히려 속표지가 더 마음에 들었다, 굳이 거기에 겉표지를 또 둘러야 했을까. 가히 과대포장'의 시대라 할 만하다.

환상소설, 괴/기담, 추리소설 등에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어서 중독과 유사 증세를 보이게 한다. 읽어도 읽어도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되고, 다 읽기가 바쁘게 곧장 다음 소설을 찾아서 읽게 된다. 그렇지만 열광하는 시기가 지나면 또 그 뿐, 참 재미있었지, 하는 감각은 기억하지만 예전의 광(狂)을 다시 되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요즘 서점가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등의 일본에서 건너온 추리소설이나 밀리언셀러클럽의 목록에 선뜻 손이 안 가는 이유다. 하물며 그렇게 좋아하던 스티븐 킹조차도 시들해지는 걸 보면 말 다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킬링타임용으로 이만한 장르가 없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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