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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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적인 작가가 지적으로 써내려간 지적인 소설은 독자도 지적으로 만든다. 최소한 생각하게는 만든다.
이 소설은 한 마디로 '이야기가 있는' 소설이다. 씨줄과 날줄을 엮듯 이야기가 촘촘하게 얽혀 있다. 그렇지만 무질서하진 않다.
일제 강점기, 해방 직후, 80년 광주, 91년 서울이 무대인 이야기는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를 배경 음악으로 하고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바다를 헤엄치면서 한 시대를 공유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는다. 

'나'와 나의 여자친구 정민, 나의 할아버지, 정민의 외삼촌, '나'가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그들은 모두 자신을 우연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외로움을 느낀다. 그런데 서로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보이던 각자의 이야기들은 결국 그들의 존재 방식은 우연이었을지라도 존재 목적은 필연적이었다는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작가는 소설의 본문에 "이 우주가 이처럼 광활한 까닭은 어딘가에 우리와 같은 인류가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라는 칼 세이건의 목소리를 언급한다. 영화《콘택트(contact)》역시 칼 세이건의 말을 빌어 "만약 이 우주에 우리 인간만 살고 있다면 그건 우주 공간의 낭비가 아닐까" 라는 대사가 등장했다. 결국 소설은 이 넓은 우주의 한 점에 우연찮게 모인 우리들은 "(인간은)외롭지만 동시에 외롭지 않은 존재" 라고 귀결된다.
내가 외롭지 않다면 그것은 어딘가에 나처럼 외로운 누군가가, 내 외로움을 이해해 줄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읽으면서 참 즐거웠던 소설이었음에도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앞 부분을 읽다가 부산에 다녀오는 바람에 흐름이 끊긴 책은 좀처럼 다시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손에 잡은 뒤부터는 잠을 미뤄가면서 읽었다.
『네가 누구든...』은 한 눈 팔지 않도록, 자신에게만 충실하도록 요구하는 소설이다. 차분한 녹색 표지와 내가 좋아하는 타자체 제목, 조금 작은 판형까지 개인적으로 예쁜 책 베스트에 올렸다.

그때, 내가 누군지 소리치면서 왼손을 드는 내게 투쟁국장이 쇠파이프를 내리치던 그 순간은 오랫동안 내 뇌리에 남았다. 같은 시간, 거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한 여학생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은 영원히 내 기억에 남았다. -p.126 

"해진 티셔츠, 낡은 잡지, 손때 묻은 만년필, 칠이 벗겨진 담배케이스, 군데군데 사진이 뜯긴 흔적이 남은 사진집, 이제는 누구도 꽃을 꽂지 않는 꽃병. 우리 인생의 이야기는 그런 사물들 속에 깃들지. 우리가 한번 손으로 만질 때마다 사물들은 예전과 다른 것으로 바뀌지. 우리가 없어져도 그 사물들은 남는 거야. 사라진 우리를 대신해서...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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