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왕 - 정보라 소설집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7월
평점 :
절판


'문법 자체가 성별 구분에 민감하지 않은 언어'(p.215), 

'이 책은 나오기도 전부터 '남자 죽이는 여자들 이야기'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는데(p.277)


라고 작가는 후기에서 밝히지만 사실 '성별모호', '남자를 죽이는 여자'는 정보라의 소설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주요 뼈대이자 구성점의 일부이다. 달리 말하면 이 둘은 정보라가 본인 소설에 능동적 적극적 그리고 지속적으로 인용하는 모티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정보라 식 '성별모호'는 작가 스스로 고수하는 일종의 원칙처럼 느껴지는데 소설 집필 과정에 선택적 요소로 등장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쓰겠다는 '전제'로 기능한다는 얘기다.


이 책에 수록된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를 예로 들면, 왕이 있고 왕의 충성스런 장수가 있고 그 장수가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어 왕과 나라를 구하고.... 여기까지 읽으면 독자는 으레 장수를 남자라고 생각한다. 남자라는 결론에 이르는 인지 과정 없이 자연현상처럼 그냥 그렇게 인식하는 것인데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를 인용하면 장수를 남자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라고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왕과 사랑에 빠져 왕자를 낳았지만 왕비의 지위를 마다하고 장수로 왕에게 충성을 다한 자'라는 서술에 이르면 지나간 서술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작가는 성별반전의 의외성을 독자가 발견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즐기지 않았을까.


여기서 질문을 더 나가면 정보라 식 '성별모호'는 단순히 문학적 문법인가 개인의 작법 수단인가 하는 것이다. 

출간된 정보라의 소설을 절반쯤 읽은 현 시점에 느끼기로 정보라 작가가 고수하는 '성별모호', '남자를 죽이는 여자'는 정보라 작가의 문학적 문법 즉 IP(Intellectual Property)라고 봐도 무방하겠다는 것이다. 정보라는 SF, 신화, 현대호러 등 여러 장르를 쓰는데 상술했다시피 서사의 중심에 '성별모호', '남자를 죽이는 여자'가 일관되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확실히 정보라 소설의 성격을 규정 짓는 정체성으로 봐야할 것 같다.


'남자를 죽이는 여자'라는 표현에 오해가 있을까봐 덧붙이자면 이런 서사의 결말은 매번 진눈깨비가 내린 직후 응달 구석에 한웅큼 고인 웅덩이같은 비애감이 남는다. 여자로부터 비롯된 고통도 실연도 죽음도 자연의 일부인양 희노애락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남자의 모습은 그 자체로 충분히 숭고하고 아름답다. 물론 정보라의 소설에만 해당하는 얘기다.


비극을 두고 굳이 비애감이라고 쓰고 보니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 떠오르는데, 정보라 소설을 읽고 느끼는 비애감은 고대 그리스 비극과 독일 비애극을 섞은 멜랑꼴리에 가까운 것 같다. 

(아니? 벤야민의 책이 절판됐네요? 리뷰를 쓰면서 보니 '여자들의 왕'도 절판됐네요? 근데 왠지 이 소설은 절판될 것 같다고 예상하긴 했어요)


소설집 『여자들의 왕』은 '공주, 기사, 왕비, 왕자, 용'으로 이어지는 세 편의 연작 단편과 표제작을 포함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다. 개인적으로 「사막의 빛」이 제목이었으면 좋았겠다 싶었는데 작가의 말을 보니 작가는 「여자들의 왕」을 가장 신나게 쓴 것 같다. 

「여자들의 왕」은 팜므파탈 공주한테 홀딱 넘어간 주인공이(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다) 일편단심 순정남 왕자를 배신하고 공주 편에 섰지만 공주와 공주의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처형당하기 직전 죽은 왕자의 도움으로 탈출하는 얘기다. 

나는 너무 슬펐는데 무정한 작가 같으니라고...


완독하는 정보라의 소설이 쌓여갈수록 새록새록 느끼는 건 정보라의 글솜씨는 판타지 설화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보라 소설의 기저는 민담과 설화인데 여기에서 생산된 서사가 SF와 현대호러로 변주되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래도 역시 본연의 옷을 입을 때 가장 빛난다는 생각이다. 내가 읽은 첫 정보라의 소설은 『저주토끼』인데 수록 단편 중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가 특히 재미있고 기억에 남았는데 지나고 보니 처음부터 그런 취향의 전조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 대기 중인 소설이 몇 권 남았지만 지금까지는 판타지와 설화와 SF를 모두 품은 『붉은 칼』이 제일 좋다. 참고로 『붉은 칼』은 내가 정보라 월드로 뛰어들게 한 장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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