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신유진 지음 / 1984Books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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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게 강아지 같네."

세계의 말에 얼굴이 달궈졌다. 나는 두 손으로 볼을 감췄으나 더 뜨거워진 마음은 가릴 길이 없어 벌거숭이로 춤을 췄다.

얼마나 붉었을까, 나의 마음은?

세계는 붉어진 벌거숭이를 봤을까?


-p.48 「끝난 연극에 대하여」



번역가이며 에세이스트인 신유진의 단편소설집으로 다섯 편이 수록되었다.


첫 장을 펼치고 첫 문장부터 조금씩 가라앉던 나는 세 번째 단편 '첼시호텔 세 번째 버전'의 넋두리에 완전히 침몰했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떠오르지 못했다. 


권태기에 접어든 연애는 연인과 약속한 장소로 가는 걸음을 게으르게 잡아챈다. 미적대다 약속 시간에 한참 늦은 시각. 지하철 안에서 이안에게 문자를 보낸다. '가고 있어'. 문자를 보내고 나서 이안에게서 두 통의 전화가 오지만 받지 않는다. 어차피 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갑자기 지하철이 멈춘다. 테러로 지하철 운행을 멈춘다는 소식. 테러가 발생한 곳은 하필 약속 장소다. 휴대폰을 꺼내자 이안이 보낸 문자가 보인다. '오지 마'. 정작 이안에게 보낸 문자 '가고 있어'는 전송 실패로 전송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못된 기집애. 나는 온마음으로 '나(소은)'를 비난했다. 착한 이안이가 가엾고 애틋해서 남은 단편을 읽는 내내 틈틈이 소은을 욕했다.


다섯 개의 단편은 마음을 주었던 사람, 시간, 장소를 상실한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읽고 나면 세상이 잿빛 무채색이 되는 이야기들. 작가 후기가 없었다면 단언컨대 아주 오랫동안 작가를 원망했을 거다. 왜냐하면 나는 특히 슬픈 이야기에 면역이 없기 때문이다. 저건 픽션이라고, 소설일 뿐이라고, 가짜라고 아무리 주지시켜도 도통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 예상했으나 예상보다 더 멜랑꼴리한 단편들을 읽으면서 '카타르시스 따위!' 했다.


이 소설을 읽기 이틀 전에 확신의 'T'인 M에게 나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나는 비극에 면역이 없어서 슬픈 소설, 슬픈 영화를 못 보겠어. 다큐도 아닌 픽션에 마음이 이렇게까지 들쑤셔져야 해? 슬픈 영화 슬픈 소설이 뭐라고 그걸 보면서 통곡할 일이야? 

그날 나는 비극에 면역력을 키워보고자 책 두 권을 주문했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내가 해답을 구하는 방식은 여전히 책이 일순위다.


최은영('밝은 밤', '쇼코의 미소')보다 낫다. 신유진의 책이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내가 읽은 건 구판이다. 1984books가 만드는 책은 예뻐서 선물 같은 기분이 든다. 다만 신유진의 책은 유독 표지 변경이 잦아서 의아하다. 내 책장에 꽂혀있는 신유진의 에세이 두 권은 표지만 세 번째 바뀌었다. 개인취향으로 3쇄(?)≥개정판>초판 순으로 표지가 예쁘다. 유감스럽게도 내 책은 검색도 잘 안 되는 초판이고. 대충 배아프다는 얘기.


아니 에르노 팬들은 좋겠다. 신유진이 번역하고 1984books가 만든 에르노 컬렉션을 책장에 꽂을 수 있으니까.


* 검색해보니 개정판 에세이는 새 글이 한 편 씩 추가되었다고 한다. 기존 책을 가진 독자가 원하면 추가된 글은 pdf로 보내준다는 것 같다. 전자책 이용자라면 문의해보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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