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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 - 하루키가 말하는 '내가 사랑한 음악'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그것이 재즈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할 만큼 녹아웃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 만일 그런 비합리적인 힘을 때때로 느낄 수 없었다면 도대체 어느 누가 재즈를 30년 동안이나, 40년 동안이나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들어왔겠는가? 재즈라는 음악은 그렇게 성립되어 왔다"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는 재즈에 대한 책은 아니다. 위에 인용한 구절은 분명 재즈에 대한 것이지만, 사실 음악 자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에서 그가 즐겨 듣는 음악을 만든 음악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포크, 록, 클래식, 재즈가 여기에 망라되어 있다. 놀랍게도 일본 싱어송라이터도 한명 포함되어 있다.
나는 재즈를 오랫동안 좋아해왔지만 그 누구에 관해서도 하루키처럼은 쓸 수 없다. 필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재즈를 들으면서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했다. 내게 음악은 어렸을 적, 그러니까 걸음마를 배우기 전부터 아버지가 들려주던 LP판들이 재생해내는 하나의 소리였고, 그 소리에는 장르 구분이 없었다. 클래식도, 가요도, 재즈도 온통 혼합되어 있었다. 닥치는 대로 음악을 들으면서 몇몇 곡은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몇몇 연주자는 무척 좋아해서 음반을 가능한 보는대로 사 모으고는 있지만 전작주의 따위도 없다. 한 뮤지션의 음반을 연대순으로 늘어놓고 그의 변화를 탐색하는 일도 없다. 하지만 음악이 없으면 사는게 재미가 없다. 하루키가 이 책에서 풀랑크를 연주한 호로비츠에 대해 묘사한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온 세상의 밥상을 뒤집어엎고 다니는 듯한 굉장함"을 나는, 음악을 통해서 느끼고 싶고, 그렇기 때문에 주로 좋다는 음반을 듣게 된다. 범작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으니 이런 식의 연대기적 변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내가 아끼는 몇몇 뮤지션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뮤지션을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풀랑크의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고, 제르킨의 연주를 들어보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시더 윌턴의 연주도, 그에 관한 글을 읽다 보니 내가 분명 들었을텐데 난 기억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루키가 이 책에서 시큰둥하게 말했던 행크 존스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몇몇 뮤지션들에는 열광한다. 브라이언 윌슨을 제대로 평가하는 글을 쓴 유일한 소설가라는 점에서 나는 하루키를 이미 좋아하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그 애정을 느낄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대단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하루키가 글로 써 낸 그의 음악세계에 공명할 수 있다. 스가시카오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가 쓴 노랫말 중 하나인 <밤하늘의 저편>은 내가 외우고 있으며 가장 좋아하는 노래 가사이니, 각별할 수 밖에 없다. 우디 거스리의 음반도 가지고 있기는 하군. 아, 스탄 게츠는 좋아한다. 하하. 20년째 좋아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그 음악을 잘 몰라도 이 책을 읽는데 큰 지장이 없다는 데 있다.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 스탄 게츠의 음악을 읽고 있으면 "아, 다시 듣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어 CD 장을 찾아보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이런 걸 느낄 수 없으면 어쩌지"싶기도 하다. 슈베르트의 소나타는 어떤가. 슈베르트의 소나타에 크게 감흥한 적이 없는 나는, 왜 나는 이런 걸 몰랐을까 하고 통탄하기도 한다. 하루키가 글로 살려내는 '그' 음악들의 매혹이란 정말 공감 가능한 것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음악이 한 개인의 영혼과 공명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자연스럽고 폭발적인 화학작용에 대한 글이다. 이 음악들을 하루키가 즐긴 것처럼 자신의 음악을 찾고 싶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결국은, 이 음반들 중 몇개는 사게 될 것 같다. 도대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의 필력이다. 음악을 많이 듣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뮤지션에 대한 글만 골라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음악적 화법에 익숙하지 않다면, 특히나 클래식이나 재즈의 화법에 익숙하지 않다면 이 글을 읽고 상상의 나래를 펴 봐야 나긋하게 몸을 흔드는 우아한 이미자 정도가 되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아,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니 가뜩이나 별로 좋아하지 않던 윈턴 마샬리스에 대한 비호감이 강해졌다. 그의 팬이라면 읽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후학 양성 빼고는 별 특이할 점이 없는 지루한 재즈 뮤지션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