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털 같은 나날
류진운 지음, 김영철 옮김 / 소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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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난 <허삼관 매혈기>의 위화를 떠올렸다. 어딘가 위화의 분위기를 닮은 듯 느껴졌다. 아마 그것은 중국 소시민의 삶을 능청스러우면서도 진솔하게 그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3편의 중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먼저 「닭털 같은 나날」은 제목을 보고 우리가 흔히 쓰는 ‘새털 같은 나날’을 떠올렸다. 이 말에선 한량없이 많은 시간을 의미하지만 이 작품에선 중국 소시민들의 삶을 말한다. 대학을 나온 임씨네가 겪는 소소한 일상은 참으로 능청스럽고도 해학이 넘치는 문장으로 인해 읽는 내내 즐거웠다. 현미경으로 대상을 집요하게 관찰하듯 지리멸렬한 일상을 미세하게 들여다보면서 켜켜이 쌓여 있는 서민들의 애환을 따스한 눈빛으로 묘사한다. 그 일상에는 가정부와 아이와 직장과 고향사람들과의 갈등이 가감 없이 진솔하게 그려진다. 거기에는 자괴감과 열등감도 있지만 작은 일 하나에도 기뻐하고 절망하는 소시민들의 삶 즉, 굳이 중국이라는 배경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보편성이 편재하고 있어 감동을 준다.

 

두 번째 「관리들 만세」를 보면 관리들의 부패한 모습을 리얼하게 볼 수 있다. 겉보기에는 대의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지만 속내는 결국 자기 안일과 출세와 권력지향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굳이 중국의 한 단면이라고 한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조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비슷한 모습이지 않겠는가?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마지막이다. 정말 괜찮은 사람으로 묘사되었다가 마지막에선 국장이 된 ‘곡’국장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을 답습하기 때문이다. 그 능청스러움에 허를 찔린 듯, 결국 하하 웃게 되었다.

 

세 번째 「1942년을 돌아보다」는 한 편의 소설이라기 보다는 1942년 중국 하남성의 기아에 대한 일종의 다큐멘터리 같다. 그 당시 외국의 <타임>지에 실린 신문기사를 인용하거나, 현지인들의 회상이나 각종 자료를 인용하면서, 1942년 하남성에 있는 중국인들이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는지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기아로 인해 부모가 아이를 팔거나 시체를 먹는 일은 다반사이다. 자연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 처음엔 감정은 철저히 배제되고, 딱딱한 현실만이 건조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러다 어느 부분에선 감정이 폭발하듯 절절 끓기도 한다.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1942년의 하남성의 기근과 기아는 아노미 상태에 빠져 버린 모습을 처절하게 그리고 있다. 그 배고픔은 일본군이 6만군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30만의 중국 군대를 단번에 섬멸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니기도 한다. 비록 전략적이긴 했어도, 일본군은 그들에게 군량을 방출해서 민중에게 배고픔을 해결해 주었다. 작가는 “차라리 굶어 죽어 중국 귀신이 될 것인가? 아니면 굶어 죽지 않고 매국노가 될 것인가?”(p292)라고 묻는다. 그리곤 당연히 후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1942년을 돌아본 뒤 얻은 마지막 결론이다.

 

"어린 아이는 국가와 정부의 바로미터이다. 어린 아이의 책가방이 너무 무겁고 숙제가 집에서 다 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많아 아이들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다면, 그 나라는 비틀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처럼 만약 정부가 아이들이 수없이 굶어 죽어도 관여하지 않고, 그 책임을 외국인에게 미룬다면 그 정부는 오래 존속하지 못할 것이고, 존재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p277)

 

역사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그 역사를 소설은 외면하지 않고 글로써 보여주고 있다. 2000년대의 중국 소시민들의 삶이나, 혹은 부패한 관리들의 삶, 그리고 1942년의 삶을 허구의 소설로 그 어떤 사실보다도 진실되게 말하고 있다. 그것이 문학의 힘, 소설의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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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메이 아줌마 (양장)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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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그것이 동화이든 수필이든 그림책이나 소설책이든 간에 황량해진 내 마음, 서걱서걱 모래 바람만 부는 내 가슴에 따뜻한 기운을 넣어줄 글이 그리웠다. 한동안 무엇인가 쫓기듯이 불안했다. 이유 없이 불안하니 잠 못 드는 날이 늘어났고, 이침이면 식은땀에 젖어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아마, 어떤 지인의 죽음을 겪으면서 많이 나약해져 있었나 보다. 인간이란 이렇게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를 다시 느끼게 되었을 때 이 책을 만났다.

 

동화나 소설에는 악역을 맡은 반동인물이 주동인물인 주인공과 대립하기도 하고, 악역은 없지만 주변 환경이나 운명이 주인공의 삶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이 책에는 악역은 없다. 다만 운명이 이들의 삶을 잔인하게 끌고 간다. 그래서 더 가슴이 시리고 아렸는지 모르겠다.

 

 6살 소녀 서머는 엄마를 여윈 후(아빠는 누군지 아예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친척들 손에 짐 보따리처럼 귀찮은 존재로 전전하다가 친척이 아닌, 피 한 방울 전혀 섞이지 않은 메이 아줌마와 오브 아저씨를 만나 새 삶을 산다. 메이 아줌마는 뚱뚱한 온 몸이 오직 사랑만 담겨 있는 것처럼 서머에게 온통 사랑을 담아 키운다. 메이 아줌마와 오브아저씨와 함께 한 삶은 가정의 따뜻함을 모르는 서머에게 따뜻한 가정의 참맛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그 행복은 아주 잠깐, 오랜 장마 기간동안 잠깐 비추는 햇빛 같은 것이다. 메이 아줌마는 갑작스레 밭에서 일을 하다 세상을 떠난다. 그 아줌마를 그리워하는 오브 아저씨와 서머와의 슬픔이 이 책의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메이 아줌마를 너무나 사랑하던 오브 아저씨, 역시 아줌마를 너무나 좋아했던 서머. 그들의 슬픔은 책을 읽는 내내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누가 이렇게 선량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일까? 운명이란 왜 이렇게 선한 사람들에게 잔인하고 폭력적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 때문에 이별해야 하는 것,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예고도 없이 죽음이 찾아들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슬픔과 고통이 어떤 것인지 이 책은 알게 해 준다. 살아갈 의지를 잃은 채, 실성한 사람처럼 방황하는 오브 아저씨를 바라보는 것은 어린 소녀 서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다. 그래서 울고 싶어도 제대로 울 수 없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말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해 줄 수 있다는 사람(일종의 영매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오브 아저씨는 기운을 차리고 3시간 넘게 차를 운전하며 서머와 함께 페트넘 군까지 간다. 하지만 이미 그 영매자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되돌아 올 때의 허탈감이란... 그러나 그 일을 계기로 아저씨는 다시 생의 의지를 찾고 그동안 억눌렸던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슬픔이 울음으로써 터져 나올 때 그 슬픔은 이제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슬픔은 독약과 같은 것이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될 수도 있다.

 

통과의례의 절차를 밟다 보면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행해졌던 틀 속에 갇혀서 진정으로 자신들이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정해진 것들에 기뻐해야 하고, 정해진 만큼 슬퍼하고, 통곡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서머나 오브 아저씨 같은 사람이다. 가슴속에 있던 응어리는 풀어줘야 한다. 한 발은 이승에, 또 한발은 저승에 걸쳐놓고 사는 오브아저씨가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은 가슴 속에 응어리진 슬픔이 안에서 폭발하지 않고, 눈물로써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어린 양녀 서머를 지켜야 한다는 사랑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이 책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사랑 때문이다. 비록 6살에 서머는 엄마와 헤어졌지만 “가엾은 우리 엄마는 나를 받아 줄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내가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사랑을 남겨두고 간 것이다.”라고 했듯, 충분히 사랑해 줬고, 메이 아줌마와 오브 아저씨를 통해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기억은 세상의 어떤 험난한 일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슬픔을 이기는 힘... 그것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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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보, 내 인생 반올림 2
미카엘 올리비에 지음, 송영미 그림, 조현실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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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대만큼 외모에 신경 쓰는 시대가 있었을까? 이제 외모는 하나의 경쟁력이 되었다. 얼짱과 몸짱이 그 어느 시대보다 대접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예전엔 성형수술은 연예인이나 모델 같은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되었지만, 이젠 젊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다고 하니, 그야말로 얼짱 몸짱의 전성기가 되었다.

 

뚱보나, 못생긴 사람은 (여자나 남자 모두), TV의 드라마나 코미디, 쇼프로 등에서도 진실성과는 상관없이 늘 희화화된 인물로 나온다. 아주 못생긴 사람이나 아주 뚱뚱한 사람이 근사한 주인공역을 맡기는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힘든 것 같다. 그들은 대부분 늘 주인공의 주변인으로, 놀림감으로의 역할밖에 맡을 수 없다. 작년에 많은 국민들을 TV 앞에 앉게 한「내 이름은 삼순이」는 그래서 더 많은 호응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은 뚱보가 주인공이다.

 

주인공 벵자멩은 비만 2급의 뚱보이다. 비록 뚱뚱하기는 하지만, 공부는 최소한으로 하면서도 그에 비해 성적은 꽤 괜찮게 나오는 남자아이다. 그래서 성적표에는 항상 “가능성은 아주 많지만 좀 더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쉽습니다.”라는 멘트가 단골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건 벵자멩의 삶의 지혜였다. 열심히 노력해서 우등생으로 살자면 공부하느랴 고달프고, 꼴찌로 살자면 걸리는 게 너무 많아 스스로 중간지대를 사는 것이다.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부담을 주지 않는 탁월한 선택이다. 그만큼 벵자멩은 낙천적인 아이다.

 

그러나 여자애 앞에서만큼은 얼굴을 붉히고 더듬거리고, 주변머리 없는 전형적인 사춘기 소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신체검사 검진 결과 비만 2급의 뚱보라는 사실을 통보 받은 데다가,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클레르라는 여자 아이를 좋아하고 나서부터 벵자멩은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다이어트는 고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먹는 것과 요리하는 일인데 이제 먹는 것을 줄이고, 그나마 음식을 먹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게 되니 불행이지 않겠는가? 그토록 즐거운 일을 날마다 억제해야 되는 것은 분명 비극이다.

 

이 책은 프랑스 청소년 소설이다. 중학교 3학년인 뚱보 남자아이의 현실이 유쾌하고 리얼하게 그려졌다. 물론 뚱보들에겐 결코 유쾌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뚱보들에게 어떤 선입관을 갖고 있다. 의지가 없는 아이, 되는 대로 사는 아이, 하루 종일 먹기만 하는 아이 등 뚱보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뚱보에 대한 시선은 좀 달라지지 않을까?

 

같이 뚱보인 삼촌 알랭의 비극은 비만이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비약된다. 비만은 단순히 개인의 불행한(?) 외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회사에서도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것이나 병원에서조차 꺼리는 존재로 추락한다. 비만은 반드시 치료해야 할 병인 것이다.

삼촌의 이야기를 듣고, 좋아하는 클레르를 생각하며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벵자밍. 병원도 다니고, 침도 맞으며, 식단에 따라 먹는 것도 줄이지만,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사랑이 아닌 그저 우정으로써의 친구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끝없는 나락감이란.... 비록 16살 소년이지만 그 상처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진지하게 묘사된다. 그 동안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며 방황은 시작되는데...

 

방황하고 있는 벵자밍에게 소피 아줌마의 지혜로운 충고는 참 감동적이다. 솔직히 어른이라고 다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면 난 소피 아줌마만큼 지혜롭게 얘기해 줄 수 있을까? 비록 소피아줌마는 아빠를 빼앗아(?)간 여자이지만 16살짜리 아이의 입장에서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이 여자는 정말 멋지다.

 

그럼, 뚱보 벵자밍은 어떻게 되었을까? 리뷰 제목을 보니 벵자밍에게 다시 사랑이 찾아온 것 같은데... 그렇다. 소피 아줌마의 충고와 격려는 벵자밍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는 다시 클레르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럼, 다이어트를 했기 때문일까? 그것은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을 위해서 궁금증으로 남겨두어야겠다. 청소년들, 그 중에서 외모 때문에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겐 많은 공감을 줄 수 있는 책이다.

 

벵자밍이 각종 프랑스 음식을 소개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글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침을 꼴깍 넘기게 된다. 이 책은 교훈적이지 않다. 그것은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강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16살 소년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청소년들은 많은 공감을 할 것이다. 비만은 건강의 적신호라고 위협하면서 어디서나 다이어트를 외치는 이 시대에 뚱보가 설자리는 점점 더 빈약해져 가지만, 자기 몸을 사랑하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것을 이 책은 말해 주고 있다. 참 사랑스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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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유진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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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엔, 노란 바탕에 회색의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쌍둥이처럼 서 있지만 자세히 보면 좀 다르다. 왼쪽의 나무는 비교적 곧게 서 있지만, 오른쪽의 나무는 중간 부분에 좀 휘어지다가 다시 위로 뻗어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처음엔 의미 없이 보았던 표지 그림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왼쪽의 나무는 큰 유진이고, 오른쪽의 나무는 작은 유진이겠지.

 

아직까지도 많은 여아들이 유치원 원장이나 기사로부터 혹은, 친척이나 이웃집의 누구 등으로부터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기에 딸을 가진 부모들은 늘 불안해한다. 유아기나 아동기의 성폭행은 성인이 되어서 여러 가지 후유증을 낳는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으로가 아닌, 단지 운이 나빠서 당한 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미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작가는 어쩔 수 없이 당한 일을 어떤 방법으로 대처했는가에 따라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두 유진을 통해서 보여준다.

 

먼저 작은 유진의 부모는 수치스런(?) 기억을 빼앗는 일이다. 작은 유진의 엄마는 살갗이 벗겨지도록 몸을 닦으며 아이를 때린다. “넌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아무 일도. 알았어? 앞으로 그 얘기 꺼내지마. 그럼 너 죽고, 엄마도 죽는 거야”라며 윽박을 지름으로써 그 기억을 빼앗는다. 그래서 부분 기억 상실증에 걸린 작은 유진. 그러나 봉인된 기억은 영원할 수 없다. 우연히도 중학교 2학년 때 똑같은 이름의 큰 유진을 만나 사라진 기억은 재생되고, 전교 1등이었던 범생이 작은 유진은 방황과 탈선의 길로 빠져든다.

 

반면, 똑같은 성폭력을 당했던 큰 유진은 그 사건을 겪고 나서 그 어느 때보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는다. 생에 가장 많이 엄마로부터 “사랑해”라고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다.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라며 안아주고 감싸주었던 큰 유진은 비록 그 때 일을 떠올리면 불쾌하긴 하지만 비교적 밝고 건강한 아이로 자란다. 그 때 일이란 단지 ‘미친개에게 물린 것’일 뿐이다. 그것은 물린 사람은 전혀 잘못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작은 유진은 할아버지나 할머니로부터 이젠 깨진 그릇 밖에 되지 않는다. 전교 1등을 했을 때에야 겨우 제 몫을 하는 존재일 뿐이다. 작은 유진의 고통은 성폭력 자체의 고통보다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가족에 대한 분노가 더 크다. 그렇기에 큰 유진이 너무나 부러웠다.

 

몇 년 전쯤, 여고생인 딸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그 엄마가 딸을 목졸라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는 기사를 읽고 너무나 기가 막히고 안타까웠다. 미친개한테 물렸을 뿐인데, 왜 죽음에까지 이르는지 가슴이 아팠다. 물론 당사자가 아니고, 또 속내야 알 수 없지만 그 방법은 옳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아직까지 순결이데올로기에 묶여서 소중한 목숨을 쉽게 버리거나 수치스러워하고 죄악시하는 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물론 결코 자랑스러워할 일도 아니고 함부로 순결을 버리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미친개한테 물린 것은 정성껏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미친개한테 물린 당사자가 큰 상처없이 치유할 수 있도록 주변사람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작가는 그 대안으로 큰 유진의 부모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작중인물인 희정이를 통해서 말한다. “시작은 누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자신을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살면서 받는 상처나 고통 같은 것을 자기 삶의 훈장으로 만드는가, 누덕누덕 기운 자국으로 만드는가는 자신의 선택인 것 같아”라고 말하면서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 책에서는 어른들의 위선도 보게 된다. 청소년 상담을 하며 유치원 성폭행 사건을 보고 팔 걷고 나섰던 건우 엄마는 막상 큰 유진이 자기 아들 건우랑 사귀는 것을 알게 되자 ‘그런 애’하고 사귀지 말라고 한다. 사실 이런 위선자는 어디 한 둘이겠는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설령 일어났다 하더라도 작은 유진이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기를... 아직 우리나라에 성폭력에 관한 본격적인 청소년 소설이 없는 가운데 이 책은 그래서 더욱 의미 있는 책이라고 본다. 청소년의 언어로 쓰여져서 청소년들이 쉽고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깊은 울림을 주는 책이다. 많은 청소년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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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 생명의 온기 가득한 우리 숲 풀과 나무 이야기
이유미 지음 / 지오북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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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사님.
광릉 숲에서 보내신 수십 편의 편지를 읽으면서 제 가슴은 마냥 뛰었습니다. 편지를 어루만지고, 잠도 잊은 채 읽고 또 읽곤 했답니다. 어떤 연서보다도 오랫동안 제 가슴을 설레게 해 주었으니까요.

 

언제부터인가, 이름도 모르는 작은 풀과 나무를 보면 미치도록 그들이 알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식물에 관한 책들을 뒤적이며 읽어보지만 여전히 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광릉에서 보내 주신 이 편지를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참 많았어요. 비록 뒤늦게 쓴 답장이 되었지만 그래도 감사의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박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흔히 정치권을 식물 국회라고 표현하는 것을 들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정말 식물들을 모욕하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움직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지만 그들이 종족과 생명을 지켜나가기 위해 얼마나 피땀어린 경쟁을 하는지 이 책을 통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초식동물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서 그 연하디 연한 잎사귀와 줄기에 가시를 키우는 두릅나무... 생존을 위해 그토록 투쟁하고 있는데 감히 식물국회라고 비하하다니요.

 

또한 근친을 막기 위한 식물들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했습니다. 근친 결혼을 하면, 즉 유전자가 같은 것들이 만나면 열성이 나오고, 다양성이 떨어져서 결국 그 종이 도태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근친을 막는다고 하죠. 그래서 소나무는 암꽃이 위에 있고, 수꽃이 아래에 있어서 스스로 자가수분을 막고 있다고요. 이제 소나무가 꽃을 피우면 가까이 다가가서 보아야겠어요. 그래서 소나무에게 말 한마디라도 붙여 보고 싶어요. 오래 오래 건강한 모습으로 이 땅을 푸르게 푸르게 지켜달라고요.

 

그리고 나이테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되었답니다. 인간도 힘들고 아픈 시기를 견딘 자만이 견고해지듯이, 나무도 모진 추위와 눈보라를 견디고 나서야 또 하나의 진한 나이테를 가질 수 있다고 하셨죠. 그래서 겨울을 겪지 않은 나무는 나이테가 없다고... 결국 나이테는 고난을 겪은 나무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아름다운 훈장이 되겠군요. 인간도 모진 고난을 겪고 이긴 자만이 좀더 깊고 넓은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저에게 이 책은 언제든 다시 읽고픈 아름다운 연서랍니다. 이제 곧 봄이 되면 많은 꽃과 나무들이 우리 강산을 아름답게 수놓겠지요? 그 때는 봄의 편지를 읽고 나서 산으로 들로 가봐야겠어요. 그들에게 아는 체도 하며 속삭여 보아야겠어요. 그럼, 그들도 반가이 맞아주겠지요? 다음 편지를 기다리며 이만 줄여야겠어요. 늘 강건하시기를...

 

식물을 사랑하는 어떤 독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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