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쪽빛문고 2
가코 사토시 지음, 이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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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 시절 난 땅을 파고 파고 또 파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땅 속 깊은 곳에는 무엇이 살고 있을까? 궁금했었다. 그러다 지구본을 보고 우리의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는 땅속을 파고 파고 또 파다보면 언젠가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 때 처음으로 땅 속 깊은 곳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눈에 보이는 것, 겉으로 드러난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 같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어느새 겉에 드러난 것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겉이란 결국 몸 속에 있는 것과 더불어(정신적인 면도 포함해서) 그를 존재하게끔 하는 것이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병들어 있다면(마음도 마찬가지로) 그는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지구도 마찬가지다. 지구가 아름다운 것은 바로 땅속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바로 땅 속에서 싹을 틔우며 시작한다. 싹을 틔우고 나면 수많은 뿌리들이 부지런히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땅 위에 있는 잎사귀들은 끊임없이 햇빛을 받아들여 광합성 작용을 해야 한다. 땅 속과 땅 밖에서 부지런히 함께 일해야만이 한 그루의 건강한 나무로 자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땅 속의 일은 간과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땅 속의 비밀을 자세하고 친절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기준은 언제나 인간중심이었다. 모든 것을 인간 중심에서 판단하고 바라보게 되었다. 산이나 들을 가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만 감탄하고 즐겼지, 보이지 않는 작은 생물체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지구상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1mm 밖에 안 되는 진드기, 1㎝의 톡토기, 40㎝의 양파, 2㎝의 나나니벌, 하늘을 나는 55㎝의 말똥가리 새 등 수많은 생명체가 지상과 지하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표면을 중심으로 땅 위에 사는 생물과 땅 속에 사는 생물들, 그리고 식물들의 땅 속과 땅 위의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곤충이나 식물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습도 보여준다. 인간의 지혜는 땅속까지 공간활용을 하고 있다. 보기 싫은 전선이나 하수도관, 상수도관, 가스관 등을 땅 속으로 숨겨 놓기도 하며, 주차장이나 서점, 음식점 등 다양한 생활공간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앞 부분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사계절의 변화를 잘 보여 준다. 식물이나 곤충, 동물들이 계절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보여 주며, 그 다음엔 인간들의 삶, 그리고 암석과 모래가 부식되거나 퇴적하는 모습, 지층이 생겨나는 이유와 조산 운동에서 지진과 화산이 일어나는 원인, 그리고 태양계와 우주까지 확대되어 설명하고 있다. 작은 진드기나 풀 한 포기에서 시작하여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지구와 우주까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주와 지구의 수수께끼는 이 책을 읽는, 또 앞으로 읽을 미래 세대의 과제로 남겨 두었다. 이 책을 읽는 어린이는 우리가 사는 지구는 인간만이 사는 곳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베일에 쌓여 있는 지구와 우주의 수많은 비밀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혹 누군가는 미래의 지구과학자가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친근한 그림과 쉬운 설명으로 과학에 관심이 없는 어린이라도 이 책은 흥미를 갖고 읽게 될 것이다.

 

작가는 그림에도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앞장과 다음 장의 식물들의 차이, 곤충들의 생태, 한 겨울 토끼가 천적으로부터 쫓길 때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달리는지 글로써는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그림으로는 더 많은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림 하나 하나에도 관심을 갖고 보면 더 많은 숨은 보물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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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탑
윌리엄 골딩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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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번역된 윌리엄 골딩 소설이 『파리 대왕』과 이 책, 『첨탑』 뿐이라고 하니 이미 난 두 권을 다 읽은 셈이 된다. 『파리 대왕』은 책을 읽은 후에 영화로도 보았기 때문에 이 책 역시 그런 친근한 맘으로 펼쳤지만, 예상과는 반대로 첫 장부터 만만치 않았다. 강력한 스토리의 흡인력을 보여주었던 『파리 대왕』과 달리 이 책은 주인공 조슬린의 의식의 흐름과 내면 세계에 깔려 있는 욕망을 따라가며 읽다 보니 가독성에 한계를 느꼈다.

 

스토리만 따지자면 이 작품은 아주 간략하다. 영국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성직자가 대성당에 첨탑을 건설하는 과정을 서술해 가는 이야기이다. 그 첨탑을 건설하는 것은 그의 생애를 걸만큼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거기엔 주인공 조슬린의 내적 욕망과 연관되어 있어서, 수시로 그의 의식 세계를 넘나들기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았다.

 

조슬린은 허술한 기초와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사백 피트라는 거대한 높이의 첨탑을 건설하지만 그 첨탑은 무너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의 희생의 대가인지, 주인공 조슬린의 욕망과는 상관없이 진정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징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어도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바벨탑과는 다르게 그 첨탑은 위태롭긴 하여도 건재한다. 바벨탑 역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불경스러운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거기엔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바벨탑은 무너졌다. 신이 될 수 없는 인간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러나 첨탑은 허술한 기초 위에서도 기적처럼 서 있다. 독자는 첨탑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조슬린은 계시(혹은 환상)를 받고 첨탑을 건설하지만 결국 그 계시라는 것은 자신의 비뚤어진 욕망을 대체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알게 된다. 발단 부분에 보면 조슬린의 등에 통증이 온다. 그것은 첨탑을 지으라는 신의 계시로써 등에 천사가 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말에 가서는 등과 척추에 결핵이 있다는 질병으로 드러난다. 그의 욕망은 질병조차 신의 계시로 둔갑한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때로 무지한 믿음은 착시현상이나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조슬린이 결국 할 수 있는 말이란 “죄를 짓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이다. 죄를 지으면서까지 그의 욕망은 실현시켜야 한다.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이름으로...

 

조슬린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성직자의 기품을 지닌 인물은 아니다. 인간적인 자신의 모든 욕망을 절제하고 오직 신의 대리인으로써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인물로 비쳐진다. 조슬린에게 첨탑이란 욕망의 대체물이다. 그 욕망은 첨탑을 세우는 과정에서 사랑을 기만하고, 인간관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신이 되고 싶어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나, 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첨탑의 조슬린이나 결국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욕망의 포로임을 다시 느끼게 해 준다.  첨탑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인간의 헛되고 무모한 욕망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일까?

 

쉽지 않은 독서였다. 영미 비평가들은 재독 삼독을 해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것이라고 하였다지만, 역시 어려운 독서일 것 같다. 나중에 시간 여유가 있다면 깊이 음미하며 다시 읽고 싶다. 그 때는 조슬린에 대해 다른 해석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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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쿠베, 조금만 기다려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초 신타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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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만큼 삶의 웅덩이(혹은 수렁)에 빠질까? 어떤 사람은 수도 없이 빠졌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다섯 손가락도 다 꼽지 않을 만큼 평탄하고 순탄하게 살아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니 중요한 것은 수렁에 빠진 횟수가 아니라 어떻게 그 수렁을 헤쳐 나왔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홀로 버텨내면서 힘들게 헤쳐 나올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주위의 응원과 도움으로 좀더 쉽게 벗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로쿠베처럼...  이 책은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이 읽을 만한 그림책이지만 어른인 내가 읽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표지 그림엔 갈색 강아지가 눈물을 머금은 듯 위를 쳐다보고 있다. (언뜻 보면 강아지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 위로는 찬란하게 빛이 비치고 있다. 첫장을 펴 보면 제목이 쓰여져 있는데 그 밑에는 갈색 항아리 같은 곳 안에 글자만이 있다. 멍멍, 왕왕, 멍멍, 왕왕... 로쿠베의 절망감이 첫장부터 배어져 나온다. 또 한 장을 넘기니 5명의 아이들이 구덩이 속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곤 한마디씩 중얼거린다. 개가 구덩이에 빠지다니 바보라고... 개는 구덩이에 빠지면 안 되나 보다.

 

그러나 바보라고 중얼거린 아이들은 모두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래서 한 목소리로 “로쿠베 힘내, 로쿠베 힘내”하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힘내라고 외쳐서는 로쿠베를 구할 수 없다. 그래서 엄마들을 불러오지만 엄마들도, 골프채를 흔들며 지나가던 아저씨도 모두 무관심하다. 아니, 오히려 사람이 빠진 것이 아니라며 다행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땐 우리의 아이들이 어른들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닐까 조금 걱정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1학년생인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힘내라고 외치며 노래해 주고, 로쿠베가 좋아하는 비누방울 놀이를 해 주는 정도이다. 그러다 칸의 지혜로 로쿠베의 여자 친구를 바구니에 담아 웅덩이 속에 내려보내고 로쿠베와 여자친구 쿠키는 바구니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온다.

이 책의 상황과 그림의 색상은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내용은 결코 어둡지 않다. 어린 아이 다섯 명이, 절망에 빠져있는 강아지 로쿠베를 구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은 따뜻하고 훈훈하다. 또 글은 간결하고 운율이 있어 경쾌하다. 마치 시로 된 이야기를 읽는 듯하다.

“큰일났네, 큰일났어”
“와글와글, 시끌시끌”
“어떡해, 어떡해”
“좋은 생각, 좋은 생각”
“살살 살살, 살살 살살”
“아슬아슬, 아슬아슬”

 

그림도 마음에 든다. 선이 굵은 그림은 아이들의 표정이 잘 살아 있다. 겁먹은 듯한 로쿠베의 눈망울은 로쿠베의 상황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자기를 천사 같은 어린아이 다섯 명이 전심으로 구하려고 애쓰고 있으니 로쿠베는 행복하지 않을까?

 

사족- 쪽수가 나와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골프채를 들고 있는 아저씨가 나오는 그림에
“한가하게 골프채를 흘들며”라고 쓰여 있다. 다음 인쇄할 때에는 ‘흘들며’가 아니라 ‘흔들며’로 제대로 인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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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야월
김도연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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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의 소설집을 읽는다. 이 책에 실려있는 10편의 중단편 중 몇 편은 이미 <현대문학>이나 <문학사상> 같은 여러 문예지에서 읽었다. 그러나 난 그의 소설을 다시 읽고 또 읽고 했다. 하루에 다 읽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글 읽는 속도가 느려서도 아니고, 바쁨 때문만도 아니다. 맘만 먹으면 하룻밤만에 다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우물처럼 깊은 그의 고독에 전염이라도 된 듯, 가슴 저리게 천천히 읽어야 했다.

 

작가들마다 자기만의 고유한 문학 세계를 갖고 있지만 김도연의 세계는 여느 작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변방에서 부르는 그의 노래는 천천히 중앙으로 전해져 온다. 아직 많은 독자층을 거느린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의 책을 읽은 독자라면 독특한 그의 문학 세계에 빠져 버릴 것이다. 이 책은 2006년 동인문학상 1차에 후보작으로 선정되었었다. 선정 이유로 이청준씨는"도시의 언어를 가지고 농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했다. 또한 죽은 조상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대목, 동물이나 귀신하고 대화하는 대목 등은'동양적 상상력'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우리의 이야기 전통을 드러내 보인, 흥미 있는 글쓰기였다"라고 평하고 있다.

 

「흰 등대에 갇히다」작품에선 사향노루를 연구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작품 속에서 사향노루라고 불리는 사내는 십 년 동안 <사향노루, 백년동안의 고독>이란 제목의 글을 ‘창작과 비평’에 기고하였지만 매번 거절당한다. 그가 여기서 ‘백년 동안의 고독’을 언급한 것은 스스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보여 주는 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소설을 쓰고자하는 욕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이청준씨가 지적하였듯, 그의 작품에는 동양적 상상력이라 부를만한 독특한 글쓰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나 고독하다. 도서관 사서가 사향노루와 그냥 노루와의 차이점에 대해서 묻자 그는 순수소설과 대중소설과의 차이라고 말한다. 경찰과의 대화에서 착한 인상의 경찰은 “사향노루 연구는 배가 고파야 할 수 있죠. 아니면 상처가 깊거나...”라고 한다. 세상이 준 상처를 가슴에 안고, 배가 고플 수밖에 없는 순수 소설을 그는 고집하고 있다. 여기에 그의 고독이 있다.

 

그러나 그의 고독은 인간이기에 느껴야 하는 근원적인 고독, 순수 소설을 고집하는 배고픔의 고독뿐만이 아니라 세상과의 불화에서 오는 고독, 운명에 순응하지 못하는 고독이 더 깊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그 고독, 세상과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을 이기기 위해 그는 동물들이나 귀신들과 대화를 나눈다. 「도망치다가 멈춰 뒤돌아보는 버릇이 있다」에서 주인공인 총각은 늙은 사냥개와 대화를 한다.

"워리야...... 인간 세상엔 시란 게 있어. 시가 뭐냐고? 고독한 영혼이 부르는 노래지. 고독한 영혼이 뭐냐고? 삶의 희노애락에 화상을 입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만질 수는 없으나 쉽게 벗어나기도 힘든 무형의 꽃 같은 거야. 꽃말이야. 물론 꽃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그 중에서 어느 꽃이 가장 낫다고 고집할 순 없지만. 내가 볼 땐 말이야. 세상의 오물 속에서 피어난 꽃이 최고라고 봐. 오물이란 곧 환멸이야. 환멸이 피운 꽃! 멋지지 않아?"

 

그는 작품 속에서 시를 쓴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시를. 다만 늙은 사냥개에게 그의 시를 읽어 줄 뿐이다. 세상과 소통하고 싶지만, 세상은 그의 대화에 귀기울여 주지 않는다. 운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운명에 반항하지만 무력하게 벽에 부딪칠 뿐이다. 창공의 왕자인 알바트로스가 지상에 유배되어 세인들의 조롱을 받는 것처럼 그는 고독하다. 그러나 그 고독이 꽃을 피우고 있다. 오물 속에서 피어난 환멸의 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멋진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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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7-08-02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잘 봤습니다. 구입해야겠네요~
 
아주 철학적인 하루
피에르 이브 부르딜 지음, 강주헌 옮김 / 소학사(사피엔티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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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논술이 뜬다고 한다. 논술학원과 논술과 관련한 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논술 시험을 앞두고 있는 학생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그리고 논술과 관련되어서 늘 함께 거론되는 것이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술 시험과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프랑스에선 바칼로레아(우리의 논술 시험과 비슷)철학 시험이 있는 날은 전 국민의 축제가 된다고 하니 먼저 국민의 의식부터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2주 이상 계속되는 시험은 항상 철학으로 시작되고 시험이 끝나는 날, 프랑스의 전 지상파 방송에서는 바칼로레아 시험의 주제에 대해서 각계 인사들이 나와서 토론을 하고, 국민들은 가정에서든, 까페이든 하물며 술집에서조차 그 주제에 대해 공개토론을 한다고 하니, 프랑스 국민들은 그야말로 토론에 굶주린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의 교육 인프라가 그만큼 탄탄하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프랑스는 불어 수업의 경우 교과서가 아닌 문학책들을 돌아가며 읽고 요약, 비판하는 것이 주가 된다고 한다. 문학과 철학의 경계가 없이 공부를 하기 때문에 문학 실력이 좋은 학생은 당연히 철학 시험도 좋은 점수를 받는다. 그것은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처럼 프랑스의 철학자들이 문학을 겸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까뮈의 <이방인>은 그의 철학책 <시지프스 신화>를 쉽게 해석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고등학교 수업을 보면 인문계의 경우, 철학 수업이 일주일에 9시간이나 된다고 한다. 프랑스 인들이 왜 그토록 바칼로레아에 흥분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프랑스 인들은 배우자들의 조건 중에 영리함과 교양이 필수 조건으로 꼽는다고 하니, 우리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대부분 경제력, 외모, 학벌 혹은 착한 남자(착한 여자) 등으로 꼽고 있지 않는가?

 

내가 구구절절이 프랑스의 철학교육과 바칼로레아에 대해서 쓴 것은 바로 이 책 <아주 철학적인 하루>라는 소설이 이러한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프랑스 철학교사가 쓴 소설이다. 필이라는 아이는 어느 날 아침 일어났는데, 모든 것이 어제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왜 다른 것일까? 무엇이 다른 것일까?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부터 거리의 상점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 사는 사람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 느낌과 생각을 따라 행동한 것이 바로 하루가 걸렸다. 말하자면 270쪽에 달하는 이 소설은 필의 하루를 기록한 책이다.

 

우리도 어느 날 문득, 삶이 전혀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사춘기 시절의 어느 날, 생은 예전의 모습과 전혀 다르게, 너무나 낯설게 다가온다. 문제는 그 다름을 어떻게 소화해 내고, 내 것으로 만드느냐일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은 그 낯섦과 다름을 시간에 쫓겨 제대로 생각하지도 못한 채, 다람쥐 체 바퀴 돌 듯 하는 일상에 매몰되어 그 소중한 감정을 놓쳐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필은 그 낯섦을 하루 종일 생각하고 고민하며 방황을 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철학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은 드디어 필이 철학하기에 들어선 것을 기뻐하며 함께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고, 여행을 하면서 그 소중한 생각을 자기 것이 되도록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비록 소설이지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것은 이 글을 쓴 작가가 한 때 프랑스 철학 교사였고, 실제로 프랑스 교육에선 이러한 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서도 일주일에 4시간 이상이 철학 수업을 하고 있으니 프랑스 인들의 논리적인 사고와 철학적인 삶은 우리 삶과 많이 대조됨을 볼 수 있다.

 

주입식 교육만을 강조하고, 오직 중고등학교 때 공부의 목적은 좋은 대학 입학에만 국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청소년들이 언제 책을 읽고, 언제 토론을 하며, 생각을 깊이 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대입 논술고사는 석박사 학위 출신이 쓸 수 있는 수준의 문제를 내고 있으니 대입 논술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나 학부모들은 당황하고, 때문에 논술 학원이나 과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갓 태어나서 모유나 먹을 아이에게 스테이크를 먹으라는 것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근본적으로는 교육부터 바뀌어야 하고, 또 학생들은 좀더 철학하는 연습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철학하기는 생각하기부터이다. 생각하기는 연습이고, 누적된 연습은 습관이 되어서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생각을 하게 하고, 삶을 좀 더 풍부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필요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프랑스의 교육이 부러웠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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