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친구 이야기 카르페디엠 19
안케 드브리스 지음, 박정화 옮김 / 양철북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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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는 내내 난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인데도 심호흡을 하며 힘들게 읽어야 했다. 어린 소녀 유디트의 고통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유디트의 억눌린 비명이 자꾸 내 고막을 때렸고, 분노로 인해서 난 숨이 막혀 왔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른이 아이일 수도 있고, 남자가 여자를,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약자로서는 대책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강자의 횡포이다. 

 

 단지 자신이 싫어하는 어떤 사람을 닮았기 때문에, 또는 어두운 자신의 과거가 기억나기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그것도 친엄마가 딸을... 어쩌면 유디트의 엄마 코니도 피해자일 수도 있다.(설령, 그렇다 해도 용납할 수 없다)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당한 멸시와 학대는 결국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딸에게 행사하고 있으니... 그래서 유디트를 실컷 학대하고 나서는 울면서 용서를 구한다.

 

 “너를 때리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게 나보다 강해. 나 자신을 멈출 수가 없어."

 그리고는 그 죄책감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그 다음 날은 특별히 직장에 휴가를 내서 맛있는 음식을 해 준다거나, 딸의 가방이나 빨간 티셔츠를 사오기도 한다. (이것조차 언제나 그러는 것은 아니다.) 자아가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다. 나이만 먹어 신체적으로는 어른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코니는 오히려 자신의 딸 유디트보다도 더 유치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컷 두들겨 패고는 미안하다고 하는 엄마, 자신도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고 하는 엄마를 어린 유디트는 이해하기 힘들다. 조울증 환자처럼 기분에 따라 딸을 대하는 엄마를 보며 유디트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늘 긴장하면서 살아야 하는 삶,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을 걷고 있는 듯한 유디트의 삶은 너무 가혹하기만 하다. 매맞은 것을 숨기기 위하여 늘 거짓말을 해야 하고, 그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유디트의 하루 하루 삶이란 폭탄을 안고 사는 것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이런 유디트의 위태로운 삶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학교 선생님이나 동생 데니스의 유치원 보모인 소피나 마음을 나누는 친구 미하일에게도... 그러나 엄마와 함께 있는 집안에서의 삶이 사막 같다면, 미하엘과 미하엘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은 오아시스와 같은 충만한 시간이다. 점심 때마다 미하엘 집에서 먹는 점심은 건조한 유디트의 삶에 윤기를 주고 온기를 주는 일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너무나 짧고, 그것조차 언제 엄마에게 들킬지 몰라 불안하기만 하다.

 

 미하엘은 유디트에게서 오래 전에 자신의 내부에 있던 모습을 발견한다. 물론 처음엔 자신이 힘들어 할 때, 진정으로 자기를 이해해 준 여자친구 스테피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에 유디트에게 다가가지만 곧 유디트에겐 자신의 존재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미하엘 역시, 이모집에서 살기 전엔 늘 엄격하고, 권위적인 아빠의 그늘에서 숨조차 쉬기 버거울 정도로 숨막힌 생활을 하였다. 미하엘의 난독증을 게으르고 머리 나쁜 것으로만 여기며 무시하던 아빠. 그로 인해 미하엘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며 위축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결국 아빠에 대한 공포는 가출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모집에 와서 살게 되면서 비로소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그 가족의 일원으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디트에게 미하엘은 숨구멍이다. 비록 엄마에게 구타를 당하는 사실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미하엘과 함께 하는 시간은 엄마에 대한 공포를 잊게 해주는 탈출구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에 헤이그로 가는 열차표를 사는 유디트를 향해 난 응원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고통없는 새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안타까운 것은, 이웃집 할아버지의 태도이다. 분명히 할아버지는 유디트의 비명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남의 일에 간섭하고 참견하면 불편해진다는 이유로 방관하고 있다. 그런 태도들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벼랑끝으로 몰고 가고 있는가? 또한 리아 이모도 조금만이라도 유디트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좀더 일찍 엄마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우리 사회는(외국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지만) 남의 일에, 특히 그것이 가족과의 일이라면 더욱더 간섭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젠 그것이 가족과의 일이라도 약자가 강자의 폭력으로 영혼과 육신이 피폐해져 가고 있다면 이웃이, 또는 국가가 나서서 막아야 된다.

 

 이 책은 소설이다. 즉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때론 현실이 소설보다 더 리얼하고 냉혹할 때가 있다. 가끔 TV에서나 거리에서 아동학대의 현주소를 보면서 몸서리치곤 했다. 단지 약자이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불합리한 일들이 이젠 일어나지 않기를(아니, 줄어들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이런 소설이 그냥 소설로써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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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이슬람 바로 알기
이희수 지음 / 청솔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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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9.11 테러 이후 이슬람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폭발적이지만, 이슬람에 대한 시각은 미국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슬람 사람들은 자살테러까지 할 정도의 무지막지한 사람들이거나 여자의 지위는 최하위여서 여성 인권은 사각지대에 있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의 기사 내용을 보더라도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보다는 늘 과격한 행동주의자들로만 묘사되어 왔다. 특히 어린이들이라면 테러나 이슬람 정도의 이야기는 들었어도 이슬람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들인지는 특별히 관심을 갖거나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듣지 않았다면 제대로 알 수 없다. 이 책은 그런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씻어 줄뿐만 아니라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지식도 얻게 해 준다.

 

탈레반, 시아파, 인샬라, 코란 등 이슬람과 관련된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과 미국은 왜 그토록 싸움을 하고 있으며 왜 그렇게 서로를 증오하고 있는지 이 책을 읽다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그것은 오래 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처세술도 한 몫하고 있다.

 

오랜 세월 디아스포라로 떠돌던 이스라엘 민족은 오래 전에 자신들이 살았던 팔레스타인 땅에 국가를 건설하고자 꿈을 꾸고 있을 때, 영국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자기네를 도와서 전쟁에서  이기면 국가를 건설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에게도 싸움에서  이기면 그들에게 독립국가를 세우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싸움은 이겼지만 둘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때부터 갈등은 시작되었다.

 

그러다 미국이 제 2차 세계대전 후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로 나누었는데, 곡창지대나 아랍인 공장의 40%를 유대인 땅으로 배정하여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미국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거기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전쟁이 있을 때마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편을 들어주었고, 네 번의 전쟁에서 모두 팔레스타인이 졌기 때문에 팔레스타인들은 미국을 더욱 싫어하게 된 것이다.

 

지중해의 화약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이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공존하는 지혜를 짜내야 한다. 거기에는 미국이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도 중요하다. 언제나 극단으로 가면 평화는 오지 않으며 테러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이슬람의 문화, 생활상, 정치, 경제, 인물 등 다양한 방면의 모습들을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있어서 어린이들이 이슬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세계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좀더 객관화되고 이슬람에 대한 편견도 줄어지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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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초콜릿 공장 (양장) - 로알드 달 베스트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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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이 단어만 중얼거려도 벌써 입안엔 스르르 단물이 고이고 침 한번 꼴깍 삼키게 된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감미롭고, 맛있는 초콜릿!! 초콜릿은 단순히 맛있는 간식의 하나가 아니다. 발렌타인 데이로 인해 초콜릿이 하나의 상품으로써 매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는 상품으로써의 가치뿐만 아니라 연인에게 내 맘을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우울할 때는 기분을 상승시켜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에게 초콜릿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빨이 썩고, 뚱뚱하게 되고, 건강에 해롭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아이들은 초콜릿의 달콤함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찰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너무나 가난한 찰리는 그 좋아하는 초콜릿을 일년에 단 한번밖에 먹지 못한다. 오직 찰리 생일날에... 찰리의 생일날 초콜릿을 선물하기 위해 찰리의 온 가족은 (엄마 아빠와,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등 여섯 식구) 조금씩 돈을 모으는 것이다. 그런 찰리에게 어마어마한 행운이 따라온다. 세계적인 초콜릿 공장 사장인 윌리가 자기 회사에서 만든 초콜릿에서 황금빛 초대장을 발견한 전국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공장을 견학시키고, 평생동안 먹을 수 있는 초콜릿이나 사탕 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물론 찰리는 그 생일날 황금빛 초대장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단번에, 그리고 쉽게 얻어진다면 재미는 반감될 것이다. 이야기는 잔뜩 기대하고 있던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면서, 그럼 어떻게 얻게 되는 것이야 하며 호기심을 갖고 다시 기대하게 한다. 두번째 기회인 친할아버지가 전 재산(?)을 털어서 사온 한 개의 초콜릿에서도 역시 황금빛 초대장은 나오지 않는다. 그 황금빛 초대장은 너무나 우연으로(혹은, 행운으로) 얻게 된다. 그래서 찰리는 전국의 뉴스 거리가 되어왔던 비밀에 싸인 윌리의 초콜릿 공장을 견학하게 되고, 평생동안 먹을 수 있는 초콜릿과 사탕 등 간식거리를 제공받게 된다.

 

찰리에게 황금빛 초대장을 얻기란 한강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요원한 일이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어쨌든 윌리네 초콜릿을 사먹는 어린이에게는 확률은 적지만 누구에게나 기회는 주어지는 것이니까. 물론 인위적인(?) 행운도 있을 것이다. 버루카 솔트처럼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들어주는 아빠가 있기에 솔트는 황금빛 초대장을 얻게 된다. 땅콩공장의 사장인 솔트 아빠는 수십만 개의 초콜릿을 사들인다. 그리고는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며칠동안 포장지를 뜯어서 결국 황금빛 초대장을 얻는다. 황금빛 초대장이 나올 때까지 그렇게 초콜릿을 사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찰리는 오직 하늘(?)이 허락한 행운을 안고 공장에 들어가게 된다. 그 공장은 아이들의 입을 딱 벌어지게 할 만큼 어마어마하고, 굉장하고, 대단하고, 특별한 곳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미칠 것인가 놀랄 정도이다. 상상력의 극점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버릇이 없는 아이, 먹을 것만 찾고 제멋대로인 아이는 윌리가 비밀리에 계획한 게임에서 탈락하고, 최후의 승자인 찰리에게는 그 공장까지 얻게 되는 축복을 누린다.

 

동화의 순기능은 무엇보다 흥미이다. 그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생각할 힘을 길러주고, 나름대로 교훈성도 띄어서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에 대한 자세를 배우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그런 기능을 다 갖추었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은 물론 초콜릿이나 사탕, 껌 등 일상생활에서는 꿈도 못 꿀 신기한 물건들 때문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어느새 네 명의 버릇없는 다른 아이들보다도 가난하지만 착하고, 효성스러우며 예절바른 찰리의 편이 되어 함께 신나는 모험을 하며 그의 행운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다. 이 책은, 아이들에겐 신나는 상상의 나라를 모험하게 하고, 어른들은 잠시 동심의 세계에 빠지게 한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영화도 꼭 보고 싶다. 글로 표현한 상상의 세계와, 영상으로 펼쳐진 동화의 세계를 비교해 보며 감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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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널 사랑해
교코 모리 지음, 김이숙 옮김 / 노블마인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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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슬픔에 색깔이 있다면 어떤 색깔일까? 눈이라도 올 것 같은 스산한 날의 잿빛 하늘, 세상을 다 삼켜버릴 듯한 짙은 회색빛 하늘일까? 냄새가 있다면, 짭짜름하고도 시큼한 바다 냄새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은 잿빛 하늘처럼 낮게 슬픔이 깔려있었고, 어디선가 짭짜름한 바다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책 속의 배경에는 바다와 관련된 어떤 것도 없지만 난 바다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슬픔의 냄새였다. 그 슬픔은 단순히 유키의 슬픔만이 아닌, 나의 유년시절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어떤 기억과 조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유키의 엄마 시즈코. 그녀는 열두 살 된 딸을 두고 자살을 한다. 거기다 딸에게 남긴 유서에는 “이런 짓을 저지른다해도 널 사랑한다는 걸 믿어주겠니?...” 하면서 그것만이 최선의 길이었음을 알아달라고 한다. 솔직히 그런 시즈코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천성적으로 유약하던지, 아니면 유서처럼 딸은 강하기에 자신이 사라진다 해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남편에 대한 배신으로 피폐해진 영혼을 더 이상 지탱하기 힘들다고 느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자살은 남겨진 사람에겐 그 어떤 죽음보다도 더 한 고통을 안겨 준다. 사람은 병사할 수도 있고, 사고사도 있을 수 있지만 자살만큼은 남겨진 사람에게 죄책감을 갖게 한다. 그 죄책감과 그리움과 상실감은 밝고 건강했던 유키를 고집스럽고, 말이 없는 외곬수적인 아이로 만든다. 엄마가 자살로 죽은 것을 알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이. 눈물을 흘릴 수조차 없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작가는 알고 있다. (이 책은 작가의 자서전적인 성장소설이기에.)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는 슬픔은 그래도 견딜만한 것이기에.

 

유키에게 그 슬픔의 뿌리는 얼마나 깊고 예리한 것인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유키를 유년시절과 청소년기 시절 내내 붙들어 놓고 있다. 달리기를 하면서도, 가사시간에도, 외갓집에 가서도,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하면서도 엄마에 대한 기억은 그저 그리움이고 슬픔이다. 타인처럼 늘 싸늘한 아빠, 주변 사람의 이목에만 관심이 있어서 못된 계모는 되기 싫어하는 이중적인 새 엄마. 그사이에서 유키는 숨쉬기조차 버겁다. 유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층 자기 방에서 숨죽이고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엄마에 대한 기억들을 스케치하는 일이다. 엄마가 만들어 준 옷이며, 엄마와 함께 했던 기억들을 스케치북에 조심조심 옮기는 일 뿐...

 

유키는 엄마 아빠의 불화를 보고 사랑을 거부한다. 엄마 역시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죽었기에 유키에게 사랑이란 곧 슬픔일 뿐이다.

 

 “내게 필요한 건 우정이지 사랑이 아니야. 이사무는 가장 좋은 친구야. 그걸로 만족해야 해. 또한 사랑이란 어떤 것이든 슬픔으로 끝나니까. 더 이상의 슬픔은 싫어”(p245)

 

 대학생이 되어 남자 친구의 호의를 알고 좋아하지만 스스로 마음 문을 걸어 잠근다. 엄마의 친구이자 이모와의 재혼으로 이모부가 될 기무라 씨에게도

사람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아무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예요. 어느 쪽이든 결국엔 아무 것도 없을 테니까요?” 라고 한다. 그러나 기무라씨는 “지금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나중에 나빠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어떤 면에선 더 많은 의미가 있어...”(p187)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제 유키는 알 것이다. 그래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엄마가 “그래도 널 사랑해”라고 한 것을 알 듯이... 이제 유키는 엄마의 소원대로 강한 아이가 된 것이다. 슬픔의 뿌리는 가슴 깊숙히 박혀져 있지만, 그 뿌리가 결국 슬픔을 극복하고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눈앞이 뿌예져서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눈물을 닦았는지 모른다. 감정이 절제된 문장은 오히려 감정이 과잉된 것보다 더 누선을 자극한다. 가슴속까지 먹먹해지는 기분. 명치끝이 아파 오는 슬픔... 깊어 가는 가을날, 한없이 나를 울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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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김형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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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에 가장 선명한 것, 가장 확실한 것이 있을까? 내 것이라고 확고히 믿었던 것들... 그 중에서도 내 사랑만큼은 요지부동의 확실한 것이라고 믿고, 결혼하고 살아가지만 어느 날 그것이 허위였음을 알았을 때, 그 배반의 상처는 지구가 빛을 잃고 태양이 사라지는 것만큼 암담한 일일 것이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유기물이라 변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다시 살아가는 것, 쓸쓸한 깨달음이지만 그것이 사람이 살아간다는 일이겠지. 그러다 또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일... 이 책은 바로 배반당한 사랑 위에 다시 힘들게 새 사람을 만나고 갈등하고 번뇌하는 사랑의 역사를 서정적으로 묘사한다.

 

그래, 그런 사랑도 있을 것이다. 인수와 서영이 같은 사랑도... 사랑엔 정답이 없으니까. 수천 수만 명이 하는 사랑은 수천 수만 가지의 모습일 것이고, 수천 수만 가지의 애틋함과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연민으로 시작되었든, 복수로 시작되었든, 또는 외로움과 배반의 상처와 상실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시작되었든 간에 그것도 사랑인 것이다. 이들의 사랑엔 사랑의 속성인 이중성과 배타성, 원시성, 통속성, 불안과 의심 등 그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한 가지 더 가진 것이 있다면, 바로 금기에 대한 죄책감이다. 아니, 금기에 대한 욕망이다. 


 “오래되고 무겁고, 완강한 금기를 깨트리는 순간이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충만하고 행복했다는 사실을, 아마도 모든 금기의 뒤편에는 치명적인 쾌락이 존재하며, 그 쾌락만한 응보가 따를 거라는 점을...”(p140)

 

기록이 깨기 위해 존재하듯이, 금기 역시 깨기 위해, 넘어설 수 있기에 그 단어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한번 금기를 넘어선 그들의 사랑은 좀더 대담해지고, 좀더 애틋해지고, 더 격정적이지만 그 사랑은 언제든지 흔들리 수밖에 없는 불안함을 안고 있다. 아직 그들에겐 간호해야 할 배우자들이 생과사를 넘나들며 의식을 잃은 채 병실에 누워 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배우자들의 작은 미동에도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위태할 수밖에 없다.

 

서영의 배우자가 죽음으로써 네 개의 축을 이루며 견고히 서 있던 관계는 무너지면서 그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인수와 서영, 그들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랑이 추억이 되면 기억할만한 아름다운 일이 되지만, 그들의 사랑은 오래 떨어져 있음에도 아직 추억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잊기 위해 노력하지만, 여전히 가슴에 칼날을 긋는 아픔으로 현재진행형이다. 한번 깨어진 사랑은 다시 회복할 수 없고, 새 사랑은 그리움으로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래서 눈이 오는 어느 봄날... 인수와 서영은 각자 그들이 처음 만났던 그 곳을 향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의 사랑은 색과 빛으로 표현된다. 인수의 아내 수진은 노란색의 이미지를 지닌 여자이다. 열정적이고 늘 생동감이 넘치는 여자. 인수의 직업이 조명 오퍼레이터라 그런지 빛과 색깔로 표현되는 이들의 사랑은 때로는 환상적이고 몽환적이다.

 

이 책은 영화와 동시에 출간되어서 화제가 되고 있지만, 난 굳이 영화 때문이 아니라 작가 김형경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이 작가의 글은 소설뿐만이 아니라 에세이까지 거의 다 읽었다. 좋아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떤 끌림, 때론 불편한 느낌을 가지면서도 중독성을 띠고 있다. 그녀의 작품 『세월』에서 보았던 바보 같았던 ‘그 여자’에 대한 연민으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사십 중반을 넘어선 작가의 글에선 이제 그 나이에서만 가질 수 있는 삶에 대한 성찰과 사유의 깊이가 느껴진다. 그것이 지리멸렬한 일상이든, 불륜 같은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든,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를 느끼게 해 준다. 그게 바로 세월의 힘이던가?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이 책으로 충분하다. 사랑은 늘 쓸쓸한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서늘하게 느끼게 해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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