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김형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우리의 삶에 가장 선명한 것, 가장 확실한 것이 있을까? 내 것이라고 확고히 믿었던 것들... 그 중에서도 내 사랑만큼은 요지부동의 확실한 것이라고 믿고, 결혼하고 살아가지만 어느 날 그것이 허위였음을 알았을 때, 그 배반의 상처는 지구가 빛을 잃고 태양이 사라지는 것만큼 암담한 일일 것이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유기물이라 변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다시 살아가는 것, 쓸쓸한 깨달음이지만 그것이 사람이 살아간다는 일이겠지. 그러다 또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일... 이 책은 바로 배반당한 사랑 위에 다시 힘들게 새 사람을 만나고 갈등하고 번뇌하는 사랑의 역사를 서정적으로 묘사한다.

 

그래, 그런 사랑도 있을 것이다. 인수와 서영이 같은 사랑도... 사랑엔 정답이 없으니까. 수천 수만 명이 하는 사랑은 수천 수만 가지의 모습일 것이고, 수천 수만 가지의 애틋함과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연민으로 시작되었든, 복수로 시작되었든, 또는 외로움과 배반의 상처와 상실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시작되었든 간에 그것도 사랑인 것이다. 이들의 사랑엔 사랑의 속성인 이중성과 배타성, 원시성, 통속성, 불안과 의심 등 그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한 가지 더 가진 것이 있다면, 바로 금기에 대한 죄책감이다. 아니, 금기에 대한 욕망이다. 


 “오래되고 무겁고, 완강한 금기를 깨트리는 순간이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충만하고 행복했다는 사실을, 아마도 모든 금기의 뒤편에는 치명적인 쾌락이 존재하며, 그 쾌락만한 응보가 따를 거라는 점을...”(p140)

 

기록이 깨기 위해 존재하듯이, 금기 역시 깨기 위해, 넘어설 수 있기에 그 단어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한번 금기를 넘어선 그들의 사랑은 좀더 대담해지고, 좀더 애틋해지고, 더 격정적이지만 그 사랑은 언제든지 흔들리 수밖에 없는 불안함을 안고 있다. 아직 그들에겐 간호해야 할 배우자들이 생과사를 넘나들며 의식을 잃은 채 병실에 누워 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배우자들의 작은 미동에도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위태할 수밖에 없다.

 

서영의 배우자가 죽음으로써 네 개의 축을 이루며 견고히 서 있던 관계는 무너지면서 그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인수와 서영, 그들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랑이 추억이 되면 기억할만한 아름다운 일이 되지만, 그들의 사랑은 오래 떨어져 있음에도 아직 추억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잊기 위해 노력하지만, 여전히 가슴에 칼날을 긋는 아픔으로 현재진행형이다. 한번 깨어진 사랑은 다시 회복할 수 없고, 새 사랑은 그리움으로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래서 눈이 오는 어느 봄날... 인수와 서영은 각자 그들이 처음 만났던 그 곳을 향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의 사랑은 색과 빛으로 표현된다. 인수의 아내 수진은 노란색의 이미지를 지닌 여자이다. 열정적이고 늘 생동감이 넘치는 여자. 인수의 직업이 조명 오퍼레이터라 그런지 빛과 색깔로 표현되는 이들의 사랑은 때로는 환상적이고 몽환적이다.

 

이 책은 영화와 동시에 출간되어서 화제가 되고 있지만, 난 굳이 영화 때문이 아니라 작가 김형경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이 작가의 글은 소설뿐만이 아니라 에세이까지 거의 다 읽었다. 좋아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떤 끌림, 때론 불편한 느낌을 가지면서도 중독성을 띠고 있다. 그녀의 작품 『세월』에서 보았던 바보 같았던 ‘그 여자’에 대한 연민으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사십 중반을 넘어선 작가의 글에선 이제 그 나이에서만 가질 수 있는 삶에 대한 성찰과 사유의 깊이가 느껴진다. 그것이 지리멸렬한 일상이든, 불륜 같은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든,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를 느끼게 해 준다. 그게 바로 세월의 힘이던가?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이 책으로 충분하다. 사랑은 늘 쓸쓸한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서늘하게 느끼게 해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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