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널 사랑해
교코 모리 지음, 김이숙 옮김 / 노블마인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슬픔에 색깔이 있다면 어떤 색깔일까? 눈이라도 올 것 같은 스산한 날의 잿빛 하늘, 세상을 다 삼켜버릴 듯한 짙은 회색빛 하늘일까? 냄새가 있다면, 짭짜름하고도 시큼한 바다 냄새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은 잿빛 하늘처럼 낮게 슬픔이 깔려있었고, 어디선가 짭짜름한 바다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책 속의 배경에는 바다와 관련된 어떤 것도 없지만 난 바다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슬픔의 냄새였다. 그 슬픔은 단순히 유키의 슬픔만이 아닌, 나의 유년시절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어떤 기억과 조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유키의 엄마 시즈코. 그녀는 열두 살 된 딸을 두고 자살을 한다. 거기다 딸에게 남긴 유서에는 “이런 짓을 저지른다해도 널 사랑한다는 걸 믿어주겠니?...” 하면서 그것만이 최선의 길이었음을 알아달라고 한다. 솔직히 그런 시즈코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천성적으로 유약하던지, 아니면 유서처럼 딸은 강하기에 자신이 사라진다 해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남편에 대한 배신으로 피폐해진 영혼을 더 이상 지탱하기 힘들다고 느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자살은 남겨진 사람에겐 그 어떤 죽음보다도 더 한 고통을 안겨 준다. 사람은 병사할 수도 있고, 사고사도 있을 수 있지만 자살만큼은 남겨진 사람에게 죄책감을 갖게 한다. 그 죄책감과 그리움과 상실감은 밝고 건강했던 유키를 고집스럽고, 말이 없는 외곬수적인 아이로 만든다. 엄마가 자살로 죽은 것을 알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이. 눈물을 흘릴 수조차 없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작가는 알고 있다. (이 책은 작가의 자서전적인 성장소설이기에.)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는 슬픔은 그래도 견딜만한 것이기에.

 

유키에게 그 슬픔의 뿌리는 얼마나 깊고 예리한 것인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유키를 유년시절과 청소년기 시절 내내 붙들어 놓고 있다. 달리기를 하면서도, 가사시간에도, 외갓집에 가서도,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하면서도 엄마에 대한 기억은 그저 그리움이고 슬픔이다. 타인처럼 늘 싸늘한 아빠, 주변 사람의 이목에만 관심이 있어서 못된 계모는 되기 싫어하는 이중적인 새 엄마. 그사이에서 유키는 숨쉬기조차 버겁다. 유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층 자기 방에서 숨죽이고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엄마에 대한 기억들을 스케치하는 일이다. 엄마가 만들어 준 옷이며, 엄마와 함께 했던 기억들을 스케치북에 조심조심 옮기는 일 뿐...

 

유키는 엄마 아빠의 불화를 보고 사랑을 거부한다. 엄마 역시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죽었기에 유키에게 사랑이란 곧 슬픔일 뿐이다.

 

 “내게 필요한 건 우정이지 사랑이 아니야. 이사무는 가장 좋은 친구야. 그걸로 만족해야 해. 또한 사랑이란 어떤 것이든 슬픔으로 끝나니까. 더 이상의 슬픔은 싫어”(p245)

 

 대학생이 되어 남자 친구의 호의를 알고 좋아하지만 스스로 마음 문을 걸어 잠근다. 엄마의 친구이자 이모와의 재혼으로 이모부가 될 기무라 씨에게도

사람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아무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예요. 어느 쪽이든 결국엔 아무 것도 없을 테니까요?” 라고 한다. 그러나 기무라씨는 “지금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나중에 나빠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어떤 면에선 더 많은 의미가 있어...”(p187)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제 유키는 알 것이다. 그래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엄마가 “그래도 널 사랑해”라고 한 것을 알 듯이... 이제 유키는 엄마의 소원대로 강한 아이가 된 것이다. 슬픔의 뿌리는 가슴 깊숙히 박혀져 있지만, 그 뿌리가 결국 슬픔을 극복하고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눈앞이 뿌예져서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눈물을 닦았는지 모른다. 감정이 절제된 문장은 오히려 감정이 과잉된 것보다 더 누선을 자극한다. 가슴속까지 먹먹해지는 기분. 명치끝이 아파 오는 슬픔... 깊어 가는 가을날, 한없이 나를 울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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