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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그린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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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왕립 증기선 메데이아호에서 책은 시작된다. 왜 배이름이 신화 속 마녀일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배 안에 탑승자들이 향하는 곳이 악몽 공화국인 지옥의 아이티이기 때문일까......


독재자 파파 독에 의해 관광객이 끊겨 트리아농 호텔의 영업이 어려워진다. 브라운은 호텔을 팔기 위해 매수자를 알아보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배에서 미국 대선 후보였으며 채식주의자인 스미스 부부, 자신을 월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소령이라는 존스, 그리고 미스터리한 페르난데스를 만나게 된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마주하게 된 것은 사회복지부 장관이었던 닥터 필리포의 시체였다. 그 순간 배에서 만났던 채식주의자 스미스 부부가 찾아온다. 팽팽한 긴장감은 브라운의 <아마 거지일 겁니다>라는 말에 탁! 끊어졌다. 그렇게 위기를 넘긴 브라운은 과연 비밀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누가 내 아들 아니랄까 봐. 지금은 무슨 역을 연기하고 있는 거니? "

어머니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의미를 정확히 모르겠다. P105


어머니에게 받은 엽서 한 장에 아이티로 온 브라운에게 그의 어머니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그녀는 트리아농 호텔을 유산으로 남긴다. 유언장을 찾다 발견한 레지스탕스 훈장에 진짜 수여받았을지, 훔쳤을지, 사랑의 징표로 받았을지 의구심을 가진다. 그리고 백작부인이라는 것도 진짜일지 의심을 한다.


그는 어머니의 모든 것을 연기로 본다. 그의 어머니가 마르셀을 사랑한 것도 레지스탕스 훈장을 받은 것도 백작부인인 것도 연극이었을까? 그녀는 왜 브라운을 아이티로 불렀을까?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서?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들을 남길 이가 아들인 브라운뿐이라서? 그렇다기에는 <기분이 엉망이야. 네가 여기로 와주면 좋겠구나. 엄마>라는 문장이 애매하다.


우리는 믿음이 없다. -중략- 우리는 그저 계속 살아가기를 선택하고,

'지구가 매일 운행하는 궤도를 따라 돌았다. 바위와 돌과 나무와 함께.' P406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부탁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 한 가지 믿음을 버렸다 해서 모든 믿음을 버리진 마십시오. 우리가 잃은 믿음에는 언제나 대안이 있기 마련이랍니다. 아니, 다른 가면을 쓴 같은 믿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P418


자칭 존스 소령이 말하는 것들은 의심스럽다. 월남전 참전도, 물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도 의심스럽지만 그는 유쾌하여 주위의 모든 이들을 웃게 한다. 메르 카트린네의 탱탱, 브라운의 연인인 마르타, 그녀의 남편 루이스와 아들 앙헬, 그들의 계 등 모두 존스의 우스꽝스러운 연극의 관객과 같은 모습이다. 존스의 희극은 언제 끝이 났을까? 아니 끝난 적이 없었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배우 모습이었을 듯하다.


믿음이 없다는 브라운과 믿음을 버리지 말라는 존스의 문장의 대비가 인상 깊었다. 모든 것을 잃은 것은 같은데 왜 두 사람은 이리 다른 것일까? 오히려 브라운의 상황이 존스의 상황보다 더 나으며 스미스 부부를 비롯해 필리포 등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은 브라운이 믿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당신은 믿음을 잃었군요.>라는 닥터 마지오의 말에 <믿음에도 한계가 있잖습니까?>로 답하는 브라운의 대답을 깊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믿음의 한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누구의 문제일까? 상대는 진실을 말하는대 '나'는 의심을 하게 된다면, 그로 인해 잃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설득하지 못한 이? 확신을 주지 못한 이? 그동안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돌아보게 하였다.


<잃은 믿음에는 언제나 대안이 있다>는 말이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폭력은 불완전한 자비이고, 무관심은 완벽한 이기심이니까요. P413>이라는 문장이 그레이엄 그린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아이티의 상황에 대한 기사를 몇 번 발행했지만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책의 글 안에서도 미국의 원조를 바라는 파파 독과 득실의 이해관계를 따지는 미국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레이엄 그린은 저널리스트로의 능력보다 소설가로 아이티의 독재와 불합리를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 책을 내었다.


<무관심>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투명이 된다. 불합리에 맞서기보다 모른 척 지나가는 것이 현재는 피해를 덜 보는 것 같겠지만 그 이기심의 대상이 어느 순간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본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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