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1930 어느 영국 여인의 일기
E. M. 델라필드 지음, 박아람 옮김 / 이터널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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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부터 유쾌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거절하기 힘든 누군가의 방문이 반갑지 않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일기는 누구에게 보일 필요가 없으니 마음에 있는 소리를 그냥 풀어놓으면 된다. 책을 받고 연초에 구입했으나 책장 한구석으로 사라진 다이어리를 주섬주섬 꺼냈다. 잠깐이지만 썼던 일기들을 들여다보니 새로웠다. 5월 8일 어버이날에 큰아들이 뜬금없이 화분을 하나 선물했다. 그동안 간간이 선물 받은 대부분의 화분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몇몇 화분은 친정엄마에게 보내어져서 잘 자라났었다. 뱅갈 고무 나무라며 물을 가끔씩만 주어도 잘 자라난다 한다고 해서 사 왔다고 한다. 엄마의 지난 행적들을 너무 잘 아는 아들이다. 그럼에도 왜 굳이 화분을 선물한 것인지 의문이긴 하다.


(소소한 일상에서 진실만을 얘기하기란 너무 어렵다. 나만 그런 걸까? 내가 유별난 탓일까. 아니면 누구나 그럴까? 순간 목사님 아내에게 물어보고픈 충동이 들었지만 참는다.) P66


글을 읽다 재미난 사실들이 있었다. 가끔 주석 비슷하게 적혀 있는 메모들이나 작은 글씨들의 글들이 진짜 진심인 것 같았다. 그러한 글들에서 재미난 위트가 느껴져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일기를 적으면서 왜 메모를 별도로 하거나 속마음을 따로 적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부분이 책을 전체적으로 밝고 경쾌하게 만들었다. 책을 읽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가끔 크게 웃으면 옆에서 신랑이 왜 웃는지 물끄러미 바라볼 때도 있었다. 신랑을 보며 로버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저녁 식사 후 로버트는 <타임스>를 읽다 잠이 든다.」 「하지만 로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침 에설이 들어오는 바람에 대화가 완전히 끊긴다.」라며 타임지를 보다 잠이 들거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는 로버트의 모습이 자주 언급된다. 지금도 주변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남편들의 모습이다. 100여 년 전이나 현재나 별다르지 않은 모습이 신기하였다.


로빈의 부탁으로 카드를 모으기 위해 기차에서 만나 처음 보는 신사에게도 카드를 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을 보니 엄마들의 모성애가 발휘될 때는 가끔 불가능한 일도 하는 것 같다. 홍역에 걸린 로빈과 비키를 간호하다 본인에게도 홍역이 옮아 고생하는 모습에서 어릴 적 큰아들과 작은 아들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을 때를 떠올리기도 하였다. 비키의 가정교사인 프랑스인 마드무아젤(아가씨라는 뜻일 텐데 프랑식으로는 그렇게 하는듯하다)도 종종 깨알 웃음을 선사하였다. 프랑스어라 아래 해석을 일일이 찾아보다 흐름이 끊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읽는 재미가 있었다. 프랑스어만 따로 메모해서 표현을 익혀도 될 것 같다.


가끔은 동네 이웃과 수다를 떨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여성회 등 공동체 활동, 약간의 허영심도 있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줌마이다. 경제적 어려움은 있지만 가끔 참을 수 없는 충동구매를 하고 아이들의 말썽에 머리를 흔들고 남편에게 대화를 시도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도 우리 주변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이웃들의 모습에 주변인들을 대입해 보면 상상해 보기도 하였다. 이 일기는 실제 자전적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저자는 실제로 잉글랜드 남서부 데먼 주의 살았다. 자전적 이야기인데 등장하는 이웃들은 자신의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을까 궁금하다.



여성 지식인들이 여성을 위한 위무를 이행하는 최고의 길은 여성들에게 여성에 관한 진실을 들려주는 파괴적인 방법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P120


글이 실린 <시간과 조수>는 1920년 진보적 정치 성향과 페미니즘을 표방하며 탄생된 주간지이다. E.M델라필드는 1920년 초부터 평론과 단편소설 등을 꾸준히 기고하다 중산층을 위한 가벼운 읽을거리를 써달라는 편집장의 요청으로 1929년 12월부터 매주 연재를 하였다. 작품이 지방 소도시 독자들에 큰 인기를 끈다.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이야기에는 가부장적인 남편의 모습에 순응하며 돈과 지적 허영심에 빠지기도 하고 수다를 떨다 남의 사생활을 무심결에 말하는 모습들이 나온다. 그러한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다. 일기를 읽다 보면 자신 안에 있는 부족한 부분을 볼 때마다 뜨끔하게 된다. 저자의 너무나 적날한 솔직함에 지난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것이 100여 년 전 스치듯 지나칠 수 있었던 일상의 일기가 지금까지 읽히며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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