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이야기 -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119
제프리 초서 지음, 최예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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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도서제공 #캔터베리독서단

드라마와 영화가 없을 때, 사람들은 무엇으로 시간을 견뎠을까?
소설을 읽었다.
소설이 없을 때, 사람들은 무엇으로 여행을 견뎠을까?
이야기를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슬픈 이야기, 교훈적인 이야기, 노골적인 이야기, 시간을, 삶을 견딜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로, 노래로, 구전으로.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엄밀히 말해 소설은 아니다.
거칠게 말하면 이야기 모음집이다.
민담집, 우화집, 구전되는 이야기들.

15세기 중세 영국 런던의 한 여관에 순례자들이 모인다. 캔터베리 성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 거기엔 기사와 귀족 같은 신분 높은 이들부터 성직자, 변호사, 각종 직업인, 평민, 그 당시의 계층을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다 같이 순례를 떠나는 중, 여관 주인이 제안한다. 우리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기쁜 마음으로 밥값을 내주자고.

그렇게 시작되는 기사의 고결한 이야기,
방앗간 주인의 비속한 이야기,
교훈적인 이야기,
서로를 비방하는 이야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신화 혹은 동화 이야기,
수많은 이야기가 하나씩 풀린다.

낭독하기 편한, 우리 고전의 가사 문학의 형태와 비슷한
서사시처럼 느껴지는 형식으로.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들 속에서
현재가 얼핏 느껴지는 것은
중세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어린 시절 전래동화 그림책에 몰입하듯 [캔터베리 이야기]에 빠져든다....

이 땅에 살지 않았던 사람이 죽을 수는 없듯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결국 어떻게든 죽는 법,
이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찬 길에 불과하고
우리는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순례자이다.
그리고 죽음은 세상 모든 슬픔의 종말이다.
#제프리초서 #캔터베리이야기 #을유문화사

#영문학 #고전문학 #문학 #세계문학 #독서 #책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book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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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세구 : 흙의 장벽 1~2 - 전2권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마리즈 콩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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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구는 술책이 자라나는 정원이다. 세구는 배신 위에 세워진다. 세구 바깥에서 세구에 대해 말하라. 하지만 세구 안에서는 세구에 대해 말하지 마라.


세구, 아프리카 대륙의 높은 흙의 장벽 안쪽 부유하고 번성한 왕국, 왕, 그들의 말로 만사가 다스리는, 귀족, 즉 예레월로 중 하나인 트라오레 가문의 파, 가부장인 두지카로부터 시작되는 소설. 낯선 나라 낯선 용어 소설로 읽어본 적 없는 세계, 그곳이 아프리카.


소설을 다 읽은 뒤 배경인 세구 왕국의 현재 말리 공화국을 검색했다. 이슬람 지하드 반군 공격으로 폭탄이 터지고 UN 평화군이 사망하는 등 화약 냄새가 짙은 기사들이 상단을 차지했다. 18세기 세구 왕국에도 이슬람이 찾아온다. 세구 전통의 조상신들을 경멸하며 유일신 알라를 믿으라 칼을 겨누는 이들, 동시에 아프리카에 유럽인들이 하느님을 데리고 노예와 돈을 찾아 상륙한다. 아프리카는 신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만적인 대륙이라 단정지으면서.


-1권 125쪽, 불행은 어머니 배 속에 든 아이와 같다. 그 무엇도 그 아이의 탄생을 멈출 수 없다. 아이의 힘과 활기는 어느 결에 불어난다. 정맥과 동맥의 혈관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다가 아이는 피와 오수와 오물이 철철 흐르는 가운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불행은 아프리카에, 세구 왕국에, 트라오레 가문에 태어난다. 두지카의 아내 니아, 그의 첩들, 아내와 첩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티에코로, 나바, 시가, 말로발리와 그들의 아내와 첩들, 두지카의 동생 디에모고에 그의 아들 티에폴로, 우리에게도 다소 익숙한 가족중심주의와 물신(조상신)숭배사상, 대대로 굳건히 지켜 온 세계와 믿음과 사고방식이 외부의 압력을 받아 하나 둘 파괴되고 버려지면서 등장인물들도 불행한 운명을 맞이한다.


아프리카는 야만의 대륙이 아니다.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세계관 아래 구축된 왕국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단정짓고 아프리카를 자세히 알려 들지 않은 우리의 선입견을 이 소설은 하나 둘 파괴하고 재구성한다. 마리즈 콩데의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낯선 아프리카 문화와 종교가 단번에 이해되고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성격이 헷갈리지 않고 따라갈 수 있다. 읽다 보면 어느새 나는 세구의 흙의 장벽 너머 번성했던 과거의 도시를 걷고 있다. 기장술을 마시고 그리오(아프리카의 구송 시인)들의 노래를 들으며 붉은 하늘에 감탄한다. 트라오레 가문을 덮친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노래를 들으며 슬퍼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반드시 [세구:흙의 장벽]을 읽어야 한다. 전쟁과 분란이 끊이지 않는 현대 아프리카 대륙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지금은 갈 수 없는 아프리카 고유의 부유하고 번성했던 왕국을 여행하기 위해, 막연한 두려움과 몰이해로 바라보았던 흑인들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우리는 오해하지 않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1권 74쪽, 아들 하나가 오고, 아들 하나가 간다. 삶은 방적기에서 빠져나오는 무명천과 같아서, 부활의 무덤인 동시에 부부의 침실이자 다산의 자궁이다.


-1권 335쪽, 시가에게 사랑은 우기를 알리는 첫비와 같았다. 건기가 길게 끝없이 이어졌다. 대지는 쩍쩍 갈라지거나 풀풀 흙먼지만 날린다. 풀은 적갈색으로 변한다. 나무들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바싹 말랐다. 그러다가 들판 위로 점점 비구름이 쌓인다. 곧 비구름이 찢어진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밖으로 뛰어나가, 여전히 성기면서 뜨거운 빗방울을 뿌리는 첫비를 맞는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쌀도 기장도 호박도 쑥쑥 자란다. 물고기들은 통발을 채운다. 목동들은 가축에게 물을 먹인다. 파티마 없이 그가 어찌 살 수 있었을까?


-2권 102쪽, 삶이란 무엇인가? 지상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덧없는 지나감. 그 의미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시련의 연속.


-2권 459쪽, 퍼뜩 보편적인 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신을 숭배할 권리가 있으며, 인간에게서 삶의 주춧돌인 그의 신앙을 빼앗는 행위는 그를 죽음에 처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왜 알라가 파로나 펨바보다 더 가치가 나가겠는가? 누가 그렇게 결정했는가?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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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입장들 2
정영문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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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좋거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서로에게 좋거나 좋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해 그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게 좋거나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서로에게 가까워지거나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서로가 좋거나 좋지 않게 사람이 달라지고 뭔가가 바뀌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어쩌면 재래식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은 언젠가 이후로 쓸 수 없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소설 속에 등장시킨 소설적 인물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들 같았고, 그 인물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들의 일에 참견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남들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아도 너무나 문제가 많은 세상에서 소설 속 인물들 간에 문제를 생기게 하고 서로 갈등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 소설가가 해야 하는 짓인지에 대해 너무나 회의적으로 된 상태였는데(나는 내가 쓰는 소설 속에서라도 누군가에게 안 좋은 일이 안 일어나기를 바랐다.), 7인의 사무라이가 내 머릿속에 출현하게 된 것이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정영문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60쪽


이 소설은 시작과 끝이 없고, 그 형태는 곧 강물과 같고, 강물 같은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도 떠내려가고 있고, 떠내려가는 내 옆에 7인의 사무라이들이 자네 왔는가 하는 표정으로 같이 떠내려가고, 내 머릿속 사무라이의 이미지는 뾰족한 모자를 쓰고 옷이라기보다 천을 두른 것 같은 차림새에 검을 찬 키 작은 이들인데, 목숨을 걸고 싸울 법한 목적의식을 갖고 사는 이들이 무목적적으로 강물에 둥둥 떠내려간다는 제목부터가 모순적인데, 어느새 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무라이의 머리통들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버린 뒤다.


정영문 소설은 처음이다, 라고 쓰려다 아주 오래 전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목신의 어떤 오후>라는 제목의 단편을 읽은 기억이 난다. 다 읽은 뒤 내 감상은 이랬다. 뭐야? 뚜렷한 플롯도 사건도 등장인물도 희미한 그 소설은 초짜 독자에겐 말 그대로 '뭐야?'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를 읽은 뒤 내 감상은 이렇다. 뭐야~믿을 수 없겠지만 박장대소한 페이지도 있다. 기묘한 유머, 한없이 길어지는 만연체임에도 쏙쏙 읽히는 명확한 문장, 머리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이미지들, 소설에 대한 소설. '밑도 끝도 없는' 소설. 밑도 끝도 없이 시작해 밑도 끝도 없이 끝나는 소설. 마치 인생과 같은, 밑도 끝도 없이 태어나 밑도 끝도 없이 죽는 삶과 같은 소설.


내가 유일하게 궁금한 것은 밑도 끝도 없는, 계속해서 이야기가 옆으로 새는, 말하는 것이 없는,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이 차이가 없는, 결국에는 하나 마나 한 이런 이야기를 언제까지 얼마나 더 할 수 있나 보는 것뿐이었고, 이 글 역시 그것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것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을 주지만 그것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을 주지 않는, 단어와 어구의 반복적인 사용을 얼마나 할 수 있나 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소설들이 뭔가를 말하려고 했고, 의도적으로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은 너무 적었고, 나로서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고, 그렇지 않은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영원히 옆으로 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정영문, 같은 책, 37쪽


이번 기회로 나는 그것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되어 즐거움을 실컷 즐겼다. 안타깝게도 다른 이들에게 쉽게 추천해 줄 수 없는 즐거움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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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 개정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이혜승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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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학 평론은 글을 읽는 안경이 되어 준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우리의 눈에 현미경을 달아버린다. 나보코프의 강의를 한 번 듣게 된 이상, 무심히 소설을 읽을 순 없게 된다. 작가의 피와 땀으로 쓰인 글을 잘게 부수어 가루 하나하나 찍어 맛보는 과정의 짜릿함, 특히 그 대상이 전 세계 문학을 통틀어 가장 집약적이고 전무후무한 대작가들의 대작들이 쏟아진 19세기 러시아 문학이라면 어떤 MSG로도 따라할 수 없는 걸작의 '맛'을 느낄 수 있다.


- 208쪽, 문학, 진정한 문학은 심장이나 뇌(영혼의 위라고 할 수 있는)에 좋다는 물약 삼키듯 단숨에 들이켜 버리면 안 된다. 문학은 손으로 잘게 쪼개고 으깨고 빻아야 한다. 그래야만 손바닥의 오목하게 파인 가운데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아삭아삭 씹어서 조각난 상태로 혀 속에서 굴려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가진 진귀한 향기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부서지고 쪼개진 부분들이 다시 머릿속에서 하나로 통일되면서 당신이 다소간이나마나 자신의 혈기를 투자한 그 작품 전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고리키까지 독서에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다 아는 사람들이구만'하고 지나칠 이 이름들을 나보코프는 철저히 파헤친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대하는 상반된 반응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나보코프에게 돈이라도 빌렸다가 갚지 않고 도망가신 걸까...?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나보코프의 강력한 취향에 불편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추종자로서 몇몇 대목에서 화가 나기도...) 


나보코프가 훌륭한 작가이자 최고의 독자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위대한 작가가 창조하는 최고의 등장인물은 바로 독자다.'(46쪽)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속 시간에 대한 분석은 읽는 내내 감탄하게 한다. 독자와 소설의 시간관념이 일치한다는 감각의 천재성,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체적인 '형상의 패턴'을 읽어내는 작업의 즐거움,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읽다 보면 어느새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는 러시아 소설로 꽉 차게 된다. 소설을 통해 진실, 아니 진리를 향해 나아간 작가들의 고행에 기꺼이 동행하기 위해.


-274쪽, 한편에는 검은 흙, 흰 살결, 희다 못해 파랗게 빛나는 설경, 푸른 평원, 자줏빛 뇌운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인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허구는 죄악이며 예술은 부도덕하다고 역설하는 인간이 있어 그 둘 사이의 충돌이 특히 말년의 그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그 충돌은 결국 한 인간의 내부에서 벌어진 갈등일 뿐이었다. 예술 작품을 통해서건 설교를 통해서건, 톨스토이는 수많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진실에 도달하기를 갈망했다.


 275쪽, 그것은 단순한 진실, 단순한 일상적 사실pravda이 아니라 불멸의 진리istina였다. 그냥 진실이 아니라 내적 영혼을 밝히는 진리의 빛이었다. 톨스토이가 자신 안에서,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의 발현 속에서 이 진리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올바른 길에 서 있었다. 그의 장편 소설 어디에나 나타나는,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문장들 앞에서는 그와 그리스 정교회의 불화도, 그의 윤리적 견해도 그 의미를 상실한다.


소설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간단명료한 답은 이 책에 없다. 한바탕 강의를 들은 뒤 책을 덮은 우리의 손에 남은 건 각자가 생각하는 소설의 정의. 아둔한 수강생 1인이 이번 강의에서 배운 것은 '의심하기'다. 무엇도 당연하다 생각하지 않기, 세상을 갓 태어난 아기의 눈으로 바라보기, 아이처럼 '왜?'라 질문하기, 그 질문의 형식이 소설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220쪽, 나는, 진정한 예술가는 어느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문학, 진정한 문학은 심장이나 뇌(영혼의 위라고 할 수 있는)에 좋다는 물약 삼키듯 단숨에 들이켜 버리면 안 된다. 문학은 손으로 잘게 쪼개고 으깨고 빻아야 한다. 그래야만 손바닥의 오목하게 파인 가운데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아삭아삭 씹어서 조각난 상태로 혀 속에서 굴려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가진 진귀한 향기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부서지고 쪼개진 부분들이 다시 머릿속에서 하나로 통일되면서 당신이 다소간이나마나 자신의 혈기를 투자한 그 작품 전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 P208

나는, 진정한 예술가는 어느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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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이야기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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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운명의 결정을 빠져나갈 순 없습니다. 저는 수백 년도 더 전부터 제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저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대를 이어 내려온 예언을 행했을 뿐입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 [고딕 이야기],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 은행나무


일곱 편의 '고딕 이야기' 중 가장 몰입도 높은 단편 <빈자 클라라 수녀회>와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는 동일한 소재를 다룬다. 저주, 형제와도 같은 자를 배신한 가문에게 내려진 저주, 죄 없는 개를 쏘아 죽인 남자에게 내려진 저주, 저주는 실체화되어 그리피스 가문을 좀먹고, 사랑하는 딸을 일부러 멀리하게 한다. 저주가 주요 소재인 이야기니까, 이것들은 공포소설일까?


[고딕 이야기]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고딕소설을 제대로 접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고딕소설에 매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들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소설을 읽으며 제목에 떡하니 고딕이라 적어 놨으니 고전적인 폐허를 배경으로 한 신비하고 공포스런 분위기를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등장인물들은 복잡한 가계도와 혈통 속에서 삶을 찾아 고군분투한다. 저주는 우리에게 익숙한 주술적 의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등장인물에게 주어진 '운명'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실제 저주가 등장하지 않는 <굽은 나뭇가지>같은 단편에서도 읽다 보면 저주스러운 운명의 힘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선대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의 오언이나, 남성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스스로를 저주하게 된 여성 브리짓 피츠제럴드의 <빈자 클라라 수녀회>속 투쟁, <굽은 나뭇가지>에서 사랑과 행복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굽은 나뭇가지'의 운명을 타고났을 때 곧은 나무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모두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운명이 존재하고 인간은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작가의 관점이 반영될 때,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감정은 비애다. 비극적 슬픔, <빈자 클라라 수녀회>의 클라이막스가 주는 감정. 이야기가 서서히 진행되다 급작스럽게 끝맺는 듯한 일곱 단편의 구성 자체가 운명이라는 변덕스러움을 반영하여 그 앞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비애를 드러낸다. [고딕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공포보다 슬픔을 느꼈다. 슬픔으로부터 나는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감정도 운명도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니까. 어느 순간 슬픔은 물러가고 운명은 그 족쇄를 슬쩍 풀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이제 주변 사람들의 숨죽인 경외의 침묵 속에서 병자성사를 받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빛을 잃고 흐려지고 있었고 사지가 굳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의식이 끝나자 그녀가 수척한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고, 알 수 없는 강렬한 기쁨으로 눈이 밝게 빛났다. 어떤 혐오스럽고 무시무시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아이가 저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고개를 뒤로 떨군 후 숨을 거두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 [고딕 이야기], <빈자 클라라 수녀회> 마지막 부분,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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