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무들은 - 최승자의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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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 두 권을 번갈아가며 읽었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에서도 아이오와 IWP 참여 이야기가 간략하게 나온다. 그때의 경험이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그 계기로 서양 점성학 및 신비주의 공부에 빠져들었고, 병을 얻게 되었다고. 

[어떤 나무들은] 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며 흥분해서 쓰신 후반부가 아슬아슬하게 읽혔다. 한낱 독자인 내가 감히 선생님에 대해 뭐라 말할 순 없지만, 지금까지 시달리신다는 병의 전조가 예고된 독백들. 

매일 조금씩 오래 읽었다. 개인적으로 [어떤 나무들은]이 조금 더 좋다. 일기라는 형식이 시인님의 목소리를 더 가까이서 듣고 있는 느낌을 주어서. 일기를, 특히 작가들의 일기를 읽는 걸 좋아한다. 일기를 펼쳐 10월 24일의 기록이 있는지 찾는다. 그날이 내 생일이기 때문이다(ㅋㅋ). 1994년 10월 24일에 시인은 아이오와에 계셨고, 그때 나는...몇 살이었더라? 아무튼. 


나는 왜 쓰지도 않고 나는 무엇을 쓰지도 않는다. 나는 나를 쓸 뿐이다. 그게 왜가 되고 무엇이 된다면 좋고, 안 돼도 할 수 없다. (175쪽)



특정 이데올로기나 이즘에 속박되지 않고 그저 나 자신에 대해 쓸 뿐이라는 시인의 자유, 고독, '자기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 자기에게 속아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222쪽),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몇 권 읽었고 그때마다 다른 시인의 시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나를 치고 갔었다. 그게 무엇인지 에세이를 읽고 난 후에야 조금 알 것 같다. 라디오의 주파수처럼 문득 선명하게 들리는 시가 있다. 글이 있다. 삶의 태도가 있다. 이 책을 머리맡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찾아 읽어야겠다. 

어떤 나무들은 바다를, 바다의 소금기를 그리워하며 바다 쪽으로, 그 바다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바다 쪽으로 구부러져 자라난다고 한다. 그런 나무들이 생각났다. - P51

나는 왜 쓰지도 않고 나는 무엇을 쓰지도 않는다. 나는 나를 쓸 뿐이다. 그게 왜가 되고 무엇이 된다면 좋고, 안 돼도 할 수 없다. - P175

나는 언제나 나 자신으로 꽉 차 있어서 나 외부의 것에는 흥미를 느낄 여유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를 꽉 채우고 있는 나 자신은 죽음처럼, 송장처럼 내 내부에 누워 있기만 한다. 이 내 내부의 송장을 어서 치워버리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일어나 문을 열고 나로부터 나가다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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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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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배고픔과 꿈 첫 장부터 세게 얻어맞고 어질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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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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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 때 마침 창밖의 하늘은 파랑, 땅 아니 강도 파랑, 온통 파랑의 세계. 태양을 반사하는 수면의 윤슬과 같이 온통 반짝임으로 가득한 이 책은 느리게 읽을 수밖에 없다. 세상의 껍질을 벗겨내 삶의 광휘를 순간적으로 드러내는 펜촉의 빛은 황금빛. 그가 담고 싶었던 하늘의 푸르름이란 죽음의 어둠과 같은 푸른빛.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도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81쪽) 작가 스스로 다짐하며 썼을 문장.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나는 페이지마다 하늘의 푸르름이 스며든 책만을 좋아합니다. 죽음의 어두움을 이미 경험한 푸름 말이에요. 나의 문장이 미소짓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어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이 미소를 얻었어요. 당신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금화와 같은 이 하늘의 푸르름을 나는 글을 쓰며 당신에게 돌려드리고 있답니다. 이 장엄한 푸름이 절망의 끝을 알려주며 당신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같은 책, 서문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이름을, 진정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낸다.

같은 책, 38쪽


단 한 편의 시라도 주머니에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읽고, 쓰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삼위일체다. 시는 불타는 돌들에 둘러싸인 침묵이며 세상은 별들에까지 이르는 차가움이다. 새벽 두 시, 여왕들은 죽고 나는 그들의 외침에 경탄한다. '항상 사랑하고, 항상 고통받으며, 항상 죽어가기를.' 세상은 이 외침에 깃든 영감을 알지 못한다. 삶의 등불을 켜주는 이는 죽은 자들이다.

같은 책, 84쪽


삶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우리 눈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황금빛 눈을 심는다. 눈을 뜨면 단 한 줄기 빛이 죽음의 모습과도 같았던 삶의 모습을 태워버린다.

같은 책, 104쪽


빛으로 가득한 이 책은 얇고 두꺼우며 가볍고 무거운데다 차가우면서 뜨겁다. 다 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한 번 더, 다시 한 번 또, 분명 열려 있다 생각했던 문은 굳게 닫히고 나는 필사적으로 그가 보여 준 것들의 흔적을 더듬거리며 기록한다. 환희의 인간이 남기는 것들은 순간적이고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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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고 고른 말 - 카피라이터·만화가·시인 홍인혜의 언어생활
홍인혜 지음 / 미디어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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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언어는 고작 자모음 몇 개의 조합인 주제에, 목청을 울리는 찰나의 진동인 주제에 우리 영혼의 각도를 바꾼다.

최근 이전에 쓴 일기를 다시 읽다 내가 '싫어한다'는 말을 자주 쓴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코로나 싫어, 마스크 싫어, 원고 거절당하는 거 싫어, 아들이 떼쓰는 거 싫어, 아들의 떼도 받아주지 못하는 내 무능력이 싫어...2년 간의 팬데믹 상황에서 집에 갇힌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싫어하며 나 자신까지 싫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혐오 표현이 일상화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다른 것을 배척하면서 서서히 고립된다.

말은 중요하다. 나는 네가 아니기에 완벽하게 너를 알 수 없지만 말이 있다면 이해를 향해 노력할 수 있다. 칭찬의 말이 너의 영혼을 밝히고 말의 변화가 생각의 변화를 유도한다. 나이가 들어가는 내 몸은 헌 몸이 아니라 '정든 몸'이고(29p, 헌 몸과 정든 몸), 도둑고양이는 '이웃고양이'로 새롭게 불리며 가까운 이웃이 되며(266p, 도둑에서 이웃으로), 등단한 친구를 '시인'이라 부르며 자랑스럽게 웃는다(108p, 나는 너의 시인). 카피라이터이자 만화가, 시인으로 활동하는 그녀는 언어애호가이자 '창작노동자'이다. 누구보다 언어에 예민하고, 말의 맛을 음미하며, 단어를 가지고 즐겁게 놀 줄 아는 사람.

언어애호가의 언어생활을 즐겁게 따라가다 가장 마음에 들어왔던 말은 '아꼬와'였다. 아꼽다는 제주 방언으로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의미로, 작가가 첫 조카를 처음 본 순간 떠올린 말이다. 아꼬와, 아꼬와, 아까워, 네가 닳아 없어질까 아까워, 신생아실에 누워 있는 팔뚝만 한 크기의 내 아이, 겨우 3kg의 생명이 나와 같은 심장을 가지고 숨을 쉬고 있다는 생각에 함부로 안기도 조심스러웠던 그때의 감정을 이 단어가 정확히 관통했다.

우리는 한때 오름이처럼 '아꼬운'사람이었다. 너무 여리고 귀해서 시선에도 닳아 없어질까 아까운 존재였다. 인간이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경이의 산증인이었다. 그저 그 있음만으로 파장을 일으키는 황홀이었다. 가끔 세상살이에 지쳐 아무도 나를 아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 마음을 떠올려야겠다. 분명 누군가는 어린 나를 바라보며 "아꼬와, 아꼬와"했을 테니까. 같은 책, 107쪽


아이를 보며 '아꼬와, 아꼬와' 외친다거나, '나래바'같이 내 집에 나만의 이름을 붙인다거나, 취미 비용을 교육비라 명명하며 스스로를 양육한다는 선언으로 보듬어 안기 같은 언어 생활은 부정적이기 쉬운 자아를 변화시킨다. 언어를 갈고 닦고 말을 고르고 고르며 나 자신을 갈고 닦고 새롭게 고른다. '나는 좋아해'라는 말로 나의 취향을 긍정한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집 꾸미는 일이 좋아, 마스크 덕에 외출 준비가 간편해져서 좋아, 우는 아이를 달래 좋아하는 과자를 먹으며 웃는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좋아, 아이를 돌보고 글을 쓰는 내 '투잡'이 좋아, 이 책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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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 시대를 부유하는 현대인을 위한 사람 공부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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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시간의 만으로 떠밀려 와 서성거릴 때 슬며시 붙잡은 것이 '사람 공부'다. 지반 침하로 무너지는 삶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신의 짓궂음이 초래한 이 절망과 고독을 타고 넘어가고 싶었다. "나는 무엇인가? 혹은 나는 무엇이 아닌가?" 나는 일자나 무한이 아닌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다. (서문)




호젓한, 고요하고 쓸쓸한 시간의 파도가 밀려드는 해변에서 고민하는 한 인간의 모습에서 책은 시작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너무나 뻔하고, 지극히 어렵고, 그러나 중요한 질문. 


인간이란...생각하는 존재야!

인간이란...먹는 존재다!

인간이란...인간 아냐?


질문의 범위가 바다의 수평선처럼 끝이 보이질 않는다. 인간은 하나의 프로그램만으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다. 모래알 같이 무수한 다름과 복잡성을 품고 흩어져 있(10쪽)는 인간이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하여 작가는 인간을 정의하기보다 정리한다. 27가지의 관점으로. 


이 책은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서문을 읽고, 목차를 훑으며 수많은 인간의 정의 중 마음에 드는 것, 호기심이 생기는 챕터를 골라 읽으면 재미있는 독서가 될 수 있다. 슬쩍 나만의 정의를 끼워넣기도 하면서.


나는 가장 먼저 '그토록 많은 방들-호모 로쿠시어스Homo Locusius'부터 읽었다. 오래 전 방을 화자로 한 어설픈 단편소설을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59쪽, 방이 없다면 삶도 없다.


'먹어야 산다-호모 쿠커스Homo cookus'도 흥미롭게 읽었다. 사람들의 '언제 한 번 밥 같이 먹자!'가 당연한 인사법이 되고, 영화 속 유행어가 된 '밥은 먹고 다니냐?'에 담긴 밥의 중요성.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먹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건 당연하지만, 최근 쏟아지는 먹방 컨텐츠들은 먹는다는 행위가 어떤 선을 넘어서 집착에 가까운 유행으로 번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라고 쓰는 나 역시 매일 먹는 음식들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일기에 꼭 쓰고 있으니,

역시 인간은 '먹는 존재' 


-227쪽, 아는 사람에게 '밥 한 끼 먹자!'라는 말을 가볍게 던지지만, 우리는 이 말의 깊고 무거운 함의를 다 헤아리지 못한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준다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할 수 있다."라고 장앙텔므 브리야사바랭이 말했을 때 음식이 존재를 구성하는 한 요소이고, 정체성의 기반이라는 것을 떠올려야 마땅하다. 내가 먹는 음식으로 내가 누구인지 세상에 드러난다.


장석주 작가님의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로, 책 속에 인용된 다양한 책들을 소개받고 알아가는 데 있다. 이번 책 역시 수십 권의 책들이 언급되고 풋내기 독자는 제목을 받아적느라 바쁘다.

인간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지만, 나는 나라는 인간을 '책 읽는 인간-호모 부커스Homo bookus'라 칭하겠다. 아침에 눈을 떠 아침식사 하면서 책 읽고, 외출할 때 책 한 권은 반드시 챙기고, 잠을 청하며 또 책 읽고, 숨 쉬듯이 읽는 일상. 


-242쪽, 나는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주변에 늘어놓고 읽는다. 내 손에 들린 책과 그 주변에 놓인 책들은 엄격한 분류법에 따라 같은 분야에서 선택된 책이 아니라 그때그때 직관적으로 끌리는 책들이다. 질 들뢰즈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하나의 표준이나 엄격한 분류법에 따라 계통화된 수목적 위계가 아니라 무질서하고 제멋대로인 '리좀'형이다. 나는 아무 매임 없이 다소 무질서한 반계보적이고, 비분류적인 책 읽기를 선호한다.


숨 쉬듯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촘촘하고 밀도 높은 이번 책도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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