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전에 쓴 일기를 다시 읽다 내가 '싫어한다'는 말을 자주 쓴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코로나 싫어, 마스크 싫어, 원고 거절당하는 거 싫어, 아들이 떼쓰는 거 싫어, 아들의 떼도 받아주지 못하는 내 무능력이 싫어...2년 간의 팬데믹 상황에서 집에 갇힌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싫어하며 나 자신까지 싫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혐오 표현이 일상화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다른 것을 배척하면서 서서히 고립된다.
말은 중요하다. 나는 네가 아니기에 완벽하게 너를 알 수 없지만 말이 있다면 이해를 향해 노력할 수 있다. 칭찬의 말이 너의 영혼을 밝히고 말의 변화가 생각의 변화를 유도한다. 나이가 들어가는 내 몸은 헌 몸이 아니라 '정든 몸'이고(29p, 헌 몸과 정든 몸), 도둑고양이는 '이웃고양이'로 새롭게 불리며 가까운 이웃이 되며(266p, 도둑에서 이웃으로), 등단한 친구를 '시인'이라 부르며 자랑스럽게 웃는다(108p, 나는 너의 시인). 카피라이터이자 만화가, 시인으로 활동하는 그녀는 언어애호가이자 '창작노동자'이다. 누구보다 언어에 예민하고, 말의 맛을 음미하며, 단어를 가지고 즐겁게 놀 줄 아는 사람.
언어애호가의 언어생활을 즐겁게 따라가다 가장 마음에 들어왔던 말은 '아꼬와'였다. 아꼽다는 제주 방언으로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의미로, 작가가 첫 조카를 처음 본 순간 떠올린 말이다. 아꼬와, 아꼬와, 아까워, 네가 닳아 없어질까 아까워, 신생아실에 누워 있는 팔뚝만 한 크기의 내 아이, 겨우 3kg의 생명이 나와 같은 심장을 가지고 숨을 쉬고 있다는 생각에 함부로 안기도 조심스러웠던 그때의 감정을 이 단어가 정확히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