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지도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을 찾아 떠난 여행
에릭 와이너 지음, 김승욱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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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행복을 찾아 나선다거나 만족을 찾는다고 말한다. 마치 제대로 된 지도와 항해술만 있다면 찾아갈 수 있는 장소가 지도상에 실제로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에릭 와이너 [행복의 지도], 프롤로그

7년 전의 나 자신을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저 두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지 않을까. 공립 고등학교 보조교사로 일하면서 번 돈을 분기별로 떠나는 여행에 쏟아붓는 그때의 나는 이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이곳'의 나는 불행하다. 번듯한 직업 없이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며 공모전에 도전하는 족족 떨어지는 나는 이곳의 나. 글을 쓰기 위해 새로운 곳에서 영감을 얻으며 희망을 꿈꾸는 나는 저곳의 나. 방금까지 앙코르와트 사원의 폐허에 숨겨진 소설을 뒤적이던 나와 학교 맨 뒷자리에 서서 떠드는 학생에게 벌점을 부과하는 나는 같은 사람일 리 없었다. 여기서 나는 행복하지 않아!

그런데 행복이란 뭘까? 불행하지 않은 상태(단순하다), 즐거운 상태(쾌락?),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의 성취감, 욕망의 충족, 대한민국 헌법으로 규정된 인간의 권리, 행복은 감정일까, 일시적인 상태일까, 명확한 권리일까?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으면 말문이 막힌다. 행복이라...로또에 당첨되거나 내 집과 차가 있으며 가족 모두가 평안한 상태...? 고민거리가 없는 상태...? 모든 고민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죽음. 하지만 우리는 행복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선을 그어놓고 '저 선만 넘으면 행복해져!'라며 폴짝 뛰어넘는 걸로 정의될 수 없다. 여기까지가 불행하고, 저기서부터 행복한 완벽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의 의미를 찾아 전 세계를 여행한 작가 역시 이를 깨닫는다. '우리는 행복을 성취하고 싶어하지, 그냥 행복을 경험하기만 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같은 책, 46쪽) 불행을 제거한 상태가 행복이라면 술을 잔뜩 마시거나 약물에 취한 상태로 살아가면 된다. 아니면 돈이 아주 많거나. 전세계적인 벼락부자 나라인 카타르는 행복한가? 가장 돈이 많은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행복 지수는 비슷하다. 오히려 부탄 같은 나라의 국민행복지수가 더 높아 보인다. 물론 몰도바와 같이 가난한 나라는 대체로 불행하다. 특히 성실함과 미래를 향한 희망의 가치가 사라진 곳에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고 내 마음을 끌어당긴 나라가 아이슬란드다. 악천후와 추위가 일상인 고립된 섬나라, 겨울엔 하루종일 해가 뜨지 않는 이 나라 사람들은 행복하다. 비슷한 조건의 러시아인들은 하루 종일 보드카를 달고 살며 절망에 빠진다. 아이슬란드인들도 매일 술을 마시지만 절망하는 대신 책을 쓰고 음악을 만들고 체스 게임을 한다. 춥고 어두운 이 작은 얼음나라 사람들은 왜 행복할까?

"당신이라면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겠어요?"

사라는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이자, 그런 상태에 도달하려는 노력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도 대충 비슷한 말을 했다. 물론 남자 같은 여자들이 드나드는 아이슬란드의 연기 자욱한 술집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방식도 최소한 그 목표 자체만큼 중요하다.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사실 이 둘은 같다. 수단이자 목적이다. 착하게 살다 보면 반드시 행복해진다.

에릭 와이너 [행복의 지도], 297쪽

새 텀블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닌 텀블러 사용으로 환경 보호에 동참하는 행위의 행복. 추위와 어둠을 불평하기보다 어둠 속에서 요정과 괴물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작품을 창조하는 행동이 주는 행복. 설거지 같은 일상적인 행동에도 현재의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며 흘러가는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의 행복.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며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 너무 뻔한 말인가? 행복이라는 개념이야말로 빤하다. 그래서 정의하기 까다롭다.

7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행복도를 비교했을 때 지금이 조금 더 높다. (몰도바의 루바와 같이 '50대 50'이다 답할수도 있다) 과거의 나는 더 자유로웠고 그만큼 불안했다. 지금의 나는 덜 자유로운 대신 안정적이다. '저곳'을 찾아 바쁘게 떠날 때의 나는 당장 1년 뒤의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나는 10년, 20년의 계획을 대충의 틀이라도 세우고 있다. 앞으로도 여행은 계속 떠날 테지만, 그때와 다른 목적으로 비행기를 탈 것이다. 나의 행복만이 아닌 남편과 아이 모두의 행복을 다지기 위한 삶.

36살 여자(한국) 무명작가에게 행복이란 완벽한 커피 한 잔과 함께 [행복의 지도]와 같이 적절한 유머와 통찰이 겸비된 훌륭한 책을 읽는 시간이다. 4살 남자(한국, 26개월생)에게 행복이란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과자를 먹고 푹신푹신한 바닥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행복이란 내가 보유한 주식이 오르는 일이고(물론 그 주식이 더 오르길 바라며 애를 태우다 불행해질 가능성도 있다), 다른 이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내가 아는 모든 이의 건강(대 전염병의 시대에 절실히 와닫는 답이다)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나라에서 질서가 곧 행복이라면 옆 나라는 무질서야말로 행복의 원천이라 답할지 모른다. '불행한 나라들은 모두 똑같지만, 행복한 나라들은 각각 자기만의 방식으로 행복하다.(같은 책, 522쪽)' 우리는 이제 각자의 행복을 헤아리고 공유할 담화의 장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 원고를 컴퓨터로 쓰는 동안 이제 두 살인 우리 딸이 내 발치에서 수선을 피운다. 저 아이는 무엇을 원할까? 내 사랑? 그래,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내가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주는 것이다. 순수하게 자신에게만 주의를 기울여주는 것. 아이들은 거짓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을 금방 알아낸다. 어쩌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사실은 사랑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둘은 항상 같이 존재한다. 영국의 학자 애브너 오퍼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행복의 보편적인 도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뜻이다.

같은 책, 96쪽

그런데 존재는 행복의 선행조건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자신을 사랑하려면 인종, 민족, 언어, 요리 중 무엇에 관해서든 하여튼 정체감이 확고해야 한다. 우리가 매일 그 정체감을 되새기며 살지는 않더라도 정체감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은행 계좌에 들어 있는 돈처럼. 그래서 우리가 힘들 때 거기에 기댈 수 있다.

같은 책, 349쪽

좋은 음악은 뭔가 다른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냥 존재한다. 같은 맥락에서, 오로지 불행만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불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불행에 관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것이다. 행복에는 말이 필요 없다.

같은 책, 3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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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업 - 불교철학자가 들려주는 인도 20년 내면 여행
신상환 지음 / 휴(休)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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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홀로 여행지는 캄보디아였다.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오니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래 준비했던 고시 공부를 내려놓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때였다. 텅 빈 내면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최대한 현실적으로 접근 가능한 내면 여행이 필요했다.


20대가 아닌 50대인 지금도 떠나려면 떠날 수 있다. 다만 어디로 떠날 수 있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누구나 떠나는 여행, 단 한 사람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죽음이 이 삶의 마지막 여행지이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죽음을 향해 여행하고 있다. 다만 그 이전에 각자의 몫만큼의 자신의 여행을 떠난다. 젊은 날의 그 떠돎이 가르쳐준 것은 여행이란 밖으로 떠도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도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인생이야말로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니, 한 생을 사는 우리는 지금도 길 떠나는 여행자인 셈이다.

신상환 [인도수업] 17쪽(강조는 인용자)


여행은 바깥으로도, 안쪽으로도 떠날 수 있다. 안으로는 어떻게 떠나야 하나? 명상이나 종교적 수행? 순례자의 길? 책 속 작가는 인도와 티벳, 무스탕, 중앙아시아로 떠난다. 상식적으로 익숙한 인도가 아닌 불교의 발원지로서의 인도 여행. 티벳 불교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티벳 여행. 도시 이름조차 낯선 무스탕, 사마르칸트, 하미 파미르 같은 실크로드 여행. 모두 불교를 중심으로 두고 움직인 여행이다. 저자가 불교 철학자로 중관사상과 티벳 불교를 전공하신 분이니까. 부처가 태어난 인도에서 시작해 불교가 곧 국교인 티벳, [서유기]로 유명한 현장법사가 불경을 싣고 건넌 중앙아시아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이 저자만의 '내면 여행'인 셈이다.


지명이나 불교 용어들이 다소 생소해 따라가기 낯선 여행이긴 하다. 불교에 관한 배경지식이 한국사에서 배운 수준(대승-소승불교, 돈오-점수 등)이면 얼추 따라잡다가 티벳 불교에서 한 번 막힌다. 내가 아는 티벳은 달라이 라마, 프리 티벳 운동, 린포체로 대표되는 특유의 환생 문화 정도뿐이라 전공자의 티벳 불교 강의를 낯설면서도 흥미롭게 읽었다. 나와 비슷한 독자들을 위해 부록으로 '티벳에 대한 오해와 이해'장이 있어 좀 더 정확한 내용들을 알 수 있었다. 한때 티벳 여행을 꿈꿔 왔고 지금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빈 부분들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인도, 티벳, 네팔 모두 캄보디아 이후 떠나려 했던 여행 후보지들이었고 떠남 자체가 까다로운 곳들이었다. 이 책으로 알게 된 중앙아시아의 도시들 역시 저자가 떠났던 때보다 훨씬 더 여행이 어려워진 곳이 되었다. 직접 바깥으로 떠날 수 없더라도 글을 통해 안쪽으로 한 바퀴 돌아나올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 원문으로 적힌 불경을 한가득 이고지고 와야 했던 현장법사처럼, 글이 진리 그 자체는 아니지만 진리를 향해 떠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여행에 필요한 지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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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얼굴들 - 빛을 조명하는 네 가지 인문적 시선
조수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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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이다.˝ 아파트 방등으로 대표되는 획일적인 조명에서 벗어나 빛 그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할 수 있는 책. 조명 하나에도 달라지는 삶의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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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부정 - 복간본
어니스트 베커 지음, 노승영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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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주일 전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결과가 발표되었고, 같은 날 장편소설을 투고한 출판사로부터 답장이 왔다. 올해 목표했던 두 번째 책 출간은 이렇게 '0'으로 2021년이 종료되었다. 우울할 틈도 없이 아들이 덜 마른빨래들을 바닥에 내던지고 있었고, 강풍에 테라스 분리수거통이 넘어져 나뒹굴었다. 출간 제의도 전부 거절당하고, 공모전도 떨어지고, 창작지원금도 탈락한 지금 세상이 나를 향해 '이제 헛짓거리 그만하고 네 할 일이나 하쇼~' 비웃는 것 같았다. 사실 세상은 나를 비웃지 않는다. 애초에 내게 관심이 없다. 나라는 인간이 존재하는지는 아나? 자연은 인간에게 무관심하고 인간은 그 무관심을 견딜 수 없어한다.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우주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작정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칸트를 괴롭힌 물음-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고 왜 여기 있는지 까맣게 모른 채 살아가지만 삶에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안다. 그렇다면 영웅적 행위를 다른 인간에게 위임해 이 행위가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줄 만큼 좋은지 하루하루 알아감으로써 이 말할 수 없는 신비를 당장 떨쳐버리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 어니스트 베커 [죽음의 부정] 254쪽(강조는 인용자)


[죽음의 부정]은 '죽음'을 키워드로 독서 중에 우연히 만난 책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자마자 책을 주문했다. 삶이 정답지가 뜯어진 문제집이라면 이 책은 정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해설지에 가깝다. 죽음의 관념, 죽음의 공포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무엇보다 사납게 뒤쫓는다. 죽음은 인간 활동의 주된 원동력이다.(같은 책, 저자 서문)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모든 행동의 기원에 '죽음의 공포'가 숨어 있다. 그 공포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독특한 진화과정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동물이지만, 언젠가는 죽어 벌레의 먹잇감이 될 몸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상징적 자아이고 이름과 인생사가 있는 피조물이다. 그는 원자와 무한에까지 사유를 뻗을 수 있는 창조자다.(같은 책, 68쪽)


동물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인간을 현재에 고정해 두지 않는다. 병으로 앓는 몽롱한 머릿속으로, 지진이나 화산 폭발 같은 자연재해 뉴스를 목도한 눈으로, 가까운 이의 장례식장에 들어서면서 끊임없이 상상한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게 끝일까?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운 이 모든 일들이 다 이렇게 '죽기 위해' 한 일인가? 내 존재 의미가 겨우 그 정도뿐이었나?


진짜 세상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끔찍하다. 세상은 나에게 내가 하찮고 두려움에 떠는 존재이며 늙어서 죽을 거라고 말한다. 환상은 이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나를 중요하고 우주에 필수적이며 어떤 면에서 불멸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 같은 책, 222쪽


죽음에 대한 공포, 삶의 무의미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인간은 삶을 지속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환상을 만들고 자신의 삶의 짐을 의탁할 영웅을 만들어낸다. 영웅은 위대한 가치이자 불멸하는 존재로 죽음을 초월한다. 영웅은 신이었고, 신의 대리인이었고, 왕이었으며,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전쟁 영웅, 이데올로기, 돈으로 바뀌어 왔다. 종교는 인간의 존재 의미를 '신의 뜻'으로 해석해 주며 신민들을 안심시켰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대화된 시기에 삶의 의미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둘 중 하나였다.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삶을 정렬한다. 부동산, 주식, 코인 등 각종 투자 이야기가 대화 주제로 빠지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가 제공하는 확고하고 제한된 대안을 통해 보호받으며고개를 들어 자신의  너머를 보지만 않으면 막연한 안도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갈  있다.(같은 책, 137쪽)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영웅주의로 이어지는 과정이 잘 드러난 작품이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들은 천사로부터 지옥행을 통보받고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지옥의 사자들이 찾아와 고통과 죽음을 선사한다. 지옥행 시연이 전국적으로 공개된 날 일상이 멈춘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고 누구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평화롭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무참히 찢어져 숨겨져 있던 실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렸다. 나한테도 지옥의 사자가 찾아오지 않을까?


공포가 불러온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영웅을 찾아낸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했다는 듯 나타난 새진리회 의장 정진수는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지옥행을 고지받은 자들은 모두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더 정의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의 뜻입니다. 그는 단숨에 영웅이 되고, 신의 뜻을 전달하는 새 시대의 교황으로 등극한다. 그는 인간들에게 의미를 만들어 준다. 저들의 죽음에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두려워 말고 일상을 영위하라. 내가 너희에게 환상을 가져다 주리라.


우리는 자신이 현실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직함을, 우리가 실제로는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홀로 서지 못함을, 자신을 초월하는 무언가-우리가 깃들어 있으며 우리를 지탱하는 관념과 힘의 체계-에 늘 의존함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힘이 늘 뚜렷한 것은 아니다. 공공연히 신이거나 (나보다) 강한 사람일 필요는 없지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활동, 열정, 유희에 대한 헌신, 그리고 안락한 거미줄처럼 사람이 자신을 잊고 자신이 스스로의 중심에 자리 잡지 않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 그런 힘을 가질 수는 있다. 우리 모두는 자기망각적 방식으로 지탱받는 방향으로 이끌린다. -같은 책, 109쪽


하루 한 회씩 6일 간 시청한 <지옥>은 충격적이었다. 웹툰을 먼저 봤음에도 충격적이었다. 영상화된 지옥 시연 장면이 너무나 현실적이라 실제로 밖에서 일어나는 일 같았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지옥의 사자들은 죽음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들이 왜 하필이면 그때 나를 찾아오는지 이유는 없다. 길을 걷다 차에 치이거나 병원에 갔는데 암 말기 선고를 받는 것과 같이 죽음은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들이닥친다.


죽음에게 이유를 달아 전시한 새진리회가 진정한 영웅일까? 드라마를 보면 전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새진리회를 창시한 정진수부터가 20년 전 고지를 받고 시연 당일까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평범한 인간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딴 사람에게 신과 같은 '모든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인간관계도 신성의 짐을 감당할 수 없으며, 그러려고 시도했다가는 양쪽 다 그 나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같은 책, 269) 우리는 손쉽게 자신의 실존의 짐을 떠넘길 대상을 찾아 두리번거리지만, 그는 신이 아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의 실패는 곧 나의 실패다. 새진리회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만든 지옥 시연의 이유는 완벽하지 않았다. 죄가 없는 선량한 인간도 고지를 받았다. 죽음은 평등하기에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무작위성을 숨기기 위해 화살촉이라는 폭력을 쓰고, 폭력은 피해자를 양산하며 그들이 선언하는 '정의'와 멀어진다. 상대방이 나의 '모든 것'이라면 그의 모든 결함은 나에게 심각한 위협이 된다.(같은 책, 270쪽)


이 삶을, 실존이라는 무거운 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손 놓고 숨만 쉬면서 명줄만 잡고 있어야 할까? 책에서 제시한 해결책 중 하나가 예술이다. 결국 삶의 의미를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면, 창조적인 활동으로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예술 아닌가.


예술이라는 작업은 실존의 문제에 대해-외부 세계의 실존뿐 아니라(공유된 무엇에도 의존할 수 없는, 고통스럽도록 분리된 존재인) 자신의 존재에 대해-창의적 유형이 내놓는 이상적 답이다. 그는 극단적 개별화, 지독히 고통스러운 고립의 부담에 답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재능을 발휘해 불멸을 얻는 법을 알고 싶어 한다. 그의 창조적 작업은 그의 영웅주의를 표현하는 동시에 정당화한다. 랑크 말마따나 '사적 종교'인 것이다. 창조적 작업의 고유함은 그에게 개인적 불멸을 선사한다. 이것은 그 자신의 '너머'이지 남들의 '너머'가 아니다. - 같은 책, 277쪽


<지옥>의 클라이맥스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가 고지를 받고, 3일 뒤 시연에서 아기를 감싼 부모의 힘으로 처음으로 고지받은 인간이 살아남았다. 기적과도 같은 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새진리회를 거부하고(아기를 잡으러 온 사제들을 체포한다) 살아남은 아기를 보호한다. 시즌 2의 중심인물이 될 이 아기가 새로운 영웅이자 메시아로 정진수의 자리를 차지할지, 또 다른 창조적인 역할을 맡게 될지는 기다려 봐야 할 일이다. 지옥의 사자들 앞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나의 삶을 지켜야 하나? 이 드라마 자체가 죽음-삶의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연상호 감독의 창의적인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정답이 아닐지라도 성실하게 채운 시험지의 답안.



드라마를 다 본 뒤 [죽음의 부정]을 한 번 더 읽었다. 책상 위에 책을 올려놓고 일주일 넘게 손도 대지 않았던 노트를 펼쳤다. 매일 한 장씩 채운 노트 안 세계가 잠시 멈춘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문장을 쓰자 주인공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 두 문장에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정해진 분량만큼 하루의 작업량을 채운다. 매일 한 장씩 쓰면 한 달에 30장이고 세 달이면 새 장편소설 초고 하나는 충분히 완성할 수 있다. 새 원고로 새롭게 투고하고 지원하고 책을 만들 수 있다. 내가 쓴 소설이 나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이것이 나만의 답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저 한가로이 노니는 원형질의 눈먼 덩어리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존재요, 단지 물질이 아니라 상징과 꿈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이다. 그의 자기가치감은 상징적으로 구성되며 그가 소중히 여기는 자기애는 상징을 먹고 산다. 상징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추상적 관념이요, 공기 중과 마음속과 종이 위에서 소리와 말과 이미지로 이루어지는 관념이다. 이는 유기체적 활동에 대한, 또한 통합과 확장의 쾌락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열망을 상징의 영역에서, 따라서 영원불멸토록 무한히 충족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의 유기체는 물리적 팔다리를 움직이지 않고서도 세계와 시간의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면서도 영원을 내면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책,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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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들 - 개정판 문학동네포에지 8
박정대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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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살아 있으라

살아 있으므로 너희는 세계의 중심이다

- 박정대 <나 자신에 관한 조서>

정신을 차려보니 박정대 시인의 시집이 한 권을 제외하고 모두 내 서재 안에 자리를 잡았다. 미약한 시집 서가에서 가장 많은 권수를 자랑하며 나의 시적 취향에 대해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 소설과 비교했을 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세계, 경이감을 가지고 존경을 담아 말하게 되는 세계, 시의 영역에서 나는 지나가는 사람1이다.


왜 좋지? 나도 잘 모르겠다. 뭔가 밤을 새워가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한순간에 자신감을 잃고 방 한구석으로 물러나게 된다. 내가 시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절판된 옛 시집을 복간하는 '문학동네 포에지' 시리즈 덕분에 구하기 힘들었던 박정대 시인의 첫 시집을 읽을 수 있었다. 푹 빠져 읽으면서 왜 내가 박정대에게 매료되었는지 눈썹 한가닥 정도는 알 수 있었다.


1990년에 등단한 시인의 시집들은 첫 작품부터 최근작 [불란서 고아의 지도](2019)까지 톤이 한결같다. 나는 긍정적인 의미로 한결같다는 단어를 썼다.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시를 안심하고 계속 즐길 수 있다는 의미니까. 반대로 말하면 한 시인의 다양한 시를 접하고 싶은 사람에게 그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이름일 수 있다. 오래된 영화와 소설, 시, 음악, 각종 고유명사들의 집합소, 강원도 정선을 중심으로 형상화된 시적 공간, 끝없이 이어지는 기타 선율처럼 한없이 늘어나는 '단편들'. 그의 시를 한 편만, 시집 한 권만 읽으면 모든 걸 다 읽은 것과 같다.


동어반복과 다르다. 라벨의 <볼레로>와 같은 변주, 조금씩 더해지는 음률 속에서 확장되는 세계, [단편들]에는 아직 이후 시에서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전직 천사의 그림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자주 호명되는 체 게바라는 '혁명'이라는 단어로 암시될 뿐이다. 같은 밑그림 속에 덧그려지는 붓질을 즐기며 안심하고 그의 시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태양다방에서 태양을 찾아내는, 옷깃을 휘날리는 굴원의 그림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삶을 찾아내는, 이념도 성공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위하여' 글을 쓰는 박정대만의 세계를.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위하여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위하여

나는 스스로 감히 글을 쓴다

-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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