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이야기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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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운명의 결정을 빠져나갈 순 없습니다. 저는 수백 년도 더 전부터 제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저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대를 이어 내려온 예언을 행했을 뿐입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 [고딕 이야기],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 은행나무


일곱 편의 '고딕 이야기' 중 가장 몰입도 높은 단편 <빈자 클라라 수녀회>와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는 동일한 소재를 다룬다. 저주, 형제와도 같은 자를 배신한 가문에게 내려진 저주, 죄 없는 개를 쏘아 죽인 남자에게 내려진 저주, 저주는 실체화되어 그리피스 가문을 좀먹고, 사랑하는 딸을 일부러 멀리하게 한다. 저주가 주요 소재인 이야기니까, 이것들은 공포소설일까?


[고딕 이야기]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고딕소설을 제대로 접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고딕소설에 매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들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소설을 읽으며 제목에 떡하니 고딕이라 적어 놨으니 고전적인 폐허를 배경으로 한 신비하고 공포스런 분위기를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등장인물들은 복잡한 가계도와 혈통 속에서 삶을 찾아 고군분투한다. 저주는 우리에게 익숙한 주술적 의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등장인물에게 주어진 '운명'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실제 저주가 등장하지 않는 <굽은 나뭇가지>같은 단편에서도 읽다 보면 저주스러운 운명의 힘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선대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의 오언이나, 남성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스스로를 저주하게 된 여성 브리짓 피츠제럴드의 <빈자 클라라 수녀회>속 투쟁, <굽은 나뭇가지>에서 사랑과 행복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굽은 나뭇가지'의 운명을 타고났을 때 곧은 나무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모두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운명이 존재하고 인간은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작가의 관점이 반영될 때,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감정은 비애다. 비극적 슬픔, <빈자 클라라 수녀회>의 클라이막스가 주는 감정. 이야기가 서서히 진행되다 급작스럽게 끝맺는 듯한 일곱 단편의 구성 자체가 운명이라는 변덕스러움을 반영하여 그 앞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비애를 드러낸다. [고딕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공포보다 슬픔을 느꼈다. 슬픔으로부터 나는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감정도 운명도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니까. 어느 순간 슬픔은 물러가고 운명은 그 족쇄를 슬쩍 풀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이제 주변 사람들의 숨죽인 경외의 침묵 속에서 병자성사를 받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빛을 잃고 흐려지고 있었고 사지가 굳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의식이 끝나자 그녀가 수척한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고, 알 수 없는 강렬한 기쁨으로 눈이 밝게 빛났다. 어떤 혐오스럽고 무시무시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아이가 저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고개를 뒤로 떨군 후 숨을 거두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 [고딕 이야기], <빈자 클라라 수녀회> 마지막 부분,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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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솔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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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을 때마다 깨닫는다. 나는 내가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소설이 무슨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으며 돈도 안 된다고 폄하하는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면서도 꿋꿋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올해 두 손 모아 꼭 쥐고 있던 소설을 반쯤 내려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남은 한 손으로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나의 사랑을. 내 사랑의 목록에 김멜라와 김지연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새로운 소설을 만나 다시 한 번 더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특별하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매 해 백신처럼 주사를 놓는다. 면역력을 높이고 사랑을 강화시킨다, 소설이 소설에게.



문득 나는 내가 사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처음에는 너무 뜬금없고 이상한 감정처럼 느껴졌는데 점점 선명해졌다. 뜻대로 된 적은 별로 없지만 나는 사는 게 좋았다. 내가 겪은 모든 모욕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내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는 건 좋다. 살아서 개 같은 것들을 쓰다듬는 것은 특히나 더 좋다. (김지연, 공원에서)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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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하여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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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이 2년을 넘긴 현재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고 거리두기 및 통제 정책이 서서히 완화되는 시점. 현실이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서기 시작할 때가 문학이 전진할 시기다. 한국 번역 출판 시점 기준으로 2021년 작 율리 체 [인간에 대하여]와 오르한 파묵 [페스트의 밤]이 올해 초 출간되었다. 그들의 선배격인 카뮈의 [페스트]의 계보를 이을 '전염병 소설'이다.

전염병을 소재로 한다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집단적 죽음, 국가의 통제, 폐쇄된 도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이기심과 배려심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자연 재해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한계, 피할 수 없는 죽음 같은 주제를 자동적으로 말할 지 모른다. 그러니까 전염병은 인간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좋은 소재다.

도라 주위에서 봄이 살아 움직이며 본연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모든 생물 유기체가 성장하고 만발케 하고, 살아 있는 생명이 최대한의 생산력을 뽐내도록 몰아대고, 봄의 전령들이 재생산을 하도록 돕는다. 그 어떤 존재도 평가받지 않을뿐더라 모든 존재가 이용된다. 죽어가는 생명 또한 활용된다. 세상의 어떤 한 종이 사라지면 새로운 종이 그 틈을 메운다. 죽음과 탄생은 드라마가 아니라 생명 역학의 고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흥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인류가 파멸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진박새보다 더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도라는 바이러스 균주를 제외하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생명체는 없다고 생각한다.

율리 체 [인간에 대하여], 93쪽

그렇다면 율리 체의 [인간에 대하여] 속 인간을 대표하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독일 베를린에서 지속 가능한 상품을 주제로 광고를 제작하는 에이전시의 카피라이터 도라. 브라켄이라는 독일 시골 마을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술주정뱅이 목수 고테. '데이팅 앱에서 알고리즘이 절대 연결하지 않을'이 둘의 만남을 주선한 존재가 코로나 바이러스다. 팬데믹으로 인해 동거 중이던 남자친구와 문제가 생긴 도라가 충동적으로 브라켄에 시골집을 사서 떠나오게 되면서 옆집 고테와 만나게 되었으니까.


성격도 성향도 모든 것이 정반대인 여자와 남자가 우연히 만났다, 사랑에 빠진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래서 둘이 언제 사귀나 궁금해져 읽는 속도를 높였다. 결말에서 나는 나의 편협한 시선이 부끄러워 도라와 고테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인간에겐 사랑만이 필요한 게 아니지요. 우정, 더 크게 말하면 인간적 연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것, 우리가 자주 잊고 바이러스 앞에서 아예 잃어버린 것.

코로나 바이러스가 2년 간 부지런히 벗겨낸 인간의 민낯은 상상 이상이었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자 온 세계가 바이러스 근원지를 혐오했다. 전 세계로 퍼져나가자 감염자를 혐오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를 혐오하고, 거리두기를 지키지 않는 자를 혐오하고, 백신을 맞지 않는 자들을 혐오했다. 전염병 앞에서 인간은 혐오의 감정에 몰두했다. 소설 본문에도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조지 플로이드 살해 사건'은 혐오의 직접적 발현이었다. 인간이란 혐오의 동물인가?

도라와 고테가 보여주는 기묘한 연대는 인간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준다. 정반대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에 대해 우월감을 드러내며 통제하는 대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주는 것. 죽음 앞에서 외롭지 않도록 예의를 갖추는 것.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그저 존재하는 것. 서로의 존재에 경의와 예의를 표하는 것.


프란치가 옆 벤치에 앉아 양손으로 벤치 바닥을 쓰다듬는다. 도라는 아이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삶은 분명 계속될 것이다. 지금도 어딘가에 프란치와 미래를 함께할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거다. 한 소년이 코로나 방역 완화를 반기며 베를린의 축구장에서 축구공을 갖고 놀고 있을 것이다. 미래의 어느 날 브라켄 출신의 엄청 긴 금발 머리 아가씨와 결혼하게 될 걸 꿈에도 모른 채, 또 어딘가에서 곧 프란치의 절친이 될 소녀가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30년 후에 자동차 사고를 당해 양팔이 부러지게 될 청년이 마스크와 헤드폰을 쓰고 지하철에 앉아 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하며 세상에 새겨져 있고 준비하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건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돌릴 바퀴도, 잡아당길 레버도 없다.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생각에 도라는 긴장이 살짝 풀리는 걸 느낀다.

율리 체, [인간에 대하여] 418쪽


자연 앞에서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고 함부로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는다. 잊을 때마다 한 번씩 바이러스가 찾아온다. 바이러스는 인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간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지, 우리야말로 인간을 가장 필요로 하거든. 그 앞에서 우리는 공포에 질리고 서로를 증오하기보다, 연대해야 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존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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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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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쪽, 나는 왜 떠나온 것일까. 누군가를 더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을 때 혼자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규칙적이고 또 가시적으로 발전이 드러나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 대체 왜 그런 진지한 생각을 했을까. 그런 점 역시 내가 아는 범주 안에서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맞도록 의미를 재단하는 독선적인 진지함의 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나를 증오에 빠지고 용서를 외면하고 또 결별에 이르도록 만든 순정의 무거움, 그리고 서로 다름에서 생겨나는 일상의 수많은 상처와 좌절들, 낙관적이지 못한 복잡한 생각과 그것을 납득시키기 위한 기나긴 말다툼을 통과하고도 나는 여전히 그 틀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내가 과연 떠나오기는 한 것일까.

은희경,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이고, 뉴욕을 배경으로 한 연작소설이고,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고, 쓰러졌다. 비행기로 14시간을 가야 하고 적금을 깨야 하는 멀고 비싼 그 도시에 그와 그녀들이 찾고자 했던 것들은 없다. 결국 주인공들이 도달하는 지점은 ‘나’뿐이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이듯 나는 아무리 멀리 떠나도 나일 뿐이다.

몇년 전 구글 세계지도를 켜서 떠나고 싶은 도시를 찍어가던 과거의 내가 도달한 지점도 같다. 자아를 찾아 내 일상의 틀을 깨고 말겠다는 선언 역시 또 하나의 고정된 틀이었을 뿐이다. 뉴욕에서 내 얼굴이 들어간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린다 해도, 내가 도달한 도시가 나를 증명하지 않는다. 내가 증명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의 특별함이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의 이름은 은희경, 나의 가장 오래된 덕질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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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연인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2
찬 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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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을 기점으로 그는 머릿속에 웅대한 계획을 구상했다. 그것은 평생 읽은 소설의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더 읽고 난 뒤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신이 책을 들기만 하면 한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끊기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존 자신도 휩쓸려 들어가서 외부의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찬쉐, [마지막 연인], 9쪽

찬쉐의 [마지막 연인] 첫 장을 읽은 뒤, 당연하다는 듯 위스키를 가득 채운 잔을 옆에 두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술을 마셨다. 알코올의 힘이라면 주인공 존과 같이 책을 펼쳐 다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보통의 나는 존의 아내 마리아처럼 '심연으로 떨어지는' 벽걸이 카펫을 지어낼 수 없고, 존이 다니는 회사 사장의 아내 리사와 같이 '장정'을 떠날 수 없다. 내 눈은 등장인물들이 종종 마주치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를 보지 못하고, 검은 그림자와 마주칠 일이 없고, 술집 안의 블랙홀을 찾아낼 수 없다...

...이게 다 무슨 소리냐고 물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뭔데? 줄거리가 어떻게 되는데? 존이라는 남자가 의류 회사에 다니는데 그의 취미는 독서인데 책을 읽으면 그 책 속에 등장한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실제 세계에서도 보이는데 존의 아내 마리아는 온 집에 전기가 통하게 만드는데 자기 아버지의 초상화와 대화를 하고 존이 읽은 책 내용을 담은 카페트를 만드는데 존의 상사인 사장 빈센트는 꿈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여자를 만나는데 그의 아내 리사는 남편을 찾아 꿈으로 떠났다가 '장정'을 떠나 황하 강을 건너는데 존의 고객이자 고무나무 농장주인 레이건은 농장 직원인 에다와 사랑에 빠지는데 또 에다는...이걸 줄거리라 부를 수 있을까.

몇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사실상 요약이 불가능한 소설이다. 찬쉐의 대표작인 [마지막 연인]은 실험적이다, 소설의 전통을 해체한다, 따위의 말로 이 소설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소설은 깨어있는 채로 꾸는 꿈이다. 글로 마시는 술이다. 술에 취하면 세계의 경계가 연약해지고 불가능하다 여긴 일들이 가능해지듯 소설 속 주인공들도 아무렇지 않게 상식의 경계를 부순다. 독한 소설 한 권은 목을 태우고 위장을 덥히며 머리를 깨운다. 어느새 나는 이 소설을 정신없이 들이켜고 있었다.

"대니얼, 평생 혼신의 힘을 쏟아 자신을 이야기의 숲으로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우리에게 속할까?"

"그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지만 날마다 우리와 함께 있어요."

"고마워, 아들."

"하지만 엄마, 엄마 자신도 저와 아버지에게 속하지 않아요. 전 엄마가 숲을 걷는 것을 보았어요. 엄마의 모습은 너무나 가늘고 비현실적이었고, 엄마의 온몸에는 전기가 흐르고 있었죠."

책의 숲에는 희미한 빛이 있었지만 마리아가 고개를 들어 보았을 때는 하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하늘은 있을까? 여기에 풀도, 돌도, 오솔길도 있고 샘물 흐르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공기 중에는 해묵은 책의 아름다운 내음이 가득했다. 이것은 존의 이야기고 그 이야기는 영원히 그녀에게 속했다.

찬쉐, [마지막 연인], 503쪽

한국에 처음 번역되는 찬쉐의 소설은 쉽게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까다롭다. 읽기 어려워 쉬이 내게 속하지 않으나, 매일 나와 함께 있다. 어느새 나는 아침을 먹다 마리아가 여행을 떠났던 북도라는 이름의 황금거북을 키우는 마을에서 대나무숲을 헤매고 있었다. 레이건의 고무나무 농장의 뱀을 피해 달리고 있었다. 독한 위스키의 뒷맛처럼 줄거리도 교과서적인 주제도 흐릿한 이 소설이 내 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떠나질 않았다. 이것은 찬쉐의 이야기고 그 이야기는 영원히 내게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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