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하여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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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이 2년을 넘긴 현재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고 거리두기 및 통제 정책이 서서히 완화되는 시점. 현실이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서기 시작할 때가 문학이 전진할 시기다. 한국 번역 출판 시점 기준으로 2021년 작 율리 체 [인간에 대하여]와 오르한 파묵 [페스트의 밤]이 올해 초 출간되었다. 그들의 선배격인 카뮈의 [페스트]의 계보를 이을 '전염병 소설'이다.

전염병을 소재로 한다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집단적 죽음, 국가의 통제, 폐쇄된 도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이기심과 배려심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자연 재해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한계, 피할 수 없는 죽음 같은 주제를 자동적으로 말할 지 모른다. 그러니까 전염병은 인간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좋은 소재다.

도라 주위에서 봄이 살아 움직이며 본연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모든 생물 유기체가 성장하고 만발케 하고, 살아 있는 생명이 최대한의 생산력을 뽐내도록 몰아대고, 봄의 전령들이 재생산을 하도록 돕는다. 그 어떤 존재도 평가받지 않을뿐더라 모든 존재가 이용된다. 죽어가는 생명 또한 활용된다. 세상의 어떤 한 종이 사라지면 새로운 종이 그 틈을 메운다. 죽음과 탄생은 드라마가 아니라 생명 역학의 고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흥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인류가 파멸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진박새보다 더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도라는 바이러스 균주를 제외하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생명체는 없다고 생각한다.

율리 체 [인간에 대하여], 93쪽

그렇다면 율리 체의 [인간에 대하여] 속 인간을 대표하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독일 베를린에서 지속 가능한 상품을 주제로 광고를 제작하는 에이전시의 카피라이터 도라. 브라켄이라는 독일 시골 마을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술주정뱅이 목수 고테. '데이팅 앱에서 알고리즘이 절대 연결하지 않을'이 둘의 만남을 주선한 존재가 코로나 바이러스다. 팬데믹으로 인해 동거 중이던 남자친구와 문제가 생긴 도라가 충동적으로 브라켄에 시골집을 사서 떠나오게 되면서 옆집 고테와 만나게 되었으니까.


성격도 성향도 모든 것이 정반대인 여자와 남자가 우연히 만났다, 사랑에 빠진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래서 둘이 언제 사귀나 궁금해져 읽는 속도를 높였다. 결말에서 나는 나의 편협한 시선이 부끄러워 도라와 고테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인간에겐 사랑만이 필요한 게 아니지요. 우정, 더 크게 말하면 인간적 연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것, 우리가 자주 잊고 바이러스 앞에서 아예 잃어버린 것.

코로나 바이러스가 2년 간 부지런히 벗겨낸 인간의 민낯은 상상 이상이었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자 온 세계가 바이러스 근원지를 혐오했다. 전 세계로 퍼져나가자 감염자를 혐오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를 혐오하고, 거리두기를 지키지 않는 자를 혐오하고, 백신을 맞지 않는 자들을 혐오했다. 전염병 앞에서 인간은 혐오의 감정에 몰두했다. 소설 본문에도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조지 플로이드 살해 사건'은 혐오의 직접적 발현이었다. 인간이란 혐오의 동물인가?

도라와 고테가 보여주는 기묘한 연대는 인간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준다. 정반대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에 대해 우월감을 드러내며 통제하는 대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주는 것. 죽음 앞에서 외롭지 않도록 예의를 갖추는 것.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그저 존재하는 것. 서로의 존재에 경의와 예의를 표하는 것.


프란치가 옆 벤치에 앉아 양손으로 벤치 바닥을 쓰다듬는다. 도라는 아이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삶은 분명 계속될 것이다. 지금도 어딘가에 프란치와 미래를 함께할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거다. 한 소년이 코로나 방역 완화를 반기며 베를린의 축구장에서 축구공을 갖고 놀고 있을 것이다. 미래의 어느 날 브라켄 출신의 엄청 긴 금발 머리 아가씨와 결혼하게 될 걸 꿈에도 모른 채, 또 어딘가에서 곧 프란치의 절친이 될 소녀가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30년 후에 자동차 사고를 당해 양팔이 부러지게 될 청년이 마스크와 헤드폰을 쓰고 지하철에 앉아 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하며 세상에 새겨져 있고 준비하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건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돌릴 바퀴도, 잡아당길 레버도 없다.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생각에 도라는 긴장이 살짝 풀리는 걸 느낀다.

율리 체, [인간에 대하여] 418쪽


자연 앞에서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고 함부로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는다. 잊을 때마다 한 번씩 바이러스가 찾아온다. 바이러스는 인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간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지, 우리야말로 인간을 가장 필요로 하거든. 그 앞에서 우리는 공포에 질리고 서로를 증오하기보다, 연대해야 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존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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