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컬렉션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 전11권 - 가난한 사람들 + 죄와 벌 + 백치 + 악령 +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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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자마자 감격해서 탄성 예상보다 훨씬 더 고급지고 읽기 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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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로드
조너선 프랜즌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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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로드crossroads, 교차로, 십자로, 갈림길, 기로, 중대한 삶의 국면, 갈림길에서 어떤 길로 갈 것인가 선택하는 순간 결정되는 운명. 조너선 프랜즌의 [크로스로드]에서 이 이름은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뉴프로스펙트 마을의 교회에 소속된 청소년부를 지칭한다. 


교회의 부목사로 재직 중인 러스 힐데브란트는 이 크로스로드에서 3년 전 큰 모욕을 당했고 아내인 매리언과 냉담한 상태. 큰아들 클렘은 아버지의 뜻에 반해 대학을 그만두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려 하고, 딸 베키와 셋째 페리는 아버지가 쫓겨나다시피한 크로스로드에 가입하고, 각자 연애와 마약 문제로 혼란스러운 상태.


크로스로드는 어떤 곳인가? 아니, 1970년대 미국 중서부 지역의 교회란 어떤 장소인가? 한 번도 종교적인 경험을 해 본 적 없는 무신론자의 눈에 대림절(성탄절 전야)과 부활절이 중요한 명절이고 신과 예수와 신앙에 대해 거리낌없이 토론하는 세계는 낯설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매리언과 베키의 '신과의 만남' 묘사조차 과장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이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종교적이기만 한 작품은 아니다. 일반적인 독자의 눈에 [크로스로드]는 거대한 감정 가족 드라마다.


베키는 안전이라는 말이 수동적 공격성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크로스로드의 금기 단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전하다'란 '위험을 감수하다'의 반대말이었다.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그 어떤 개인적 성장도 일어날 수 없었다.

"넌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어."

- 조너선 프랜즌 [크로스로드]


크로스로드에서 아이들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감정을 토로하며 솔직하게 다가간다. 부목사 러스가 크로스로드에서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종교적인 위선으로 기도를 집전하다 아이들의 반발을 산 것이다. 가장 어린 넷째 저드슨을 제외한 세 아이들, 클렘과 베키, 페리는 각자 크로스로드에 가입하여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며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대면한다. 그 사이에 매리언은 가족 몰래 정신과 상담을 받고 그녀 역시 오랜 기간 억누르고 있던 적나라한 감정과 마주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네 감정에 솔직하라'가 아닐까?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원수마저도 사랑하라, 솔직하라는 말은 내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감정을 '대면하라'는 뜻이다.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순간의 감정에 따라가기만 하면 교차로에서 달려오는 자동차를 보지 못한다. 러스의 경우에 그 자동차는 프렌시스 코트렐이라는 과부였고, 페리는 대마초와 코카인이라는 마약에 치여 쓰러진다. 감정에 거리를 두고 제대로 보게 될 때, 매리언과 베키의 경우처럼 신을 보게 된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에 차 가고자 하는 길을 선택하고 뒤돌아보지 않는다.


가족의 모든 감정이 한데 모여 교차한 봄 수련회, 러스가 간통을 저지르는 그 순간 그의 아들은 약에 취해 방화를 저지른다. 매리언은 러스를 용서하고 부부는 가장 크게 추락한 아들을 보듬기 위해 다른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다. 위기의 끝에 힐데브란트 가족은 다시 뭉치고, 흩어진다. 베키는 대학을 포기하고 아이를 낳고 자신의 가족을 이루고 부모를 용서하지 않는다. 클렘은 부모와 베키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베키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암시(그 역시 가족을 떠난다는)로 소설은 끝맺는다.


감정에 뼈대가 있다면 조너선 프랜즌의 소설은 골수까지 침범해 분석하는 철두철미함과 세심함을 보여 준다. 각자의 감정에 휩쓸리는 등장인물 한 명 한 명 모두에게 쉽게 몰입하게 되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게 한다. 간통을 저지른 러스나 저지를 뻔한 매리언을 욕하기는 쉽다. 가족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여성 인물들의 선택에 실망할 수도 있다. 소설은 그런 인간들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보여줄 뿐이다. 인간이란 감정의 동물이고, 가장 큰 감정은 사랑이며, 사랑이 있기에 질투심, 이기심, 외로움, 분노, 슬픔 등의 감정들이 따라오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사랑의 감정을 안다. 너의.....를 사랑하라. 사랑은 안전하지 않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성장도 없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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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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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초겨울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나와 직접적으로 가까운 이의 부고는 처음이었다. 출산을 두 달 앞둔 나는 무거운 몸을 끌고 KTX를 탔다. 같은 해 추석에 찾아뵌 게 마지막 만남이 되어버렸다. 절을 올린 뒤 내가 임신한 걸 알리자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셨다. 내가 품은 생명이 잠시나마 할아버지께 가닿은 순간이었다.


영정사진 속 할아버지께 두 번의 절을 올리고 상주인 아버지를 보는데 깜짝 놀랐다. 아빠 얼굴에 이렇게 주름이 많았나? 아빠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모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이가 드셨구나, 언제나 그 자리에 영원히 계실 것 같았던 할아버지가 떠나셨다. 죽음과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 건 처음이었고 그 가까움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충격을 받았다.


언제나 엄마를 살아있는 존재로 여겨 왔던 나는 언젠가, 그것도 얼마 안 가서 곧 엄마가 죽는 걸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엄마의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 26쪽


우리는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할 준비가 잘 되어있지 않다. 현대사회는 죽음을 꽁꽁 숨긴다. 장례식장과 납골당, 무덤을 도시 외곽으로 밀어내고 의도적으로 망각한다. '향수, 모피, 속옷, 보석, 죽음에게 내어 줄 자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뿜어내는 호화로운 거만함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의 이면에 죽음이 숨겨져 있었다. 개인 병원, 종합 병원, 그리고 닫힌 병실이 간직하고 있는 침울한 비밀 속에 죽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진실이었다.(같은 책, 111쪽)' 내 주변 사람들도, 나 자신도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삶을 이어간다. 그렇게 방심한 우리 앞을 죽음이 예고 없이 막아선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지하철을 기다리다,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 눈앞에 등장한 죽음 앞에서 우리는 속절없이 당황한다.


보부아르도 병든 어머니의 무력한 육체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충격을 받는다. 5주 전만 해도 건강해 보였던 어머니가 집에서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식사를 잘 못하는 것을 본 의사의 제안으로 방사선 검사를 하다 말기 암에 걸린 것을 발견한다. 길어야 하루이틀이라는 의사의 말에 충격받은 보부아르와 여동생은 엄마에게 복막염이라 둘러대고 개복수술을 감행해 4주의 시간을 얻는다. 엄마와 함께하는 생애 마지막 시간, 그 속에서 보부아르는 그저 엄마였던 그녀 안에서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라는 유일무이한 존재를 새롭게 발견한다.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

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는, 잊힌 여인에 불과했던 엄마가 한 명의 주체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같은 책, 146쪽


'있을 때 잘 해'라는 말을 쉽게 한다. 충고는 쉽고 실행은 어렵다. 돌아가시기 전에 좀 더 자주 할아버지를 찾아 뵐 걸, 후회는 쉽고 이미 늦었다. 장례식장과 멀지 않은 요양병원에 계신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몇 년 전부터 정신이 흐릿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모르셨다. 부푼 내 배를 쓸어내리며 할아버지와 같은 환한 미소로 웃으셨다. 그날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와 친척 어른들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처음 만나 결혼하게 된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되었다. 서울과 장흥과 제주도를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새로운 주인공으로 호명되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두 달 뒤에 할머니는 '밥 해 줘야지'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같은 책, 153쪽


큰 병 없이 노환으로 돌아가신 나의 조부모님께 호상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두 분의 죽음은 여전히 충격이고 나를 보고 웃으시던 마지막 미소를 반복해서 되새긴다. 죽음에 지나치게 매몰되는 건 좋지 않다. 그렇다고 너무 가볍게 취급하는 태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같은 말은 죽음이 코앞에 닥친 엄마를 돌보는 보부아르에게 전혀 쓸모가 없다. 나의 진짜 생활은 엄마 곁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엄마를 지키는 것, 그것만이 내 유일한 목표였다.(같은 책, 103쪽)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인지하고, 억누르며 살아 온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다. 빠르게 무너져가는 육체와 극심한 고통과 그럼에도 반짝이는 순간들, 연장된 4주 간의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엄마를 돌본 뒤 한 권의 책으로 애도하는 과정.


함께 한 시간이 있었기에 작가는 엄마의 죽음에 '아주 편안한 죽음'이라는 제목을 달 수 있었다. 엄마의 죽음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건 아니지만, 좋은 죽음 따위는 없지만, 최소한 편안한 죽음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실 엄마는 비교적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셨다.

같은 책, 137쪽


타인의 애도의 과정을 따라가며 슬쩍 나의 슬픔을 얹는다. 가장 가까운 이를 잃은 상실감을 달래기 위한 애도의 글쓰기, 인간의 죽음이 운명인 이상 절대 끊기지 않을 슬픔의 형상화 작업.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언제나 엄마를 살아있는 존재로 여겨 왔던 나는 언젠가, 그것도 얼마 안 가서 곧 엄마가 죽는 걸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엄마의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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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단편소설 전집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10
버지니아 울프 지음, 한국 버지니아 울프 학회 외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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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와는 또 다른 의식의 흐름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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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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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 독서의 역사, 문학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나만의 사적인 '소설의 역사'를 서술하자면 연대기의 시작에 자리한 이름이 은희경이다. 중2의 나는 국어선생님이 재미있는 소설이니 읽어보라며 추천해 주신 [새의 선물]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 소설은 어린 나를 매료시켰던 해리 포터 시리즈와 결이 달랐다. 시작부터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11쪽) 같은 문장이 튀어나왔다. 사춘기를 통과 중인 내게 은희경의 냉소는 삶이라는 미궁을 인도하는 아리아드네의 실과 같았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은희경 [새의 선물] 그녀의 냉소를 한 손에 쥐고 이후 출간되는 작품들을 성실하게 따라 읽었다. 감탄하고, 의아해하고, 때로는 실망하며 은희경이란 이름이 하나의 장르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태연한 인생] 이후 새 장편소설이 나온다는 소식에 알라딘 인터넷서점 '새로나올 책' 카테고리를 계속해서 새로고침했다. 1970년대 여대 기숙사가 배경이라고 했다. 1960년대의 진희가 자라 여대에 가게 된다면? 소설 속 '나'인 김유경의 목소리를 빌려, 2017년의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약점을 숨기려는 것이 회피의 방편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태도가 되어 내 삶을 끌고 갔다. 내 삶은 냉소의 무력함과 자기 위안의 메커니즘 속에서 굴러갔다.은희경 [빛의 과거] 181쪽 이제 냉소는 삶의 성실성이 아닌 무력함의 표현이라고, 자신의 삶은 상처받기 싫어 끊임없이 회피하고 수긍하며 이를 변명하는 데 급급하다 조금씩 '인생의 포물선이 하강하는 것을'(325쪽) 지켜봐야 했음을 덤덤하게 고백한다. 그 고백의 계기가 된 건 친한 친구는 아니지만 가장 오래된 친구, 77년 같은 기숙사에서 만났고 우연이 겹쳐 관계가 이어지게 된 김희진과 김희진이 쓴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라는 소설 때문이었다. 여러 사람과 공유한 시간이므로 누구도 과거의 자신을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편집하거나 유기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을까. 은희경 [빛의 과거] 18쪽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김희진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설 속 소설인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에 쓰인, 김유경을 포함해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한 양애란, 곽주아, 최성옥, 이재숙 등의 인물들을 '공주'라 부르며 희화화하는 소설 전략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나'(김희진)를 통찰력 가진 성숙한 주인공으로 형상화하는 의도가 빤하지 않나. 소설을 한 번 더 반복해 읽으면서 이 [빛의 과거] 소설 자체가 '나'(김유경)의 또 다른 편집된 과거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별적인 다름이 필연적으로 섞이는(28쪽) 기숙사라는 공간에서 공유된 과거를 아예 폐기할 수는 없다. 아무리 지우고 싶은 과거라도 인간은 오롯이 혼자서만 살 수 없고 지나간 시간은 필연적으로 뒤섞인다. 김유경은 말더듬이라는 약점을 핑계로 삶과 대면하는 순간마다 도망치기 바빴고, 김희진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설득할 수 있는 이야기로 과거를 편집했다. 달라 보이지만 결국 같은 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떨어질 수 없다. '계속해서 다음 권이 출간되는 문제집 시리즈를 풀어가듯 주어진 생을 감당하며 살아왔을 뿐이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나의 또 다른 생의 긴 알리바이를 보았던 것이다.'(13쪽)

서로가 서로의 문제집 답지이자, 상대방의 알리바이인 관같은 창문이라도 유리의 두께나 창문의 방향, 각도에 따라 빛의 색이 달라지듯이 같은 과거의 시간은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적힌다. 김희진과 김유경이 되살려 내는 1977년도의 여자 기숙사생들, 여학생이란 '조강지처, 애인, 첩, 식모' 네 가지로만 평가되던(26쪽) 시대 어떤 카테고리로도 설명되지 않고 설명될 수 없었던 개별적인 여자들. 최성옥과 송선미, 양애란, 이재숙, 오현수, 곽주아, 이경혜의 이름들.

훈육과 세뇌가 기본인 가학적인 카드 섹션 연습으로 형상화된 개성의 말살이 당연시되던 군부 독재의 시대 각자의 방식으로 '다름'을 추구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내게 약간의 슬픔을 남겼다. 소설 막바지 김유경이 덤덤하게 토로하는 독백의 여운 때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은희경 [빛의 과거] 335쪽

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인다. 불변하는 과거나 유동적인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 소설은 회고록에 가깝고 2017년의 현재 역시 반쯤 굳은 콘크리트처럼 극적인 변화가 거의 없는 시간대라 이 독백이 슬프게 다가오면서도 이야기로 생생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유독 힘겹게 완성하셨다는 이번 소설의 다음이 있다면 이 문장을 예고편으로 써도 되지 않을까. 편집되거나 유기된 과거가 현재를 덮치는 이야기, 또 한 번 기다림이 시작된다.

은희경 [빛의 과거]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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